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4일 수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15년 : 기원후 528년

23대 법흥왕(法興王, AD 514~540) 15: 기원후 528

 

불교가 비로소 널리 퍼지다 : 528()

 

  • 十五年, 肇行佛法. 初訥祇[정덕본에는 , 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王時, 沙門墨胡子自高句麗至一善郡, 郡人毛禮於家中作窟室安置. 於時, 梁遣使賜衣着·香物, [정덕본에는 , 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주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䝴香徧問. 墨胡子見之, 稱其名目曰, “此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所謂神聖未有過於三寶, 一曰佛陁, 二曰達摩, 三曰僧伽. 若燒此發願, 則必有靈應.” 時王女病革, 王使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甚喜, 餽贈尤厚. 胡子出見毛禮, 以所得物贈之, 因語曰, “吾今有所歸, 請辝.” [정덕본에는 , 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의 본자이다.]俄而不知所歸.
    至毗處王時, 有阿道 一作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病而死.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至是, 王亦欲興佛敎, 羣臣不信, 喋喋騰口舌, 王難之. 近臣異次頓 或云處道.奏曰, “請斬小臣以定衆議.” 王曰, “本欲興道而殺不古辜[정덕본에는 古辜, 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非也.” 答曰, “若道之得行, 臣雖死無憾.” 王於是召群臣問之, 僉曰, “今見僧徒, 童頭異服, 議論奇詭而非常道. 今若縱之, 恐有後悔. 臣等雖卽重罪, 不敢奉詔.” 異次頓獨曰, “今羣臣之言非也. 夫有非常之人, 然後有非常之事. 今聞佛敎淵奧, 恐不可不信.” 王曰, “衆人之言, 牢不可破, 汝獨異言, 不能兩從.” 遂下吏將誅之, 異次頓臨死曰, “我爲法就刑, 佛若有神, 吾死必有異事.” 及斬之, 血從斷處湧, 色白如乳. 衆恠[정덕본에는 , 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다. 의 속자이다.], 不復非毁佛事 此據金大問鷄林雜傳所記書之, [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문의로 보아 가 맞다.]韓奈麻金用行所撰我道和尙碑所録[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주자본에는 으로 되어 있다.], 殊異..
  • 15(528)에 불법(佛法)이 비로소 유행하였다.[1] 처음 눌지왕 때에 승려[沙門] 묵호자(墨胡子)[2]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3]으로 왔는데, 일선군 사람인 모례(毛禮)[4]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편히 머물게 하였다. 이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주었다.[5] 왕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용도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것을보고, 그 이름을 대며 말하기를, “이것을 사르면 짙은 향기가 나면서 정성이 신성(神聖)에 이르게 됩니다. 이른바 신성이란 것은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첫째는 불타(佛陁)[6]이고, 둘째는 달마(達磨)[7]이며, 셋째는 승가(僧伽)[8]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며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묘한 감응[靈應]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왕의 딸[王女][9]이 병이 중하므로 왕이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더니,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선물을 매우 후하게 주었다. 묵호자는 궁궐을나와 모례를 만나 받은 선물을 주고, 이어서 말하기를, “내가 지금 갈 데가 있어 작별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비처왕(毗處王)[10] 때에 이르러 아도(阿道) 또는 아도(我道)라고도 적는다. 화상(和尙)[11]이 시중드는 세 사람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그곳에서몇 년간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다. 그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과 율()[12]을 강독하였는데, 이따금 불교를신봉(信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13]
    이때에 이르러 왕[법흥왕] 역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14]이 믿지 않고 이러쿵저러쿵하며 불평을 늘어놓았으므로 왕이 난감해하였다.[15] 왕의가까운 신하[近臣][16]인 이차돈(異次頓)[17]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기를, “바라건대 소신(小臣)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본래 도()를 일으키고자 하는 것인데,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대답하여 말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18] 왕이 이에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여 물으니 모두 다 말하기를, “지금 승려들을 보면, 박박 깎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떳떳한 도리[常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에 승려들을그대로 놓아둔다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重罪)를 받더라도 감히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차돈이 홀로 말하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무릇 특별한 사람[非常之人]이 있은 연후에야 특별한 일[非常之事]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아마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다.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을 다 따를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관리[下吏]가 장차 이차돈의목을 베려고 하니,[19]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장(刑場)에 나아가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통력이 있으시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목을 베자, 피가 목이잘린 곳에서 솟구쳤는데 피의색깔이 우윳빛처럼 희었다.[20]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에서 행하는 일[佛事]에 대해 헐뜯지 않았다.[21] 이것은 김대문(金大問)[22]계림잡전(鷄林雜傳)[23]에 기록한 것에 의거하여 썼다. 한나마(韓奈麻)[24] 김용행(金用行)[25]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26]에 기록된 것과 자못 차이가 있다.

