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대 진흥왕(眞興王 AD 540~576) 37년 : 기원후 576년
▶ 화랑을 받들다 : 576년 (음)
- 三十七年, 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정덕본에는 잘못 판각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에는 使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 使로 되어 있다.]類聚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정덕본에는 잘못 판각되어 있고, 을해목활자본에는 羣로 되어 있다.]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笁[정덕본에는 笁, 을해목활자본에는 竺으로 되어 있다. 주자본에는 竺으로 되어 있다.]乾大[정덕본에는 大, 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주자본에 太로 되어 있다.]子之化也.” 唐令狐澄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1]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근심하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관찰한 연후에 발탁해서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2]이고,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3]으로 무리 3백여 인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남모를〕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4]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5]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6]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7]의 『화랑세기(花郞世記)』[8]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최치원(崔致遠)[9]의 「난랑비(鸞郞碑)」[10] 서문(序文)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11]에 자세하게 갖추어 있는데, 실로 이에 삼교(三敎)[12]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13]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14] 노(魯)나라[15] 사구(司寇)[16]의 가르침이다.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17] 주(周)나라[18] 주사(柱史)[19]의 본뜻이다. 갖가지 악(惡)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善)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20] 축건태자(竺乾太子)[21]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22] 영호징(令狐澄)[23]의 『신라국기(新羅國記)』[24]에는[25] “귀인(貴人) 자제(子弟)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라고 하였다.
▶ 안홍법사가 호승과 함께 돌아오다 : 576년 (음)
- 安弘法師入隋求法, 與胡僧毗摩羅等二僧廻, 上稜伽·勝鬘經及佛舍利.
- 〔37년(576)〕 안홍법사(安弘法師)[26]가 수나라[27]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배우고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28]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와 『능가경(稜伽經)』[29]과 『승만경(勝鬘經)』[30] 및 부처의 사리(舍利)를 바쳤다.[31]
▶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秋八月, 王薨. 諡曰眞興, 葬于哀公寺北峯. 王幼年卽位, 一心奉佛. 至末年祝髮被僧衣, 自號法雲, 以終其身. 王妃亦之爲尼, 住永興寺. 及其薨也, 國人以禮葬之.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32] 애공사(哀公寺)[33]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34]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35]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36]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37]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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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원화(源花) :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원화(原花)라고 하였다. 원화는 북방 샤머니즘과 습합(拾合)하여 무녀적(巫女的)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견해(三品彰英, 117~121쪽),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只召太后)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여성이 원화에 임명되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보좌하였다고 보는 견해(고현아; 조범환), 미륵의 현신으로서 원화를 임명하고, 6부의 남자 청소년들로 그 무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朴南守) 등이 제기되었다.〈참고문헌〉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고현아, 2008, 「신라 원화제 시행의 배경과 성격」, 『역사와 현실』 67朴南守, 2008, 「新羅 眞興王代 政治社會와 花郞徒 制定」, 『史學硏究』 92; 2013,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재수록조범환, 2012,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탐구』 11
- 남모(南毛) :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남모랑(南毛娘)이라고 하였다.
- 준정(俊貞) :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교정랑(峧貞娘)이라고 전한다.
- 두 여자가 …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 :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교정(峧貞)이 남모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여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이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후에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는데, 남모의 무리들이 그 노래를 듣고 북천에서 남모의 시체를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고 하였다.
