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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1일 월요일

[로마 황제] 제36대 황제 : 퀸틸루스(Quintillus, 270)

36대 황제 : 퀸틸루스(Quintillus, 270)

 

  • 로마 제국의 제36대 황제
  • 재위 : 270(17~177)
  • 출생 : ?
  • 사망 : 2704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 퀸틸루스(Quintillus)270년에 수개월 간 통치한 로마 제국의 황제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지역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났다.

 


형이 군인으로서 탁월한 용기와 리더십을 갖췄다며 세간의 찬사를 받으며 출세를 거듭하는 동안, 퀸틸루스는 별다른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나중에 군대에게 불신임당한 것을 볼 때, 그는 형과는 달리 군사적 재능이 결여되었고 형의 곁을 지키며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형이 즉위한 후 이탈리아 사르다니아의 징세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걸 볼 때 공직을 맡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270년 황제로 추대되다]

 

2703월 형인 클라우디우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수행하던 군대는 동생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당시, 퀸틸루스는 형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아 아퀼레이아에 남아 있었다고 하며, 형이 원로원, 군대, 민중들에게 신망이 워낙 높았고 이 사람 역시 인망이 있는 탓에 자연스레 권력 승계가 이뤄졌다. 이에 대해 12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처음부터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고 한다.

 

[다뉴브 강의 로마군이 그를 불신임하다]

 

그러나 다뉴브 강에 주둔한 로마군은 퀸틸루스를 비루한 인물로 여겨 황제 즉위를 불신임했고, 클라우디우스의 부하로서 기병대 지휘를 맡아 여러 공적을 세웠던 아우렐리아누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내란의 위기를 맞이한다.

 

[원로원이 추대를 취소하다]

 

다뉴브 강 주둔 로마군이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원로원은 퀸틸루스 추대를 취소했고 퀸틸루스 추대에 동의했던 로마군도 그를 저버린다. 결국 퀸틸루스는 사망한다. 그의 사인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어떤 기록에는 그가 부하들에게 암살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기록에는 그가 자살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에 대한 기록도 엇갈린다. 일부 자료에는 퀸틸루스가 재위 17일 만에 죽었다고 하고, 다른 자료에는 그가 177일 동안 재위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연결점?]

 

콘스탄티누스 1세의 할머니(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2세와 퀸틸루스의 동생 크리스푸스가 낳은 딸이라고,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대 작성된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전한다.

 

[로마 제국] 제35대 황제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35대 황제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 로마 제국의 제35대 황제
  • 재위 : 2689~ 2701
  • 출생 : 214510
  • 사망 : 2701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는 클라우디우스 2(Caludius II)라고도 하는데, 268년부터 270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확실히 없다. 다만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여 성실과 용기를 보여줘 데키우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외에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주먹질로 말을 때려 이빨을 다 날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도 이야기는 같은데,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힘이 장사라서 250년 레슬링 선수와 경기 중 상대가 자신의 성기를 움켜 잡으며 반칙을 하자, 그 즉시 상대를 제압하면서 그 선수의 치아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황제 시절]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원로원과 민중은 클라우디우스를 장군감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가 그를 연대장급 장교로 내버려둔 것에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승진시켜 일리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 모에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달마티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령관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그의 명성을 질투하고 그가 황제가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 등 당대 역사가들의 사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시대에도 중용되어 갈리에누스가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268, 갈리에누스 황제가 살해되고 황제에 오르다]

 

268,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던 기병대 사령관 아우레올루스가 자신을 포스투무스 황제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그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갈리에누스의 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까지 암살됐다.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당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암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역시 이 암살에 가담했고, 갈리에누스 사후 황제 형제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정중히 치뤄줬다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그가 암살과 무관하게 보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황제 휘하의 병사들은 갈리에누스의 후임으로 암살과 무관해보였던 클라우디우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반역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클라우디우스가 암살 주동세력의 핵심인사라는 점이다. 이외에도 그가 제위에 오른 직후, 갈리에누스를 살해하고 자신을 옹립한 헤라클리아누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는 것도, 원로원의 갈리에누스 아들과 아내 살해를 묵인한 것도 사실이다.

 

[고트족과의 전쟁]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무렵, 로마 제국은 고트족의 대대적인 침략에 직면했다. 267, 고트족은 여러 게르만족과 함께 500척의 배를 이끌고 흑해 연안에 침략해 수많은 해안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비잔티움과 시지쿠스를 파괴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날뛰며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약탈하고 본토로 돌아간 후 이듬 해에 재차 침입했다. 하지만 작년에 고트족 해적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로마군은 이번에는 해군을 제때 투입해 그들을 저지했고, 육로로 쳐들어온 고트족 역시 네스토스 강 근처에서 달마티아 기병대의 공격으로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서기 269,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한 후 방심한 적을 습격했다. 훗날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때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 5만여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 여러 병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하고 일부 전사들만 살아남아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승리에 감격하며 클라우디우스에게 고티쿠스란 존칭을 바쳤다.

