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 금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 기원후 579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02()

 

  • 四年, 春二月, 百濟築熊峴城·松述城, 以梗䔉山城·麻知峴城·內利西城之路.
     
  • 4(579) 2월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1]과 송술성(松述城)[2]을 쌓아 산산성(䔉山城),[3] 마지현성(麻知峴城),[4] 내리서성(內利西城)의 길을 막았다.[5]

 

진지왕이 죽다 : 5790717()

 

  • 秋七月十七日, 王薨. 諡曰眞智, 葬于永敬寺北.
     
  • 4(579)가을 717일에 왕이 돌아가셨다.[6]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7]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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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웅현성(熊峴城) :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661) 919일 기록에 문무왕이 웅현정(熊峴停)에 나아가 머물며 여러 총관(摠管)과 대감(大監)들을 모아 놓고 몸소 나아가 훈계(訓戒)하였다고 전한다. 웅현정은 웅현성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16 충청도 보은현 산천조에 웅현이 현()의 북쪽 27리에 있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현재 보은군 보은읍 노티리에서 내북면 상궁리를 연결하는 노티고개[老峙]로 비정된다. 종래에 이를 주목하여 웅현성을 보은 근처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酒井改藏; 서영일, 124~125).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원년 925일 기록에 신라가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고 전하는데,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671)조에 전하는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에 문무왕이 661년에 옹산성(瓮山城)을 함락시키고 웅진현(熊津峴)에 성()을 쌓아 웅진(충남 공주)으로 통하는 도로를 열었다[旣拔瓮山 仍於熊津峴造城 開通熊津道路]고 언급한 내용이 전하는 것에 의하건대, 이것은 웅진 근처에 위치한 고개인 웅진현에 쌓은 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웅진현성이 오늘날 어디에 위치하였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참고문헌
    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地名考, 朝鮮學報54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문화사
  2. 송술성(松述城) : 송술성은 백제가 579년에 쌓은 성이나 정확한 위치를 고증할 수 없다.
  3. 산산성(䔉山城) : 경덕왕 때에 고구려의 매시달현(買尸達縣)을 산산현(䔉山縣)으로 개명(改名)한 것을 주목하여 산산성이 함경남도 원산시(북한 강원도 원산시)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도 하나(정구복, 132),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한편 산산성을 경북 예천으로 비정하는 견해(酒井改藏, 41), 마지현성 등과 함께 보은이나 괴산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일, 125).
    참고문헌
    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地名考, 朝鮮學報54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연구사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4. 마지현성(麻知峴城) : 마지현성은 신라 서쪽 변경에 있었던 성이다. 마지현성을 예안·예천간의 문현(文峴)으로 비정하는 견해(酒井改藏, 41), 산산성 등과 함께 보은이나 괴산 일대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영일, 125).
    참고문헌
    酒井改藏, 1970, 三國史記地名考, 朝鮮學報54
    서영일, 1999, 신라 육상 교통로 연구, 학연연구사
  5. 백제가 웅현성(熊峴城)길을 막았다 : 본서 권제27 백제본기제5 위덕왕 26(579) 기록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종래에 웅현성을 충북 보은군 보은읍 노티리에서 내북면 상궁리를 연결하는 노티고개[老峙]로 이해한 다음, 당시에 백제가 웅현성과 송술성을 쌓아 신라가 화령고개 및 추풍령을 넘어 충북 보은과 옥천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강력하게 견제하려 하였던 것으로 추정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全德在, 2019, 桃花女鼻荊郞 說話形成 背景歷史的 意味,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40,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6. 왕이 돌아가셨다 : 본 기록에서 진지왕이 죽었다고 단순하게 전하지만,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2 도화녀비형랑조에는 진지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정치가 문란하여 어지러워졌고, 음란(淫亂)함에 빠졌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廢位)시켰다고 전한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신뢰하여, 진지왕이 실정(失政)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고 이해하고 있다. 여기서 나라 사람들은 진골 귀족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사륜계(舍輪系)와 동륜계(銅輪系)의 대립이 진지왕 폐위의 가장 커다란 원인이었고, 진지왕의 정란황음(政亂荒淫)’은 진지왕이 폐위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金德原, 91~94). 또한 진지왕은 제왕(帝王)의 위용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반대세력이 진지왕의 강력한 후원자인 거칠부(居柒夫)가 사망하자, 곧바로 그를 폐위하였으며, 그 후 진지왕은 2년 남짓 유폐 상태로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이정숙, 80~84). 이밖에 백정(白淨)을 중심으로 한, 즉 동륜태자와 연결된 진골귀족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킨 뒤에 정란황음을 폐위의 명분으로 제시하였다고 보거나(金基興), 진지왕이 박씨 진골귀족을 비롯한 새로운 세력과 연대하려고 하다가 실패하자, 숙흘종(肅訖宗)을 비롯한 진골귀족세력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정란황음을 표면적인 폐위 명분으로 내세웠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고현아, 52~56). 이외에도 진지왕이 정사(政事)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정치가 문란해진 상황에서, 거칠부 사망 후 진골귀족 사이에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나타났고, 여기에다 대외적으로 백제가 신라를 위협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됨에 따라 진골귀족들이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나이 어린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을 왕위에 옹립하였다는 견해가 최근에 제기되었다(전덕재).
    참고문헌
    金基興, 1999 桃花女·鼻荊郞 설화의 역사적 진실, 韓國史論4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金德原, 2007, 新羅中古政治史硏究, 경인문화사
    이정숙, 2012 신라 중고기 정치사회 연구, 혜안
    고현아, 2016, 신라 상고기 진흥왕계 왕실의 구축과 정치이념 연구, 가톨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全德在, 2019, 桃花女鼻荊郞 說話形成 背景歷史的 意味,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40, 경주시·신라문화선양회·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7.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 법흥과 진흥, 진평 등이 모두 시호가 아니라 각 왕의 생시에 사용하던 칭호임을 감안하건대, ‘진지역시 진지왕 생시에 사용한 칭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8.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 : 경주시 서악480-100에 있는 무덤을 2011년에 사적 제517호 경주 진지왕릉으로 재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덤이 진지왕릉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진지왕과 법흥왕, 진흥왕, 태종무열왕을 영경사 또는 애공사(哀公寺) 근처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기록을 중시하여 진지왕릉을 무열왕릉 북쪽 서악동고분군(사적 제142) 가운데 하나로 비정하고 있다(姜仁求, 1984; 2000, 425~426; 김용성; 이근직, 201~208; 崔珉熙).
    참고문헌
    姜仁求, 1984, 新羅王陵再檢討; 柳花溪羅陵眞贗說과 관련하여, 東方學志41; 2000, 古墳硏究, 학연문화사
    김용성, 2012, 경주 서악동 능원과 그 의의, 인류학·고고학 논총: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개설40주년 기념논총
    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崔珉熙, 2017, 경주 서악동고분군에 대한 새로운 왕릉 명칭 비정, 新羅史學報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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