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대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AD 458~479) 6년 : 기원후 463년
▶ 벌지와 덕지가 매복하여 왜인을 물리치다 : 463년 02월(음)
- 六年, 春二月, 倭人侵欿[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欿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歃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歃을 따랐다.]良城, 不克而去. 王命伐智·德智, 領兵伏候於路, 要擊大敗之. 王以倭人屢侵疆埸, 縁邊築二城.
- 6년(463) 봄 2월에 왜인(倭人)이 삽량성(歃良城)[1]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왕이 벌지(伐智)[2]와 덕지(德智)[3]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길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물리쳤다. 왕은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을 쌓았다.
▶ 군대를 사열하다 : 463년 07월(음)
- 秋七月, 大閱.
- 〔6년(463)〕 가을 7월에 〔군대를〕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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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삽량성(歃良城) : 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북정동, 신기동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에 양주(良州)는 문무왕 5년(665) 상주(上州),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를 둔 것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양주(良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의 양주(梁州)라고 되어 있다. 양주는 조선 태종 때 양산군(梁山郡)으로 고쳤으며, 그 중심지는 현재의 양산시 중부동, 북부동이었다. 다만 삼국 시대의 삽량은 그보다 약간 북쪽의 양산시 북정동, 신기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북정동고분군과 신기동고분군, 신기동 성황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삼국 통일 후 9주(州)의 주치(州治)를 확정하고 신문왕 7년(687) 사벌주와 삽량주에 성을 쌓았는데, 이 때 쌓은 성이 북부동산성으로 추정되며, 이와 더불어 중심지의 근거리 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朴泰祐, 1987, 「統一新羅時代의 地方都市에 對한 硏究」, 『百濟硏究』 18, 71~72쪽). 본서 박제상전에 의하면 삽량은 박제상이 삽량주간(歃良州干)으로 있던 곳이며, 낙동강으로 들어온 왜인이 상륙하여 경주로 진입하던 곳이었다. 『일본서기』에서는 삽량을 초라성(草羅城), 잡라(匝羅) 등으로 표기하였다.
- 벌지(伐智) : 본서 신라본기에 2차례 등장하는데, 자비왕 6년(463) 덕지(德智)와 함께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 덕지(德智) : 본서 신라본기에 4차례 등장하는데, 자비왕 6년(463) 벌지(伐智)와 함께 삽량성에 침입한 왜인을 물리쳤고, 같은 왕 16년(473) 아찬 벌지와 급찬 덕지를 좌·우장군으로 삼았다. 같은 왕 19년(476)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장군 덕지가 이를 물리쳤고, 소지왕 17년(495) 고구려가 백제 치양성을 포위하자 장군 덕지를 보내 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