 

[전염병으로 사망하다]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을 섬멸한 뒤 반달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을 몰살시킨 전염병은 로마군에게도 퍼졌고 많은 로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클라우디우스 마저 전염병에 걸려 며칠간 신음하다가 2703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후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군대는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두 황제는 제국의 재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곧 퀸틸루스가 사망하고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관계?]

 

4세기 이후 등장한 이야기와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친척이었고 대제의 할머니 클라우디아의 큰아버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플라비우스 가문, 즉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직계조라고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은 현재 거짓말로 평가받는다. 당장 대제의 아버지 클로루스의 일생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분석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로마 사회에서 클로루스가 3세기 황제 중 모든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훌륭했던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아들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의 경력 이전에 모든 사서에서 그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고 본인 역시 이를 내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고향에서 큰 전쟁을 치룬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족보를 세탁했다고 의심받고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대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주변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로마 제국] 제33ㆍ34대 황제 :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3)

3334대 황제 :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3)

 

  • 로마 제국의 제3334대 황제
  • 재위 : 2531022~ 2689
  • 33대 발레리아누스(부친)과 공동 재위(2531022~ 260년 봄)
  • 출생 : 218년경
  • 사망 : 2689

 


갈리에누스(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는 로마 제국의 33대 황제로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공동황제로 다스리다가 260~268년까지는 단독 황제로 지냈다.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첫 부인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소 발레리아누스)가 있었는데, 그는 이복동생이었다. 갈리에누스가 태어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 요안니스 말라라스는 갈리에누스가 사망 당시 50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갈리에누스는 218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253]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다

 

2531022,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에 올랐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게 1세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선례에 따라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동의를 얻어냈고, 플라비우스 왕조 이래 세습체제 구축을 시작한 로마 황제들이 그렇듯 자신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를 253년 보결집정관에 추천해 당선시켰다. 이렇게 장남을 공동 황제에 올리고 차남을 보결집정관에 당선시켜 로마 안에서의 리키니우스 가문 입지를 강화시킨,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도나우 강에서 게르만 민족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라인강 국경을 방어하다]

 

갈리에누스는 공동 황제로 즉위한 뒤 253년부터 258년까지 도나우 강 유역과 일리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대부분의 기간을 라인 강 국경 지역에서 보냈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이 기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라인강을 수차례 건너 게르만 족의 여러 부락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에게 적대적인 당대의 역사가들도 이 시기 라인강 일대의 로마군의 승리는 갈리에누스의 지휘 덕분임을 인정했다. 255년 또는 257, 갈레리아누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 사실은 그가 로마를 잠깐 방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255년 또는 256년에 도나우 강 국경 지대에 머무르는 동안 발레리아누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잉게누우스가 황제를 칭하다]

 

258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섰고 갈리에누스는 게르만족의 침략 저지에 몰두했다. 판노니아 방면군 사령관 잉게누우스는 두 황제가 다른 지역에서 정신이 팔리느라 자신에게 신경 못 쓰는 틈을 타 황제를 참칭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 2세가 도나우 강 유역에서 사망했는데, 기록은 없지만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실바누스, 포스투무스의 지도하에 후방에 남겨두고 260년에 발칸반도를 건너 아우레올루스가 지휘하는 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무르사 또는 시미늄에서 잉게누우스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 잉게누우스는 수도로 정했던 시미늄이 무너진 후 도주하다가 사망했다.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다]

 

260년 초, 발레리아누스는 전염병이 창궐해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로마군을 이끌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로마군은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잡혔다. 샤푸르는 여세를 몰아 실리시아,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했다. 이에 동부의 잔여 로마군대를 지휘한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는 재정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팔미라 기병 지휘관 오데나투스와 함께 샤푸르를 상대로 맞서 싸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마크리아누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황제로 선포하고 갈리에누스로부터 독립했다.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고 동방의 잔여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갈리에누스였지만, 당시 그는 잉게누우스의 반란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수습하느라 동방에 갈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발칸 반도 주민들이 동요한 나머지 현지 사령관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레갈리아누스는 수개월 동안 황제를 칭하고 적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싸웠으나 결국 록솔라니족에게 패해 살해당했다.