- 화랑(花郞) : 신라의 청소년 수련집단을 이끄는 중심인물을 말한다. 화랑이 이끈 무리들을 낭도(郎徒)라고 부르며, 화랑과 낭도를 합쳐서 흔히 화랑도(花郞徒)라고 이른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화랑을 국선(國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화랑도는 삼한사회의 청년집회에서 시원하여 발전·법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랑도를 창설한 목적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삼국유사』에 원화제도가 폐지된 뒤에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화랑도 창설을 명령하였다고 전한 사실을 통해 화랑도를 전사단(戰士團)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대체로 15세의 진골 청년을 화랑으로 선발하였고, 본서 권제47 열전제7 김흠운조 말미에 실은 사론(史論)에서 김부식(金富軾)은 신라 삼대(三代: 상대·중대·하대)에 걸쳐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다고 언급하였다. 화랑도 조직은 화랑 1명, 그를 지도·고문(顧問)하는 승려 낭도 1명, 진골 이하 평민에 이르는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화랑도는 원칙적으로 3년을 수련기간으로 설정하였고, 연령은 대체로 15~18세까지로 추정된다. 수련 기간이 끝나면 정병(正兵)에 징발되어 복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련 기간 동안 화랑과 낭도들은 충(忠)과 효(孝) 등의 덕목을 연마하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가락(歌樂)을 즐기고 집단의식과 인성(人性)을 배양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성원 사이에는 사우(死友)를 약속할 정도로 서로 간에 인간적인 유대가 긴밀하였다. 화랑도 조직을 총괄하는 조정의 관리가 화주(花主)였는데, 여기에는 대아찬 이상의 고위관리가 임명되었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한편 화랑은 불교신앙과도 긴밀하게 연관성을 지녔는데, 통일 이전에 화랑을 하생(下生)한 미륵의 화신으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전사집단으로, 그리고 관인선발의 장으로 널리 활용되었고, 아울러 사회학적인 면에서 그들의 활동은 계층사회에서 발생하는 신분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李基東, 1984; 정구복 외, 127~128쪽). 삼국통일 이후에 장기간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전사단적인 화랑도의 성격은 희석되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며 낭도 상호 간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는 전통이 강조되었는데, 이러면서 화랑도에서 신선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화랑도를 풍류도(風流徒) 또는 풍월도라고도 불렀을 뿐만 아니라 화랑을 국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李基東, 1997a; 1997b; 박남수)〈참고문헌〉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李基東, 1984, 「新羅 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李基東, 1997a, 「新羅社會와 花郞徒: 身分制社會에서의 靑少年運動」,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李基東, 1997b, 「花郞像의 변천에 관한 覺書: 花郞文化論에 부쳐서」,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박남수, 2013,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 다시 미모(美貌)의 남자를 …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 본 기록에서는 원화제와 더불어 화랑제도 역시 진흥왕 37년(576)에 시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이한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진흥왕대에 원화제를 실시하였다가 폐지한 지 여러 해 뒤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연(一然)은 『삼국사기』에서 576년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전하는 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라고 밝혔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6 진흥왕 원년(540) 12월조에서 용의(容儀)가 단정한 동남(童男)을 풍월주(風月主)로 삼고 무리를 모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닦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원년에 화랑제를 실시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 사다함이 화랑에 선임되었고, 그의 무리가 1천 명에 다다랐으며, 그가 진흥왕 23년(562) 대가야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화랑제는 진흥왕 23년 이전에 처음으로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三品彰英, 199~201쪽).본서의 찬자는 원화제를 실시한 시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폐지한 시기 및 화랑도를 창설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듯하다. 다만 그 시기가 분명히 진흥왕 때였다는 사실만을 인지하고, 원화와 화랑에 관한 전말을 진흥왕 말년, 즉 진흥왕 37년조에 일괄 정리하여 서술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이강래, 129쪽; 전덕재, 134~140쪽).〈참고문헌〉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이강래 옮김, 1998, 『삼국사기 Ⅰ』, 한길사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김대문(金大問) : 김대문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남해차차웅 즉위년조 참조.
