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로마 제국] 제33ㆍ34대 황제 :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3)

3334대 황제 : 갈리에누스(Gallienus, 253~263)

 

  • 로마 제국의 제3334대 황제
  • 재위 : 2531022~ 2689
  • 33대 발레리아누스(부친)과 공동 재위(2531022~ 260년 봄)
  • 출생 : 218년경
  • 사망 : 2689

 


갈리에누스(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는 로마 제국의 33대 황제로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공동황제로 다스리다가 260~268년까지는 단독 황제로 지냈다.

 

갈리에누스는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첫 부인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소 발레리아누스)가 있었는데, 그는 이복동생이었다. 갈리에누스가 태어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 요안니스 말라라스는 갈리에누스가 사망 당시 50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갈리에누스는 218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253]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공동황제가 되다

 

2531022,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에 올랐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게 1세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선례에 따라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동의를 얻어냈고, 플라비우스 왕조 이래 세습체제 구축을 시작한 로마 황제들이 그렇듯 자신의 차남 소 발레리아누스를 253년 보결집정관에 추천해 당선시켰다. 이렇게 장남을 공동 황제에 올리고 차남을 보결집정관에 당선시켜 로마 안에서의 리키니우스 가문 입지를 강화시킨,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다. 이때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도나우 강에서 게르만 민족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라인강 국경을 방어하다]

 

갈리에누스는 공동 황제로 즉위한 뒤 253년부터 258년까지 도나우 강 유역과 일리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대부분의 기간을 라인 강 국경 지역에서 보냈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와 아우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이 기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라인강을 수차례 건너 게르만 족의 여러 부락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에게 적대적인 당대의 역사가들도 이 시기 라인강 일대의 로마군의 승리는 갈리에누스의 지휘 덕분임을 인정했다. 255년 또는 257, 갈레리아누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 사실은 그가 로마를 잠깐 방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255년 또는 256년에 도나우 강 국경 지대에 머무르는 동안 발레리아누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잉게누우스가 황제를 칭하다]

 

258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섰고 갈리에누스는 게르만족의 침략 저지에 몰두했다. 판노니아 방면군 사령관 잉게누우스는 두 황제가 다른 지역에서 정신이 팔리느라 자신에게 신경 못 쓰는 틈을 타 황제를 참칭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 2세가 도나우 강 유역에서 사망했는데, 기록은 없지만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실바누스, 포스투무스의 지도하에 후방에 남겨두고 260년에 발칸반도를 건너 아우레올루스가 지휘하는 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무르사 또는 시미늄에서 잉게누우스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 잉게누우스는 수도로 정했던 시미늄이 무너진 후 도주하다가 사망했다.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다]

 

260년 초, 발레리아누스는 전염병이 창궐해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로마군을 이끌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로마군은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잡혔다. 샤푸르는 여세를 몰아 실리시아,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했다. 이에 동부의 잔여 로마군대를 지휘한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는 재정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팔미라 기병 지휘관 오데나투스와 함께 샤푸르를 상대로 맞서 싸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마크리아누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황제로 선포하고 갈리에누스로부터 독립했다.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고 동방의 잔여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갈리에누스였지만, 당시 그는 잉게누우스의 반란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수습하느라 동방에 갈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발칸 반도 주민들이 동요한 나머지 현지 사령관 레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레갈리아누스는 수개월 동안 황제를 칭하고 적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싸웠으나 결국 록솔라니족에게 패해 살해당했다.

 

261년 봄, 갈리에누스는 아우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그는 261년 봄 또는 초여름에 알리리쿰에서 반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마크리아누스의 두 아들은 살해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갈리에누스는 더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데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갈리아 반란 : 포스투무스가 갈리아 제국을 수립하다]

 

260, 갈리아 방면군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빼았았다. 그는 이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지휘관 실바누스는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게 맞는다며 자신에게 보내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포스투무스의 병사들은 분노하여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그들을 이끌고 쾰른을 포위했고, 쾰른 시민들은 몇 주 후에 실바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두 사람을 처형했다.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셌기 때문에, 그는 몇 년간 갈리아 반란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265,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포스투무스는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본따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했다.