 

==========

 

[각주]

 

  1. 불법(佛法)이 비로소 유행하였다 : ‘조행불법(肇行佛法)’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어 널리 유행한 사실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본 기록에는 이차돈이 법흥왕 15(528)에 순교하였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는 신라본기(新羅本記)에 이르기를, ‘법흥대왕 즉위 14(527)에 소신(小臣) 이차돈이 불법을 위하여 죽었다.’고 하였으니, 바로 소량(蕭梁) 보통(普通) 8년 정미(丁未: 527)로 서천축[西竺]의 달마(達摩)가 금릉(金陵: 중국 난징[南京]의 옛 이름)에 왔던 해이다.”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또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에서는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염촉(朴厭髑: 이차돈)이 순교한 해가 법흥왕 16(529)이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김부식은 영통사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에서 불법이 양()나라 대통(大通) 원년(元年) 정미(527)에 비로소 신라에 전래되었다.”라고 언급하였고, 최치원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에서 법흥왕이 율령을 마련한 지 8년째 되던 해(528)에 신라 땅에 불교가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언급하여 불교를 공인한 해에 대해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527년에 법흥왕이 흥륜사(興輪寺)에서 사신(捨身)하려고 하였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이차돈이 흥륜사 창건의 책임을 지고 순교함으로써 신라 조정에서 불교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법흥왕이 대왕(大王)’을 칭하던 시절인 법흥왕 22(535) 흥륜사를 중창할 때에 실질적으로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견해(辛鍾遠), 불교 공인 연대는 이차돈의 순교 시점이 아니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興輪寺)의 창건 공사가 시작된 시점인 법흥왕 22년이라고 보는 견해(李基白)도 제기되었다. 이밖에 왕의 출가와 도승(度僧)의 실시십재일(十齋日)의 살생금지(殺生禁止) 공표 등을 주목하여, 법흥왕대에 불교 교단이 확립되었다고 이해한 다음, 법흥왕대의 불교 공인은 승단과 재가신도 모두를 망라한 교단의 확립을 전제로 하여 가능하였다는 견해(신선혜)가 제기되어 주목된다.
    〈참고문헌
    李基白, 1986, 三國時代 佛敎 受容과 그 社會的 性格,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辛鍾遠, 1993, 新羅 佛敎公認實相,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14,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신선혜, 2010, 신라의 불교 전래와 교단의 확립, 佛敎硏究33
  2. 묵호자(墨胡子) :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일선군(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이르러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인물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아도전(阿道傳)에서는 흑호자(黑胡子)라고 전한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아도기라조에서 일연(一然)은 묵호자와 아도(阿道)는 동일인이고, 묵호자는 진짜 이름이 아니라 그저 외형을지목한 말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폈다. 묵호자와 흑호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묵호자는 인도 또는 서역 계통의 승려로 추정된다.
  3. 일선군(一善郡) : 오늘날 경북 구미시 선산읍에 비정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상주조에 숭선군(嵩善郡)은 본래 일선군이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라고 전한다. 신라에서 6세기 전반에 주()와 군()을 설치하였다고 보이기 때문에 5세기 중반인 눌지왕 때에는 일선촌(一善村) 또는 일선성(一善城)이라고 불렀거나 단지 일선(一善)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4. 모례(毛禮) : 눌지왕 때에 불교를 신라에 전해준 묵호자(墨胡子)와 아도화상(阿道和尙)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한 인물이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아도기라조에서는 모록(毛祿)이라고 하였다. 현재 경북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모례장자터와 모례장자샘 등이 전해지고 있고, 모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전승도 전해지기도 한다(정영호).