- 『화랑세기(花郞世記)』 : 신라의 진골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漢山州: 경기도 하남시·광주시)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들의 전기(傳記)이다.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본서의 열전에서 화랑으로 알려진 인물들에 관한 기록의 기본원전은 『화랑세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한편 1989년에 경남 김해시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하였다는 『화랑세기(花郞世紀)』가 발견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李載浩; 李鍾旭, 1995; 1997), 일반적으로 이것은 위작(僞作)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盧泰敦; 권덕영; 金基興; 박남수).〈참고문헌〉李載浩, 1989, 「 『花郎世記』의 史料的 價置; 최근 발견된 筆寫本에 대한 檢討」, 『정신문화연구』 36盧泰敦, 1995, 「筆寫本 花郞世紀의 史料的 價値」, 『歷史學報』 147李鍾旭, 1995, 「 『花郎世記』 硏究 序說」, 『歷史學報』 146李鍾旭, 1997, 「 『花郎世記』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韓國史硏究』 97권덕영, 2000, 「筆寫本 『花郎世記』 진위 논쟁 10년」, 『韓國學報』 99金基興, 2003, 「 『花郎世記』 두 사본의 성격」, 『歷史學報』 178박남수, 2007, 「신발견 朴昌和의 『花郞世紀』殘本과 '鄕歌' 一首」, 『東國史學』 43
- 최치원(崔致遠) : 최치원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500)조 참조.
- 「난랑비(鸞郞碑)」 : 난랑이란 화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난랑은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다. 난랑을 진흥왕대 최초의 화랑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63쪽), 경문왕대에 활동한 화랑으로 보는 견해(張日圭),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화랑이라고 보는 견해(정구복, 129쪽) 등이 있다.〈참고문헌〉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張日圭, 2005, 「최치원의 삼교융합사상과 그 의미」, 『新羅史學報』 4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 선사(仙史) : 선(仙)은 국선(國仙), 곧 화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선사는 화랑의 역사서로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29쪽).
- 삼교(三敎) :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 사회와 동떨어진 공허한 가르침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29쪽).
-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 원문은 “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이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入則孝, 出卽悌”에서 응용하여 인용한 말로 보인다.
- 노(魯)나라 :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남쪽에 있었고, 노나라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조상을 주(周)나라(B.C. 1111~B.C. 255)까지 올려 잡았다. 공자(孔子)가 출생한 나라이며, 『춘추(春秋)』는 B.C. 722~B.C. 481년에 걸쳐 노나라 궁중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B.C. 249년 초(楚)에게 멸망하였다.
- 사구(司寇) : 사구는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하(夏)·은(殷)·주(周) 3대에 형옥(刑獄)을 맡은 6경(卿)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孔子)는 50세 때인 노(魯)나라 정공(定公) 9년에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된 적이 있으므로, 공자를 지칭하여 사구라 하였던 것이다.
- 무위(無爲)의 일에 … 행하는 것은 : 원문은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이다. 『도덕경(道德經)』 제2장의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弗始 生而弗有 爲而弗志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弗去”라는 대목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또한 망령되이 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불언(不言)’은 명령이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 주(周)나라 : 고대 중국의 왕조로, 하(夏)나라와 상(商 또는 은(殷))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왕조이다. 하·상·주 세 나라를 통틀어 3대(三代)라고 부른다. 견융(犬戎) 때문에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왕권은 쇠하였고,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갔다.
- 주사(柱史) : 주사는 주하사(柱下史)의 약칭으로, 중국 주(周)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진(秦)나라 때에 시어사(侍御史)로 바뀌었다. 노자(老子)가 한때 주나라의 장서실 일을 맡아보았으므로 노자를 일컬어 주사라 하였다.
- 갖가지 악(惡)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善)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 : 원문은 “諸惡莫作 諸善奉行”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의 줄임말로, 이 4구게(句偈)는 대·소승(大·小乘)을 막론하고 중시하는 게송(偈頌)이다. 『열반경(涅槃經)』과 『법화현의(法華玄義)』 등에서 이 구절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 축건태자(竺乾太子) : 축건은 천측(天竺), 곧 인도의 별칭이다. 석가모니가 인도 카필라(Kapila) 국왕의 태자였으므로, 그를 일컬어 축건태자라 하였다.
- 당(唐)나라 :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룬 왕조로서, 당의 선진문물과 율령(律令)을 비롯한 다양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영호징(令狐澄) : 당나라 의주(宜州) 화원(華原) 사람이며, 아버지는 영호도(令狐綯)이다. 진사(進士)로 등제(登第)하여 건부(乾符) 연간(874〜879)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였고, 저서로 『정릉유사(貞陵遺事)』가 있다. 『정릉유사』에서 정릉은 당 선종(宣宗)의 능묘명(陵墓名)이다. 선종대의 연호는 대중(大中: 847~860)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릉유사』를 『대중유사(大中遺事)』라고 부르기도 한다.