 

[이집트 반란]

 

262, 이집트 총독 루키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에누스는 로마의 귀중한 곡물창고인 이집트가 상실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장군 아우렐리우스 테오도투스를 급파해 아이밀리아누스를 토벌하게 했다. 262330, 테오도투스는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생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 그러나 테오도투스 역시 반란을 도모하다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이집트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이 당시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의 참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남겼고, 이는 이 시대의 혼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소중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

 

[267, 고트족이 침략하다]

 

267,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처음에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아테네,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함선을 구성해 지중해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로마 해군은 이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그들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듬해, 훨씬 더 많은 침략군들이 해상을 통한 침략을 개시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지난해에 맛본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고 해군을 제때에 투입해 트라이스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육상에서는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였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고트족은 발칸 반도를 초토화한 후 갈리아,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제노비아, 팔미라 제국을 선포하다]

 

267,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데나투스는 고트족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메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 제노비아는 즉각 메오니우스를 처형한 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잡았다. 제노비아는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동부 속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속주를 침공해 점령했다. 또한 그녀는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팔미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의 난립으로 인해 3등분되고 말았다.

 

[군대 개혁]

 

갈리에누스는 제국의 어느 곳에서나 신속하게 배치될 수 있는 기병조직을 창설했다. 이 기병대는 변경에서 떨어진 후방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즉시 출격해 현장으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다. 이 기병조직은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은 군인 황제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 로마 제국을 전란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전방에 있는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 요충지(시르미움, 밀라노등)에 배치하고 그 도시를 요새화 하였다. 따라서 이제 야만족들은 도나우강 근처의 군단기지 뿐만 아니라 요새화된 도시까지 뚫어야 했다.

 

[행정, 원로원 개혁]

 

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군 사령관이 되는 것을 금지했고 문관과 무관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 결과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군 사령관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은 약화되어 황제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차지했다. 즉 군사관련 분야만 전문가인 군인출신의 기사계급이 맡았다.

 

갈리에누스의 개혁은 예전의 고르디아누스 1, 고르디아누스 2, 데키우스, 아이밀리아누스 같은 케이스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반면 그의 이 조치는 이후 진짜 순수 군인출신 황제들의 등장을 초래하게 됐으며, 민간과 군대의 이분화 조치는 후기 로마제국 속주들에서 양쪽의 이해충돌과 법령 해석 및 이해의 차이 등의 부작용도 초래했다고 비판을 받고 있다.

 

[기독교 정책]

 

한편,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주도했던 기독교 탄압 정책을 259년 중지하고 기독교에 관한 최초의 공식 관용 선언을 발표해 예배 장소와 묘지를 복원하게 했고 교회의 재산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칙령이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후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다할 탄압을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군인황제 시대 동안 급격하게 성장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인의 10%를 신자로 삼는 거대 종교로 성장했다.

 

[268, 암살되다]

 

268,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기병대 지휘관 아우레올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칭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우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우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후 승리를 앞둔 시점에 자신의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모두 갈리에누스가 중용했던 일리리아계였는데, 어떤 이유로 갈리에누스를 암살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이유 탓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는데 대체로 나오는 분석에 따르면, 크리스트교 확산 방지를 위해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 등을 적극 후원하면서 반감을 사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도나우 방어선과 그 일대 국방 문제에 큰 힘을 쏟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지지해주던 일리리아계 장군들마저 불만을 품었고, 그 결과가 불신임의 의사표시인 암살이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역사가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이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띄우기 위한 주장이므로 전부 사실은 아니다. 갈리에누스의 직계 가족은 전부 살해됐고,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 역시 갈리에누스와 함께, 혹은 갈리에누스의 어린 아들과 함께 살해됐다. 다행히 계모와 소 발레리아누스의 자녀들은 처형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발레리아누스 즉위와 갈리에누스 단독황제 등극에 크게 기여한, 갈리에누스의 외가인 에그나티우스 가문 내 사람들도 방계황족인 이유로 살해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이중 갈리에누스의 외사촌으로, 이복동생 소 발레리아누스와 265년 공동집정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루킬루스와 그 형제들 역시 갈리에누스 형제가 죽은 뒤 원로원 명령으로 처형됐으며 여러 측근들도 살해됐다.

 

[가족관계]

 

  • 부친 : 발레리아누스
  • 배우자 : 코르넬리아 살로니아
  • 자녀 : 발레리아누스,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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