    모례에서 ()’을 뜻하므로, ‘모례털레라고 부를 수도 있고, 털레가 터레-뎌레-더레로 변하여 현재의 이 되었으며, 절의 일본어 발음인 데라(てら)’, 경북 구미시 해평면 송곡리에 위치한 도리사(桃李寺)의 명칭 등도 모두 모례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가 있다(江田俊雄, 1935; 1977, 137; 권상로, 5). 한편 모례는 일선군을 기반으로 존재하였던 재지세력 또는 토착세력으로서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친고구려계 인물로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金德原).
    〈참고문헌
    江田俊雄, 1935, 新羅ける佛敎受容いつ, 朝鮮242; 1977, 朝鮮佛敎史硏究, 國書刊行會
    권상로, 1939, 조선불교사개론, 불교시보사
    정영호, 1997, 구미·선산 지역의 불교, 韓國學論集24,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金德原, 2004, 新羅 佛敎民間 受容에 대한 一考察-一善郡 毛禮中心으로-, 新羅史學報1
  5.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을 주었다 : 눌지왕(재위 417~457) 때는 양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의 송()나라(420~479) 시기에 해당한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아도기라조에서 일연(一然)은 눌지왕은 진송(晉宋) 때에 해당하므로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잘못인 듯하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여기서 일연은 고려 전기의 사람인 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 양나라에서 원표(元表)라는 사승(使僧)을 시켜 명단향[溟檀]과 불경·불상을 보내왔다고 밝히기도 하였다. 한편 양나라 사신이 가지고 왔다는 의복과 향은 외국 상인이 가져온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辛鍾遠, 1977, 新羅佛敎傳來와 그 受容過程再檢討, 白山學報22).
  6. 불타(佛陁) : ‘깨달은 자라는 뜻의 범어 ‘Budda’의 음역(音譯)이다.
  7. 달마(達磨) : 범어 ‘Darma’의 음역(音譯)으로, 이는 부처님이 설법한 사상 또는 진리를 뜻하는 ()’으로 의역(意譯)된다.
  8. 승가(僧伽) : 불교수행을 하는 집단 또는 개인 승려를 뜻한다. 이는 범어의 ‘Shanga’의 음역(音譯)이다.
  9. 왕의 딸[王女] : 눌지왕의 딸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0. 비처왕(毗處王) : 소지왕(炤知王: 재위 479~500)의 다른 이름이다. ‘비처(毗處)’비치다또는 비추다비치혹은 비추를 음차(音借)하여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11. 아도화상(阿道和尙) : 신라에 불법(佛法)을 전래한 인물이다. 아도(我道), 아두(阿頭), 아도(阿度) 등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아도전(阿道傳)에서 혹은 본래 천축(天竺: 인도) 사람이라고 하고, 혹은 오()나라에서 왔다고 하며, 혹은 고구려에서 위나라로 들어갔다가 뒤에 신라로 돌아왔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아도기라조에서 인용한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본비(我道本碑)해동고승전아도전에서 인용한 박인량(朴寅亮: 1047~1096)수이전(殊異傳)에 아도에 관한 자세한 사항이 전하는데,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도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고,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寜)이며, 아버지는 조위(曹魏)에서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아굴마(我崛摩)였다. 두 사람이 사통(私通)하여 낳은 아도는 5살에 출가하고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현창화상(玄彰和尙)에게 수학하였다가 19세에 고구려에 귀국하였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미추왕(未雛王: 味鄒王) 때인 263년에 신라에 와서 대궐에 가 설법하였는데, 사람들이 그를 꺼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하자, 속림(續林)에 숨어 살았다. 후에 미추왕의 딸인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치고, 미추왕에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키라고 아뢰었으나, 미추왕 사망 이후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고 하여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죽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아도기라조에서 일연(一然)은 묵호자(墨胡子)와 아도는 동일 인물이고, 아도가 고구려에서 신라에 온 시기가 눌지왕 때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일찍이 아도와 묵호자를 동일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견해가 제기되었고(李丙燾), 근래에 아굴마와 고도령 사이에서 태어난 아도(我道)가 미추왕 때에 처음으로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었고, 이후 눌지왕대의 묵호자, 비처왕(소지왕)대의 아도화상(阿道和尙), 법흥왕대의 아도(阿道)는 모두 신라에 온 전법승(傳法僧)으로 볼 수 있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高榮燮).