 

261년 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그는 261년 봄 또는 초여름에 알리리쿰에서 반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마크리아누스의 두 아들은 살해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갈리에누스는 더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데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갈리아 반란 : 포스투무스가 갈리아 제국을 수립하다]

 

260, 갈리아 방면군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빼았았다. 그는 이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지휘관 실바누스는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게 맞는다며 자신에게 보내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포스투무스의 병사들은 분노하여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그들을 이끌고 쾰른을 포위했고, 쾰른 시민들은 몇 주 후에 실바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두 사람을 처형했다.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셌기 때문에, 그는 몇 년간 갈리아 반란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265,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포스투무스는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본따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했다.

 

[이집트 반란]

 

262,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에누스는 로마의 귀중한 곡물창고인 이집트가 상실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장군 아우렐리우스 테오도투스를 급파해 아이밀리아누스를 토벌하게 했다. 262330, 테오도투스는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생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 그러나 테오도투스 역시 반란을 도모하다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이집트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이 당시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의 참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남겼고, 이는 이 시대의 혼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소중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

 

[267, 고트족이 침략하다]

 

267,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처음에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아테네,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함선을 구성해 지중해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로마 해군은 이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그들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듬해, 훨씬 더 많은 침략군들이 해상을 통한 침략을 개시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지난해에 맛본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고 해군을 제때에 투입해 트라이스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육상에서는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였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고트족은 발칸 반도를 초토화한 후 갈리아,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제노비아, 팔미라 제국을 선포하다]

 

267,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데나투스는 고트족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메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 제노비아는 즉각 메오니우스를 처형한 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잡았다. 제노비아는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동부 속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속주를 침공해 점령했다. 또한 그녀는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팔미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의 난립으로 인해 3등분되고 말았다.

 

[군대 개혁]

 

갈리에누스는 제국의 어느 곳에서나 신속하게 배치될 수 있는 기병조직을 창설했다. 이 기병대는 변경에서 떨어진 후방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즉시 출격해 현장으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다. 이 기병조직은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은 군인 황제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 로마 제국을 전란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전방에 있는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 요충지(시르미움, 밀라노등)에 배치하고 그 도시를 요새화 하였다. 따라서 이제 야만족들은 도나우강 근처의 군단기지 뿐만 아니라 요새화된 도시까지 뚫어야 했다.

 

[행정, 원로원 개혁]

 

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군 사령관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문관과 무관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 결과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군 사령관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은 약화되어 황제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차지했다. 즉 군사관련 분야만 전문가인 군인출신의 기사계급이 맡았다.

 

갈리에누스의 개혁은 예전의 고르디아누스 1, 고르디아누스 2, 데키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케이스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반면 그의 이 조치는 이후 진짜 순수 군인출신 황제들의 등장을 초래하게 됐으며, 민간과 군대의 이분화 조치는 후기 로마제국 속주들에서 양쪽의 이해충돌과 법령 해석 및 이해의 차이 등의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정책]

 

한편,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주도했던 기독교 탄압 정책을 259년 중지하고 기독교에 관한 최초의 공식 관용 선언을 발표해 예배 장소와 묘지를 복원하게 했고 교회의 재산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칙령이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후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다할 탄압을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군인황제 시대 동안 급격하게 성장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인의 10%를 신자로 삼는 거대 종교로 성장했다.

 

[268, 암살되다]

 

268,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칭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후 승리를 앞둔 시점에 자신의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모두 갈리에누스가 중용했던 일리리아계였는데, 어떤 이유로 갈리에누스를 암살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이유 탓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는데 대체로 나오는 분석에 따르면, 크리스트교 확산 방지를 위해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 등을 적극 후원하면서 반감을 사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도나우 방어선과 그 일대 국방 문제에 큰 힘을 쏟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지지해주던 일리리아계 장군들마저 불만을 품었고, 그 결과가 불신임의 의사표시인 암살이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역사가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띄우기 위한 주장이므로 전부 사실은 아니다. 갈리에누스의 직계 가족은 전부 살해됐고,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 역시 갈리에누스와 함께, 혹은 갈리에누스의 어린 아들과 함께 살해됐다. 다행히 계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자녀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발레리아누스 즉위와 갈리에누스 단독황제 등극에 크게 기여한, 갈리에누스의 외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 내 사람들도 방계황족인 이유로 살해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중 갈리에누스의 외사촌으로,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와 265년 공동집정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와 그 형제들 역시 갈리에누스 형제가 죽은 뒤 원로원 명령으로 처형됐으며 여러 측근들도 살해됐다.

 

[가족관계]

 

  • 부친 : 발레리아누스
  • 배우자 : 코르넬리아 살로니아
  • 자녀 : 발레리아누스,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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