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AD 356~402) 1년 : 기원후 356년
▶ 나물이사금이 즉위하다 : 356년 04월(음)
- 奈勿 一云那宻.尼師今立. 姓金, 仇道葛文王之孫也. 父末仇角于[정덕본에는 于로 되어 있다.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干으로 되어있는데, 관등명이므로 干이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干을 따랐다.], 母金氏休禮夫人. 妃金氏, 味鄒王女.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 末仇·末[정덕본에는 末로 되어 있다. 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未로 되어있는데, 《삼국사기》 본기에는 味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味를 따랐다.]鄒尼師奈[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奈로 되어 있다. 왕호이므로 今이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今을 따랐다.]兄弟也..
- 나물(奈勿) 나밀(那密)이라고도 한다.이사금(尼師今)[1]이 즉위하였다. 성(姓)은 김(金)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2]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각간(角干)[3] 말구(末仇)[4]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 휴례부인(休禮夫人)[5]이다. 비(妃)[6]는 김씨(金氏)로 미추왕(味鄒王)의 딸이다. 흘해(訖解)[7]가 죽고 아들이 없어서 나물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말구와 미추이사금은 형제이다.
▶ 신라의 근친혼에 대한 사론
- 論曰.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是故, 魯公之取於吳, 晉侯之有四姬, 陳司敗·鄭子産深譏之. 若新羅則不止取同姓而已, 兄弟子·姑姨從姉姝, 皆聘爲妻. 雖外國各異俗, 責之以中國之禮, 則大悖矣. 若㓙奴之烝母報子, 則又甚於此矣.
- 논하여 말한다. 아내를 얻을 때 같은 성씨[同姓]를 취하지 않는 것은 분별을 두터이 하기 위함이다.[8] 그러므로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서 〔아내를〕 얻고[9] 진후(晉侯)가 네 명의 희씨(姬氏) 성(姓)을 가진 첩[四姬]을 둔 것[10]을 진(陳)나라의 사패(司敗)와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이 매우 나무란 것이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를 취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과 고종·이종 자매까지도 모두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은 각기 그 습속이 다르지만 중국의 예속(禮俗)으로 따진다면 〔도리에〕 크게 어긋났다고 하겠다. 흉노(匈奴)에서 어머니와 자식이 상간(相姦)하는 것[烝母報子][11]은 또한 이보다 더욱 심하다.
[각주]
- 나물이사금(奈勿尼師今) : 신라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 ‘奈勿’은 ‘내물’로 읽기도 하지만 ‘나밀(那密)’로도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나물’로 읽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본서에서는 나물이사금이라고 하였지만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나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라고 되어 있다. 후자에 의하면 나물이 최초의 마립간이 되고 전자에 의하면 그 아들인 눌지가 최초의 마립간이 된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1, 사이부(四夷部) 동이(東夷)2 신라조)에는 “부견(符堅) 건원(建元) 18년(382) 신라국왕(新羅國王) 누한(樓寒)이 사신을 보냈다.”라고 되어 있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영락(永樂) 10년(400) 신라 매금(寐錦)이 조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누한과 매금은 마립간의 이표기(異表記)로 보이므로, 적어도 나물왕 말기에는 마립간을 칭했음을 알 수 있다. 나물마립간은 두 번째 김씨 왕으로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그는 첫 번째 김씨 왕인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다음 왕인 실성이사금(혹은 마립간)과 함께 미추왕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나물은 그 아버지, 어머니, 부인이 모두 김씨로 석씨(昔氏) 왕족과는 관계가 적은 편이다. 반면 실성은 모계(母系)가 석씨이다. 나물은 즉위 후 마립간을 칭하였는데, 여기에서 마립간은 마루한, 즉 여러 간(干) 중에 으뜸이 되는 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李丙燾, 1976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625~630쪽). 다시 말해 중앙과 지방의 여러 공동체의 장(長)을 아우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또 중국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내 “時代變革 名號改易”이라 하여 이전과는 달라진 면모를 과시했다. 다만 전진에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구려를 통한 것이었으며, 또 「광개토왕릉비」에 의하면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倭)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 : 아달라이사금대(154~184)와 벌휴이사금대(184~196)에 활동한 생몰년 미상의 인물. 김씨로서 최초로 왕이 된 미추이사금과 나물마립간의 아버지 말구(末仇), 실성마립간의 아버지 대서지(大西知)의 부친으로 나타나 있다. 본서 권2 신라본기2 아달라이사금 19년(172) 정월조의 주석 참조.
