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로마 제국] 제35대 황제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35대 황제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 268~270)

 

  • 로마 제국의 제35대 황제
  • 재위 : 2689~ 2701
  • 출생 : 214510
  • 사망 : 2701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Claudius Gothicus)는 클라우디우스 2(Caludius II)라고도 하는데, 268년부터 270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확실히 없다. 다만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여 성실과 용기를 보여줘 데키우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외에도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힘이 장사였다고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주먹질로 말을 때려 이빨을 다 날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도 이야기는 같은데,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처럼 힘이 장사라서 250년 레슬링 선수와 경기 중 상대가 자신의 성기를 움켜 잡으며 반칙을 하자, 그 즉시 상대를 제압하면서 그 선수의 치아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황제 시절]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원로원과 민중은 클라우디우스를 장군감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가 그를 연대장급 장교로 내버려둔 것에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승진시켜 일리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 모에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달마티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령관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그의 명성을 질투하고 그가 황제가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 등 당대 역사가들의 사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시대에도 중용되어 갈리에누스가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268, 갈리에누스 황제가 살해되고 황제에 오르다]

 

268,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던 기병대 사령관 아우레올루스가 자신을 포스투무스 황제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그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갈리에누스의 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까지 암살됐다.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당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암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그 역시 이 암살에 가담했고, 갈리에누스 사후 황제 형제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정중히 치뤄줬다는 것인데 이런 태도는 그가 암살과 무관하게 보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갈리에누스 암살 이후, 황제 휘하의 병사들은 갈리에누스의 후임으로 암살과 무관해보였던 클라우디우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

 

클라우디우스가 반역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클라우디우스가 암살 주동세력의 핵심인사라는 점이다. 이외에도 그가 제위에 오른 직후, 갈리에누스를 살해하고 자신을 옹립한 헤라클리아누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는 것도, 원로원의 갈리에누스 아들과 아내 살해를 묵인한 것도 사실이다.

 

[고트족과의 전쟁]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무렵, 로마 제국은 고트족의 대대적인 침략에 직면했다. 267, 고트족은 여러 게르만족과 함께 500척의 배를 이끌고 흑해 연안에 침략해 수많은 해안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비잔티움과 시지쿠스를 파괴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날뛰며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약탈하고 본토로 돌아간 후 이듬 해에 재차 침입했다. 하지만 작년에 고트족 해적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로마군은 이번에는 해군을 제때 투입해 그들을 저지했고, 육로로 쳐들어온 고트족 역시 네스토스 강 근처에서 달마티아 기병대의 공격으로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서기 269,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한 후 방심한 적을 습격했다. 훗날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때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 5만여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 여러 병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하고 일부 전사들만 살아남아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승리에 감격하며 클라우디우스에게 고티쿠스란 존칭을 바쳤다.

 

[전염병으로 사망하다]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을 섬멸한 뒤 반달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을 몰살시킨 전염병은 로마군에게도 퍼졌고 많은 로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클라우디우스 마저 전염병에 걸려 며칠간 신음하다가 2703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후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군대는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두 황제는 제국의 재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곧 퀸틸루스가 사망하고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혈연관계?]

 

4세기 이후 등장한 이야기와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친척이었고 대제의 할머니 클라우디아의 큰아버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플라비우스 가문, 즉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직계조라고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은 현재 거짓말로 평가받는다. 당장 대제의 아버지 클로루스의 일생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분석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로마 사회에서 클로루스가 3세기 황제 중 모든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훌륭했던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아들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의 경력 이전에 모든 사서에서 그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고 본인 역시 이를 내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고향에서 큰 전쟁을 치룬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족보를 세탁했다고 의심받고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대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주변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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