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로마 제국] 제33대 황제 :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

33대 황제 : 발레리아누스(Valerianus, 253~260)

 

  • 로마 제국의 제33대 황제
  • 재위 : 2531022~ 260년 봄
  • 출생 : 193~ 200년 경
  • 사망 : 260년 또는 264년 이후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는 로마 제국의 33대 황제이다.

 


다른 군인 출신 황제와는 달리 발레리아누스 자신은 유서 깊은 로마 원로원 의원 일족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공화정 후기 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를 배출한 크라수스 가문이 속한, 리키니우스 가문이다. 에그나티아 마니아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하며, 여기에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이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와 발레리아누스 미노르도 있었다.

 

[238]

 

238년의 로마 내전 속에서 여섯 황제의 한 사람이었던 고르디아누스 1세에 의해 일찍이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선출되었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인 발레리아누스를 통해 원로원과 교섭하고자 한 것이다.

 

[251] 데키우스에 의해 감찰관으로 선출된다

 

244년에 미시케(Mesiche)라는 곳에서 사산 조 페르시아의 대왕(샤힌샤) 샤푸르 1세와의 전투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고(이를 필리포스의 쿠데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필리포스 아라부스가 군영 안에서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249년에 필리포스가 데키우스에게 피살되고, 황제(임페라토르)가 된 데키우스에게 251년 감찰관(콘술)로 선출된다.

 

발레리아누스의 인생에서 로마 핵심 고위직에 올라 원로원 내 실력자가 된 시기는, 옛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쪽 진영 귀족들처럼 필리푸스 재위기와 데키우스 즉위 이후였다. 이 시기 그는 데키우스와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 신임을 얻었고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데키우스는 발레리아누스를 직접 지명해 감찰관 자리를 줬다

 

또한 라인 강 연안의 노리쿰과 라에티아 두 속주의 총독(코메스)를 지냈다. 데키우스가 아브리투스에서 전사하고 뒤를 이은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때에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코메스)으로 일하는 등, 발레리아누스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로마 황제가 되다]

 

그러던 중 마르쿠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및 그 공동 황제였던 가이우스 볼루시아누스(Gaius Vibius Volusianus)가 피살되자, 아이밀리아누스를 내쫓기 위해 발레리아누스는 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얼마 안 가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253년에 발레리아누스가 로마의 황제(임페라토르)가 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아이밀리아누스와 직접적인 대결도 없이 88일 만에 갈루스의 복수를 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58세의 고령이었고 그가 공동황제로 지명한 장남 갈리에누스는 40살이었다.

 

[기독교를 박해하다]

 

발레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카르타고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로마 주교 식스토 2세를 처형했다.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는 동안, 원로원에 두 통의 편지를 보내 "기독교인들을 단호히 처벌하라"고 지시했으며, 원로원 내 기독교도 원로원 의원과 원로원 귀족 가족들을 색출하기 위해 로마 신들에게 숭배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들의 칭호와 명예, 재산을 잃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고 숭배 거부시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그는 쌍둥이 칙령으로 불린, 257년 명령과 258년 명령을 엄격히 집행하면서 원로원 의원, 관료 외에도 리키니우스 가문의 황실가족이나 원로원 가문 사람 중 로마 신을 숭배하지 않은 이들을 노예처럼 황실 영지로 보내 강제 노역을 하도록 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도들이 상류사회에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부자 공동통치 시절에 순교한 이 중에는 발레리아누스 형제의 딸로, 갈리에누스의 조카 혹은 친척인 성녀 리키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국을 양분해서 동부를 맡다]

 

즉위 당시 58세였던 발레리아누스는 25310월 수도 로마에 들어가자마자 원로원과 로마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별 어려움없이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때 함께 로마로 입성한 장남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40살의 나이에 공동황제가 됐으며, 첫 아내 에그나티아 마리아나의 남자형제 루키우스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롤리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는 수도 장관에 지명됐다. 이는 발레리아누스가 에그나티우스 가문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가문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는 장남 중심의 후계구도를 굳히겠다는 결정과 똑같았다.

 

즉위 이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마자 넓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부자가 최대한 역량을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 공동황제 제도를 일종의 협동황제 개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다]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와 비교해 눈에 띠는 승리가 적었지만, 동방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60년 초여름, 그는 페르시아 측의 맹렬한 공격으로 다시 치열한 전쟁을 재개했는데, 이때 발레리아누스 휘하 로마군에서는 전염병이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격감했다. 또 에데사는 다시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고 했다. 이때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샤푸르 1세의 계략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샤푸르 1세의 요구대로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그대로 휘하 병사들과 포로가 됐다. 여기에는 황제 외에도 근위대장, 고위 관료,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되었다. 이후 발레리아누스는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황제(임페라토르)가 적국의 포로가 된 것은 로마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그 뒤로도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로마의 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외에는 이러한 사례가 없었다. 이 사건은 데키우스가 전사한 아브리투스 전투와 함께 로마 제국의 국력 저하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로마 세계는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참칭하는 자들의 난립과 영토 분열 등으로 그 혼란이 더욱 심해져 갔다.

 

[가족관계]

 

  • 배우자 : 마리니아나
  • 자녀 : 갈리에누스(공동황제이자 후임황제), 루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