- 『신라국기(新羅國記)』 : 혜공왕 4년(768)에 당나라 책봉사(冊封使) 귀숭경(歸崇敬)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신라에 왔던 고음(顧愔)이 신라를 견문(見聞)하고 지은 책이다. 『신라기(新羅記)』라고도 한다. 『신당서(新唐書)』 권58 예문지(藝文志)제2에 고음이 지은 『신라국기』 1권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 원(元)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한 『설부(説郛)』 권49에 『대중유사』 일문(逸文)이 전하는데, 여기에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인용한 문장이 보인다. 그것은 “신라국기에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제2골이라 한다[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 謂之第二骨].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花郎 國人皆爭事之]”이다. 이에 따르면, 영호징은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이들 기록을 인용하여 『정릉유사』에 실은 것으로 볼 수 있고, 본서의 찬자는 『신라국기』가 아니라 영호징의 『정릉유사』에 인용된 『신라국기』의 기록을 신라본기에 옮겨 서술하면서 『신라국기』가 영호징이 지은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이해된다(岡田英弘; 전덕재, 2015; 2018, 131~133쪽).〈참고문헌〉岡田英弘, 1951, 「新羅國記と大中遺事について」, 『朝鮮學報』 2전덕재, 2015, 「 『三國史記』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의 原典과 完城」, 『歷史學報』 226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안홍법사(安弘法師) :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황룡사구층탑조에서 안홍이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찬술하였다고 하였고, 「산청 단속사 신행선사탑비(山淸 斷俗寺 神行禪師塔碑)」에 신행선사는 속성(俗姓)이 김씨(金氏)로서 급간(級干) 상근(常勤)의 아들이며, 안홍의 형 증손(曾孫)이라고 전한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법운전(法雲傳)에 진흥왕이 사망한 576년에 안함법사(安含法師)가 수(隋)나라에서 귀국하였다고 전하는데, 『해동고승전』의 저자 각훈(覺訓)이 안홍과 안함을 동일인이라고 이해하였음을 반영한다. 『해동고승전』 권2 안함전(安含傳)에 안함은 속성은 김씨이고 시부(詩賦) 이찬(伊飧)의 손자라고 한다. 종래에 『해동고승전』의 기록에 의거하여, 안홍과 안함을 동일인이라고 보고, 본 기록은 원광(圓光)이 진나라에 유학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한 견해가 있었다(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214~215쪽 및 232~237쪽).
- 수(隋)나라 : 수나라는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통일한 나라이다. 581년 양견(楊堅: 문제(文帝))이 건국하였고, 589년에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였다. 문제는 중국의 통일 이후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에 힘썼고,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는 총 길이 1,782㎞에 이르는 대운하를 파서 물건을 쉽게 운송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제는 고구려를 정복하였다가 실패하였는데, 고구려에 대한 무리한 정복과 대규모 토목 공사 등으로 인해 수나라는 당(唐)나라를 건국한 이연(李淵)에 의해 618년에 멸망하였다.
