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12년 : 기원후 490년
▶ 비라성을 다시 쌓다 : 490년 02월(음)
- 十二年, 春二月, 重築[원본에는 판각이 잘못되어 알아볼 수 없다.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築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築을 따랐다.]鄙[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鄙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鄒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鄙를 따랐다.]羅城.
- 12년(490) 봄 2월에 비라성(鄙羅城)[1]을 다시 쌓았다.
▶ 용이 추라정에 나타나고 서울에 시장을 열다 : 490년 03월(음)
- 三月, 龍見鄒羅井. 初開京師市■[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결락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肆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肆로 보충하였다.], 以通四方之貨.
- 〔12년(490)〕 3월에 용이 추라정(鄒羅井)[2]에 나타났다. 처음으로 서울[京師]에 시장[3]을 열어 전국[四方]의 재화를 유통시켰다.
==========
[각주]
- 비라성(鄙羅城) : 위치 미상. 현재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비정한 견해가 있지만(井上秀雄, 1993, 『古代東アジアの文化交流』, 溪水社, 472쪽),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참고로 안강의 본명은 비화현(比火縣)이다(본서 권34 잡지3 지리1 良州 義昌郡 安康縣).
- 추라정(鄒羅井) : 경주 남쪽에 있었던 우물.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慶州府) 고적(古跡)조에는 추라정이 부(府)의 남쪽 7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미상이다.
- 시장 : 본서 중종 임신본에는 ‘市▨’라고 되어 있는데 『삼국사절요』 권5 제(齊) 영명(永明) 8년조의 기록에 따라 ‘肆’를 보입해서 읽는다. ‘사(肆)’는 같은 종류의 상품을 진열하는 행렬(行列)이고, ‘시(市)’는 여러 ‘사(肆)’가 취합되어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소지마립간 때의 시사(市肆)를 본격적인 시장이 아닌 관립 상가 건물로 추정하기도 한다(김창석, 2004, 『삼국과 통일신라의 유통체계 연구』, 일조각, 63~93쪽). 여기에서의 상업 활동 경험이 기초가 되어 지증마립간 10년(509)에 본격적인 관설 시장인 동시(東市)가 설치되고 담당 관서인 동시전(東市典)이 두어진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