    〈참고문헌
    李丙燾, 1976, 新羅佛敎浸透過程異次頓殉敎問題新考察,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高榮燮, 2014, 「 『삼국유사』 「흥법'阿道基羅' 의 고찰,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35,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2. ()과 율() : 부처가 설법한 것을 기록한 책이 ()’이고, 승려와 신도가 지켜야할 계율을 ()’이라고 한다.
  13. 이따금 불교를신봉(信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2 사금갑조에 소지왕 10년 무진(戊辰: 488)에 내전(內殿) 분수승(焚修僧)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하다가 처형되었다고 전한다. 여기서 분수승은 향을 태우면서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승려를 가리킨다. 이 기록을 통해 소지왕(재위 479~500) 때에 내전, 즉 왕실에서 불교를 신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14. 여러 신하들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향전(鄕傳)’에서는 공목(工目)과 알공(謁恭) 등이라고 구체적으로 거명하였다. 한편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에서는 대신(大臣) 공알(恭謁) 등이라고 하였다.
  15. 이때에 이르러 왕이 난감해하였다 : 종래에 왕족과 귀족들이 모두 천신(天神)의 후예라는 관념을 가졌는데, 재래신앙의 천신족 관념은 지배층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데에는 유효하였지만, 왕의 위상이 귀족의 그것을 근본적으로 초월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법흥왕의 입장에서 자신의 위상을 제고시키기 위해 불교의 공인에 앞장섰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6~209). 이에 따르면, 불교에서는 천신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존재로 간주하였고, 반면에 부처는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 절대적 존재로 묘사하였으므로, 국왕이 절대적 존재인 부처를 신봉하면, 국왕은 논리적으로 천신의 후예인 귀족들을 초월하는 위상을 지닐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법흥왕이 불교의 수용과 공인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다고 한다.
  16. 왕의가까운 신하[近臣]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일념(一念)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는 염촉(厭髑: 이차돈)내양자(內養者)’ 또는 사인(舍人)’이라고 하였고,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에서는 내사사인(內史舍人)’이라고 하였다. 한편 본서 권제48 열전제8 실혜(實兮)조에 진평왕대에 상사인(上舍人)과 하사인(下舍人)이 있었다고 전한다. 검군조에 검군(劍君)이 사량궁(沙梁宮)의 사인이었다고 전하는데, 이를 통해 왕이 거처하는 대궁(大宮)과 양궁(梁宮) 등에도 사인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경문왕 12(872)에 작성된 황룡사 9층목탑 금동찰주본기(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에 요극일(姚克一)이 춘궁(春宮: 동궁) 중사성(中事省: 세택(洗宅))의 관리였다고 전하고, 같은 해에 건립된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탑비(谷城 大安寺 寂忍禪師塔碑)에 요극일이 중사인(中舍人)이었다고 전하여, 872년에 요극일이 춘궁(동궁) 소속 중사인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평왕대에 사인이 상사인과 하사인으로 분화되었고, 이후에 중사인을 추가로 설치하였으며, 679년 동궁 건립 이후에 상사인과 중사인, 하사인 등을 동궁에 배치한 것으로 이해된다.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이차돈이 사형을 당하자, 춘궁에서 말고삐를 나란히 했던 친구들이 서로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 돌아보았다고 전하나, 당시에 동궁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춘궁은 국왕이 거처하는 대궁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차돈이 법흥왕의 근신이었다고 전하므로, 그의 직함은 국왕을 측근에서 시종하는 대궁의 사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全德在, 2019, 桃花女鼻荊郞 說話形成 背景歷史的 意味,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40,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200).