- 각간(角于)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일 높은 이벌찬(伊伐湌)의 이칭.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17년(73)조의 주석 참조.
- 말구(末仇) : 나물마립간의 아버지로 구도갈문왕의 아들이며 미추이사금과 형제간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다른 기록은 없다.
- 휴례부인(休禮夫人) : 구도갈문왕의 아들 각간 말구의 부인이면서 나물마립간의 어머니. 그 외에는 정보가 없다.
- 비(妃) : 미추이사금의 딸이자 나물마립간의 부인이면서 눌지마립간의 어머니. 본서 권3 신라본기3 눌지마립간 즉위조에는 눌지왕의 어머니가 보반부인(保反夫人) 또는 내례길포(內禮吉怖)라고 되어 있으며,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김씨 내례희부인(內禮希夫人)이라고 되어 있다. 내례길포와 내례희는 대체로 같은 소리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며, 다만 글자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 흘해(訖解) : 흘해이사금, 신라 제1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10~356년. 본서 권2 신라본기2 흘해이사금 즉위년(310) 6월조의 주석 참조.
- 아내를 … 위함이다 : 『예기(禮記)』 방례편(坊禮篇)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는 “子云 取妻不取同姓 以厚別也 故買妾不知其姓 則卜之 以此坊民 魯春秋猶去夫人之姓曰吳 其死曰孟子卒”이라 하여, 노(魯)의 『춘추(春秋)』에 소공(昭公) 부인(오나라 출신으로 노나라와 오나라는 모두 성이 姬였음)의 성(姓)을 적지 않고 오(吳)라고만 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取妻不取同姓’은 『예기(禮記)』 곡례(曲禮) 상(上)에도 나온다.
- 노공(魯公)이 오(吳)나라에서 〔아내를〕 얻고 : 노공(魯公)은 노(魯)나라 소공(昭公, 재위 B.C. 541~B.C. 510)을 가리킨다. 양공(襄公)의 아들로 이름은 조(稠)이고, 33년간 재위하였다. 노나라와 오나라는 모두 희성(姬姓)인데 소공이 오나라 여자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에 동성(同姓)과 혼인한 셈이 된다. 이를 진사패(陳司敗)가 나무란 것은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 나온다.
- 진후(晉侯)가 네 명의 희씨(姬氏) 성(姓)을 가진 첩[四姬]을 둔 것 : 진후(晉侯)는 진(晉)나라 평공(平公, 재위 B.C.557~B.C.532)을 말한다. 진나라는 주 왕실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주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이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원년조에 의하면 진평공이 병이 있었는데 정(鄭)나라 임금이 공손교(公孫僑, 字는 子産)로 하여금 진나라를 방문하고 위문하게 했다. 공손교, 즉 자산(子産)은 진 평공이 병에 걸린 것이 사시(四時, 아침, 낮, 저녁, 밤)를 한결같이 하지 못하고 동성(同姓)의 여인을 가까이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사희(四姬), 네 명의 희씨(姬氏) 성(姓)을 가진 첩을 둔 사실을 지적하였다.
- 어머니와 자식이 상간(相姦)하는 것[烝母報子] :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간음하는 것을 ‘증(烝)’이라 하고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상간(相姦)하는 것을 ‘보(報)’라 한다. 즉 『소이아(小爾雅)』 광의(廣義)에 “上淫曰烝 下淫曰報 勞淫王通”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사기(史記)』 권109 흉노전(匈奴傳)에는 “아비가 죽으면 그 후처를 아들이 아내로 삼고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남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차지한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