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일 일요일

[로마 제국] 제10대 황제 : 티투스(Titus, AD 79~81)

티투스(Titus, AD 79~81)

 

  • 로마 제국의 10대 황제(재위 : 79623~ 81913)
  • 출생일 : 391230
  • 사망일 : 81913

 

티투스(Titus)

배우자

  • 아레키나 테르툴라 (사별)
  • 마르키아 푸르닐라 (이혼)

 

자녀

  • 율리아 플라비아

 

# 네로에 의해 암살당한 브리타니쿠스의 베프

 

티투스는 기원후 39년에 로마에서 태어났다. 티투스는 황궁에서 제국의 후계자들과 함께 학문을 배웠다고 하는데, 제위 계승자 중 하나인 브리타니쿠스와 사이가 좋았고, 브리타니쿠스가 독살되었을 때 티투스는 바로 옆에서 그와 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가볍게 중독되어 오랫동안 마루에 쓰러져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을 잊지 않고 후에 황제가 되었을 때, 젊은 나이에 죽은 옛 친구의 상을 건립했다고 전해진다.

 

# 사별, 재혼, 이혼

 

기원후 61년부터 63년까지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함께 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등지에서 복무했다. 기원후 64년에 로마로 돌아와 아레키나 테르툴라와 결혼했으나 곧 사별하고 이듬해에 마르키아 푸르닐라와 재혼하였다. 아내의 생가는 제위 후계자로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네로의 대항 세력에 속했지만, 결혼한 해인 기원후 65년에 원로원 의원 피소에 의한 네로의 암살 의혹 사건으로 아내와 이혼해야 했으며, 그 뒤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 유대 반란 진압과정에서 아버지가 황제로 추대되다

 

67년에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고, 아버지 밑에서 보병 레기온을 지휘했다. 로마에서 68년에 네로가 자살하고 갈바가 스스로 황제에 취임하였다. 티투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명령으로 갈바가 황제로 취임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도중에 갈바가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오토가 자살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혼란에 빠진 것을 보고, 스스로의 판단으로 동방에 돌아와 유대 반란 진압에 전념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티투스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함께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했다.

 

# 유대반란을 진압하다

 

기원후 69년에 무키아누스가 비텔리우스를 치기 위해 선봉으로 로마로 향하고, 이듬해에 아버지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 선언을 위해 로마로 향한 뒤에, 티투스는 예루살렘 공략의 사령관이 되어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예루살람 성전을 통곡의 벽 부분만 남기고 부숴버렸다. 기원후 73년까지 최후 저항세력의 근거지인 마사다 요새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때 티투스는 항복한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지만, 항복하지 않다가 잡힌 포로들에 대해서는 하루에 약 500명씩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지금도 로마 광장 입구에 있는 티투스 개선문은 그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기원후 81년에 세운 것이다) 이때에 유대왕가의 일족인 베레니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 귀국 후 황제(베스파시아누스)를 도움

 

기원후 71년 개선하여 로마로 돌아온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개인 군대인 황실 근위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 뒤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공동 통치하며 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은 그는 73년 아버지와 함께 감찰관을 지냈고 몇 차례 공동 집정관이 되기도 했다.

 

# 불안 속에 즉위한 황제

 

티투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로마 사람들은 그가 네로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의 애인인 베레니케는 로마 시민들에게 있어서는 과거 클레오파트라를 연상시켰다. 시민들의 두려움을 깨달은 티투스는 베레니케를 아내로 하는 것을 단념하면서 시민의 동정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검투사 시합을 개최하고 희극을 상연하면서 로마 시민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버지 생전에는 아버지와 본인의 가문을 위한 권력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악역을 담당했지만 황제가 된 이후에는 나름 변신을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 짧은 2년간의 통치

 

티투스가 즉위한 해 8월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파하여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스타비아이 등의 도시가 멸망했는데 그는 캄파니아에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기원후 80년에 로마에 사흘동안 대화재가 발생하였을 때 로마를 재건하는 데도 힘썼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한 콜로세움을 완성시켰다.

 

티투스는 치세 불과 2년 만에 열병으로 죽었는데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사인을 말라리아, 또는 남동생 도미티아누스에 의한 독살의 가능성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 티투스에 대한 평가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름 자연재해에 대한 대책 마련 등으로 좋은 황제라는 평판을 동시대인들에게 받았다. 훗날 포악한 황제로 여겨진 남동생 도미티아누스와 대조되는 선량한 황제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그러나 이전에 폭군 황제들도 초기에는 좋았기 때문에 티투스가 조금만 더 통치했다면 똑같은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른다며, “시기만 짧으면 누구든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신약성서 사도행전에도 나오는 유대 왕 아그리파 2세의 누이동생 베레니카를 사랑했으나 과거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일을 기억하는 로마 시민들의 정서 때문에 결혼하지 못했다.

 

훗날 로마 전기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티투스를 잘생기고 교양도 있으며,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동생 도미티아누스처럼 금발머리였지만 이마가 매우 넓고 매우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력적이고 잘생겼다는 이야기와 달리 실제 티투스는 키가 컸던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키는 작고 배가 나왔으며 얼굴은 네모형에 미간이 좁은데다, 플라비우스 가 특유의 이마가 넓은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황실 내 황제 초상을 관리하는 관료와 예술가들은 티투스의 결점을 가리기 위해 최대한 배가 안 나오도록 신경썼다고 하며, 이는 그의 전신상에서도 그 흔적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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