  17. 이차돈(異次頓) : 법흥왕 때에 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인물이다. 염촉(厭觸) 또는 이처돈(異處頓)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일연(一然)혹은 이차(異次)라고 하고, 혹은 이처(伊處)라고도 하니, 방언(方言: 우리 말)에 따라 구별한 것이다. 번역하면 염()이 된다. ‘()’, ‘()’, ‘()’, ‘()’, ‘()’ 등은 모두 글을 쓴 자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조사(助辭)이다. 지금 윗말을 번역하고 아랫말은 번역하지 않아서 염촉(厭髑)’ 또는 염도(厭覩)’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헌덕왕(재위 809~826) 때에 남간사(南澗寺)의 사문(沙門)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는 이차돈은 성()이 박씨이고 자()는 염촉이며, 아버지는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는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 아진종(阿珍宗)이라고 하였다. 또한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에서는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 흘해왕)이라고 하였다. 습보갈문왕은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500)조에 나물왕의 손자이며, 지증왕의 아버지라고 전한다. 이차돈의 세계(世系)를 종합하여 보면, 이차돈은 김씨라고 볼 수도 있고, 박씨와 석씨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종래에 촉향분예불결사문에 전하는 세계는 이차돈 어머니의 부계(父系: 김씨) 계보를 전하는 것이고, 아도비에 전하는 세계는 부계(父系: 석씨)의 계보를 전하는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47~48). 한편 촉향분예불결사문에서는 이차돈이 순교하였을 때 나이가 22세였다고 전하는 반면, 아도비에서는 26세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18. 왕의가까운 신하[近臣]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 법흥왕과 이차돈의 대화 내용은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 전하는 내용 및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에 전하는 내용과 차이가 있다.
  19. 마침내 관리[下吏]가 장차 이차돈의목을 베려고 하니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는 법흥왕과 이차돈이 사전에 모의하고 사찰을 지으라고 한 명령을 어긴 죄를 물어 이차돈을 처형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향전(鄕傳)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에서는 왕명을 거짓으로 전하여 사찰을 짓게 한 죄를 물어 염촉(이차돈)을 처형하였다고 하였다.
  20. 목을 베자 우윳빛처럼 희었다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인용한 촉향분예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서는 옥리(獄吏)가 이차돈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고, 마침내 북산(경주 금강산)의 서쪽 고개에 장사지냈으며, 내인(內人)들이 그를 위하여 자추사(刺楸寺)를 지었다고 하였고, 향전(鄕傳)에서는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서 경주의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다고 하였다. 한편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1 법공전(法空傳)에는 마침내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지고, 목이 끊어진 자리에서는 흰 젖이 용솟음쳐 높이 수십 길로 솟아올랐다. 햇빛은 어두워지고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내렸으며 땅이 크게 진동하였다. 유체(遺體)를 받들어 금강산에 장사지내고 예배하였다. 그때 임금과 신하들은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에게 귀의하겠습니다.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밝으신 신령은 우리를 죽이십시오.’라고 하였다.”라고 전한다.