- 호승(胡僧) 비마라(毗摩羅) 등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안함전(安含傳)에서 안함이 진평왕 27년(605)에 우전(于闐)의 사문(沙門) 비마진체(毘摩眞諦), 사문 농가타(農加陀)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한편 여기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 소찬(所撰)의 의상전(義相傳)에서는 진평왕 건복(建福) 42년(625)에 안홍법사(安弘法師)가 서국(西國)의 승려 3명, 한승(漢僧) 2인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서국의 승려는 나이가 44세인 북천축(北天竺) 오장국(烏萇國) 비마라진제(毘摩羅眞諦), 46세인 농가타(農伽陀)와 마두라국(摩豆羅國) 불타승가(佛陀僧伽)였다. 이들은 52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왔고, 마침내 동쪽의 황룡사(皇龍寺)에 머물며 전단향화성광묘녀경(旃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였는데, 이때 신라 스님인 담화(曇和)가 받아썼으며, 오래지 않아 한승은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왕에게 청하였으므로 진평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호승의 국적(國籍)과 관련하여 최치원은 북천축, 즉 인도 출신이라고 하였으나 각훈(覺訓)은 중국 신장성 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호탄(Khotan)의 우전국이라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 『능가경(稜伽經)』 : 능가(稜伽), 곧 능가(楞枷)는 사자국(獅子國)에 있다는 험준한 산 이름이다. 사람이 들어가기 힘든 이곳에 부처가 거처하며 설한 법문을 능가경이라 한다. 능가경을 한역(漢譯)한 것으로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의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 보리유지(普提流支)의 『입능가경(入楞伽經)』 10권, 보차난타(寶叉難陀)의 『대승입능가경(大乘入楞伽經)』 7권 등이 있다.
- 『승만경(勝鬘經)』 :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方廣經)』의 약칭으로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파사닉왕(波斯匿王)의 딸 승만(勝鬘)이 부처의 위신력(威神力)을 입고 섭수정법(攝受正法) 등의 법문을 설한 것이다.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한역(漢譯)한 것이다.
- 안홍법사(安弘法師)가 … 사리(舍利)를 바쳤다 : 581년에 수나라가 건국되었기 때문에 안홍법사가 576년에 수나라에 불법(佛法)을 배우러갔다가 귀국하였다고 전하는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 저자 각훈(覺訓)은 안홍과 안함(安含)을 동일인이라고 보았다. 같은 책, 권1 안함전(安含傳)에서 안함이 진평왕 22년(600)에 고승(高僧)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에 유학하려다가 실패하였으며, 그 다음해에 사신과 함께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가 진평왕 27년(605)에 우전(于闐)의 사문(沙門) 비마진체(毘摩眞諦)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서 선덕왕 9년(640) 9월 23일에 62세로 일생을 마쳤다고 기술하였다. 여기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 소찬(所撰)의 의상전(義相傳)에서는 진평왕 건복(建福) 42년(625)에 의상법사가 태어났는데, 이 해에 동방성인(東方聖人) 안홍법사가 서국(西國)의 승려 3명, 한승(漢僧) 2인과 함께 당으로부터 귀국하였다고 하였다. 『해동고승전』의 기록을 존중한다면, 안홍, 즉 안함은 진평왕 원년(579)에 태어나 22세인 진평왕 23년(601)에 중국의 수나라에 유학하였다가 진평왕 27년(605)에 귀국하였다고 볼 수 있다.여기서 문제는 안함과 안홍을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느냐이다. 동일 인물로 이해한다면, 본 기록은 분명히 본서 찬자의 두찬(杜撰)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576년은 안홍(안함)이 태어나기 이전 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고 본다면, 안홍법사가 576년 이전에 남조의 진(陳)에 들어갔다가 이 해에 귀국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본서의 찬자는 안함과 안홍을 혼동하여 안홍이 수나라에서 유학하였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두 가지 추정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안함과 안홍이 모두 수나라에 유학하여 호승(胡僧)과 함께 귀국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을 참고하건대, 안함과 안홍은 동일 인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232~237쪽).이에 따른다면, 본서의 찬자는 안홍, 즉 안함이 태어난 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가 진흥왕대에 중국에 유학하였다가 수나라에서 귀국하였다고 이해한 것이다. 또한 그가 중국에 들어간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던 데다가 수나라에서 귀국하였기 때문에 진흥왕 말년, 즉 진흥왕 36년 기록에 그가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호승과 함께 귀국하였다는 내용을 신라본기에 첨입(添入)한 것으로 추정된다.