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6 사자비구전(師子比丘傳)에 계빈국(罽賓國)의 왕 미라굴(彌羅掘)이 불교를 신봉하지 않고 사찰과 탑을 무너뜨리며 많은 승려를 살해하고, 예리한 검()으로 사자(師子)의 목을 베자, 정수리에서 피가 나오지 않고 오직 젖만이 솟아났다고 전하고, 또한 현우경(賢愚經)2 찬제파리품(羼提波梨品)에 염부제(閻浮提)의 바라내(波羅㮈) 나라에 가리(迦梨)라는 왕이 대선사(大仙士) 찬제파리(羼提波梨)의 인욕(忍辱) 수행을 시험한다고 두 팔과 두 다리, 코와 귀를 잘랐는데, 그럼에도 선인의 얼굴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으며, 선인이 내 인욕 수행이 진실하다면 내 피는 젖이 되고 내 몸은 회복될 것이라.’고 말하자, 곧바로 피는 젖이 되고 사지는 회복되었다고 전한다. 본 기록은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법이 널리 유행하였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경전에 전하는 설화를 끌어다가 그의 거룩한 죽음을 성화(聖化)하여 서술한 것으로 이해된다.
  21. 여러 사람들이 헐뜯지 않았다 : 종래에 이차돈의 죽음으로 곧바로 불교가 공인되지 않았고, 이를 계기로 국왕과 귀족세력 간에 일정한 타협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한편 법흥왕 22(535)부터 그간 중단되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때 불교가 공인되었을 것이라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李基白, 1975; 1986, 76~80).
    삼국시대에 불교수용의 배경에 대해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고대국가의 사상체계로서 선택되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李基白·李基東, 247~250). 한편 신라는 4~6세기 읍락공동체의 해체가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등장한 사류(士流)들을 국가정치체제 내로 적극 흡수하여 지배기반의 안정을 추구하였는데, 그것의 외형적인 모습이 정치적으로는 하급 관등과 외위(外位)의 설치로,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공인으로 나타났다는 견해가 제기되었고(南希叔), 다른 한편으로 4~6세기에 농업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계층분화와 읍락공동체의 해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인간은 사회 속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심각한 의문을 갖게 되었으며,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고급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여 신봉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나희라).
    〈참고문헌
    李基白, 1975, 新羅 初期 佛敎貴族勢力, 震檀學報40
    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古代篇), 一潮閣
    李基白, 1986, 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南希叔, 1991, 新羅 法興王代 佛敎受容과 그 主導勢力, 韓國史論25,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나희라, 2000, 고대 한국의 샤머니즘 세계관과 불교적 이상세계, 韓國古代史硏究20
  22. 김대문(金大問) :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남해차차웅 즉위년조 참조.
  23. 계림잡전(鷄林雜傳) : 신라의 진골로 성덕왕 3(704)에 한산주(漢山州: 경기도 하남시·광주시)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책이다. 본서의 찬자는 불교가 공인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계림잡전에서 인용하여 신라본기에 기재하였고, 또한 신라본기에 전하는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의 왕호에 대한 해석 역시 여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이 계림잡전에 전한다는 사실을 참조할 때, 이것은 신라 역사상 중요한 사실과 잡다한 여러 사건을 기술한 책으로 이해된다(李基白, 1978, 金大問과 그의 史學, 歷史學報77).
  24. 한나마(韓奈麻) : ‘()’크다의 뜻이므로, 한나마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0등급인 대나마(大奈麻)를 가리킨다.
  25. 김용행(金用行) : 삼국유사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도 보이는데,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를 지은 인물이며, 이외에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아 더 이상의 행적은 알 수 없다.
  26.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것으로 아도비(我道碑), 아도본비(我道本碑), 아도비(阿道碑)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 사람인 아도가 미추왕(未雛王: 味鄒王) 때에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