-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 568년에 건립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와 「황초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黃草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라고 전하고, 또한 『북제서(北齊書)』 권7 제기(帝紀)제7 하청(河清) 4년(565) 2월 갑인(甲寅)조에 신라국왕(新羅國王) 김진흥(金眞興)이라고 전하므로, ‘진흥’은 시호가 아니라 생시(生時)에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생시에 진흥이란 칭호를 사용한 것은 불교를 진흥(振興)시키는 왕임을 자부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 애공사(哀公寺) : 애공사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법흥왕 27년(540) 7월조참조.
-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 현재 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에 있는 무덤을 사적 제177호 경주 진흥왕릉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진흥왕의 무덤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진흥왕을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애공사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 기록에 의거하여 진흥왕릉은 무열왕릉 북쪽 서악동고분군(사적 제142호)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강인구, 1984; 2000, 425~426쪽; 김용성; 이근직, 201~208쪽).〈참고문헌〉姜仁求, 1984, 「新羅王陵의 再檢討; 柳花溪의 「羅陵眞贗說」과 관련하여」, 『東方學志』 41; 2000, 『古墳硏究』, 학연문화사김용성, 2012, 「경주 서악동 능원과 그 의의」, 『人類學·考古學 論叢 : 嶺南大學校 文化人類學科 開設40周年 紀念論叢』, 학연문화사이근직, 2013,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 법운(法雲) : 진흥왕이 죽을 때 승려가 되어 삼은 법명(法名)이다.
- 말년에 이르러 … 생애를 마쳤다 :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1 법운전(法雲傳)에 동일한 내용이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진흥왕조에서는 “왕이 죽을 때 머리를 깎고 법의(法衣)를 입고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였다.
- 영흥사(永興寺) : 영흥사는 법흥왕비인 보도부인(保刀夫人)의 발원으로 건립한 신라 최초의 비구니 사찰[尼寺]이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법흥왕비가 을묘년(乙卯年: 535)에 영흥사를 세웠고,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여기에 머물렀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영흥사는 전불시대(前佛時代)의 7처가람의 하나인 삼천기(三川岐)에 위치했다고 하는데, 법흥왕비가 창건했다는 점에서 법흥왕이 창건한 흥륜사(興輪寺) 부근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흥륜사와 영흥사가 각각 경주부 남쪽 2리와 남쪽에 위치하였다고 전하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1910년대 지형도를 보면, 서천(西川)은 서천교 북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면서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서천의 유로(流路)가 심하게 변동한 사실과 함께 서천에 ‘세 갈래 물줄기가 갈라지는 삼천기’가 실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에 여러 연구자들이 흥륜사 부근의 서천 변에 영흥사가 위치했다고 추정하는데, 1980년 홍수 시에 드러난 경주공고 서남측의 사지(寺址)를 영흥사 터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朴方龍; 余昊奎). 이에 대해 경주공고 일대로 비정하거나(金福順), 삼천기를 ‘세 하천의 합류지점’으로 풀이해 서천・남천(南川)・모량천(牟梁川: 대천(大川))의 합류 지점 동안(東岸)에서 확인된 절터로 비정하기도 한다(李根直, 2002).한편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18년(596) 10월조에 영흥사 화재로 인하여 민가 350여 채가 불에 탔다고 전하는데, 영흥사 주변에 민가가 밀집했고 시가지 구역이 발달했음을 시사해준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490년(소지왕 12) 개설한 시사(市肆)가 교통의 결절점인 영흥사 주변에 위치했고, 695년(효소왕 4)에 서시(西市)로 확장되었다고 파악한 견해도 제기되었다(李根直, 2010).〈참고문헌〉朴方龍, 1997, 「新羅 都城의 交通路」, 『慶州史學』 16金福順, 2002, 「興輪寺와 七處 伽藍」, 『新羅文化』 20余昊奎, 2002, 「新羅 都城의 空間構成과 王京制의 성립과정」, 『서울학연구』 18李根直, 2002, 「신라 흥륜사 위치 관련 기사 검토」, 『新羅文化』 20李根直, 2010, 「신라 왕경의 형성과정과 사원」, 『東岳美術史學』 11
- 〔왕비가〕 돌아가시자 … 장사지냈다 :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진평왕 36년(614) 2월조에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다가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비인 비구니가 죽었다.”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