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일 일요일

[로마 제국] 제11대 황제 :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

 

  • 로마 제국의 제11대 황제(재위 : 81914~ 96918)
  • 출생일 : 511024
  • 사망일 : 96918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배우자

  • 도미티아 롱기나

 

#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처음 박해한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자, 티투스 황제의 동생이었으며 플라비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재위 기간 그의 권위주의적 성격 방식의 통치는 원로원과 극도의 불화를 일으켰다. 의도적으로 기독교를 처음 박해한 황제로 유명하며, 노골적인 공포정치로 원로원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기독교가 국교화된 이후에는 폭군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당대 기사계급, 일반 민중, 군대에서는 지지를 받았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의 15년간의 통치 기간은 티베리우스 재위 기간 이래로 가장 긴 기간이었다.

 

# 위기, 그리고 결혼

 

도미티아누스는 네로 사후 벌어진 내전 당시에 로마에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베스파시아누스)와 비텔리우스 간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큰아버지 사비누스와 함께 유피테르 신전 안으로 도망쳐 숨어 있다가 변장을 하고 탈출해야만 했다. 아버지가 내전에서 승리한 후 황제가 되자 로마를 관할하는 수도 법무관에 올랐다. 이때 도미티아누스는 명장 코르불로의 딸이자 아일리우스 라미아의 아내였던 도미티아 롱기나(칼리굴라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조카)를 남편과 이혼시키고 결혼했다.

 

# 전임 황제 티투스()와의 갈등

 

도미티아누스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와 어머니 플라비아 도미틸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생전에 6차례나 집정관을 지냈고, 아들이 없는 11세 연상인 티투스의 뒤를 이을 황제감으로 인정받았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은 뒤 그때까지 티투스가 투렸던 것과 똑같은 지위, 특히 호민관의 권력과 일부 임페리움을 누리고 싶어했으나 허락받지 못해서 형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훗날 티투스의 죽음에 어느 정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 귀족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지만...

 

황제가 된 뒤에는 귀족들의 미움을 받았다. 잔인하고 허세를 부렸기 때문이겠지만 (자신은 사치스러우면서도 원로원에게는 사치를 부리지 말라고 간섭했다) 군사적행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역량을 갖추고 있어서 로마와 속주의 행정관들을 강력하게 통제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85년에 종신 재무관직에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원로원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게 되었다. 재무관은 국세조사를 담당하는 직책이었기만 원로원 의원을 추방할 권한도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들은 위협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군사외교정책으로서 그는 집권 초에 브리튼 섬과 게르만 지방으로 군대를 보냈고, 국경인 라인-도나우 강변에 리메스(요새 방벽)을 건설했다. 원로원은 마지못해 그에게 게르마니쿠스’(게르마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존칭을 주었다. 이 당시에 명장 아그리콜라가 활약(개고생)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합병시키기도 전에 도나우 강 지역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 로마는 2개의 군단과 많은 병사를 잃었다. 이것은 당시 군지휘관들이 태만하고 성급했기 때문이지만 로마에서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84년에 군인 봉급을 1/3 올려주는 등 현명하게 처신하여 군대 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 우상화 작업, 그리고 공포정치

 

그는 원로원에서 개선식 의상을 입었으며, 고대 그리스 경기를 본떠 4년에 한번 개최하는 경기를 주재할 때는 그리스풍의 옷과 금관을 착용했으며 동료 심판들은 여러 신들로 둘러싸인 도미티아누스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관을 써야 했다. 그는 자신을 주님이자 하느님’(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하였고, 기독교인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우상화에 반대하여 탄압을 받았다.

 

도미티아누스는 84년에 사촌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를 처형시켰다. 8911일에는 상()게르마니아 총독 안토니우스 사투르니누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하게르마니아 주둔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황제는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했고 나중에는 원로원 의원을 종종 반역죄로 고발했다. 따라서 93년부터 96년은 사상 유례없는 공포정치의 시기로 여겨진다.

 

# 암살에 대한 예언

 

이런 상황에서 게르마니아 총독이 게르만족 출신의 점성대가이며 예언가인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를 불경죄 혐의로 체포하여 로마로 압송하였다. 라기니우스 플로클루스가 도미티나우스가 서기 969월에 제 수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이 예언 덕분에 도미티아누스는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암살에 대비했다.

 

# 도미티아누스의 암살의 배후에는 누가 있나?

 

황제는 시종 스테파누스에게 암살됐는데, 처음 일격을 당할 당시 베게 밑에 숨겨놓은 검이 없자 맨손으로 스테파누스와 싸워야 했다. 결국 치명상을 입은 도미티아누스는 44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시신은 도미티아누스를 아기 때부터 키워준 유모가 수습해 화장한 뒤 조카딸 율리아의 무덤에 재를 섞는 방법으로 매장하였다. 유모의 이런 행동 때문에 후일 도미티나우스가 율리아와 근친상간을 저지른 것을 황후 도미티아 롱기나가 알게 되어 암살에 가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도미티아는 이후 재혼하지 않고 평생을 나는 도미티아누스의 아내라고 말하며 수절하였기 때문에 도미티아의 가담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도미티아누스는 96918일에 근위대장 2명과 여러 궁정관리, 아내 도미티아 롱기나의 음모로 살해당했으며, 그 뒤 제위에 오른 네르바 역시 음모에 가담한 것이 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현대 사가들은 시종 스테파누스가 암살을 결행한 배경에는 도미티아누스가 벌인 서기 95년 부유한 자유민 에파프로티투스(네로의 해방노예이자 개인비서) 숙청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에파프로티투스는 네로 시대에 피소 음모 사건 당시에 황제에게 보고서를 작성한 인물이었고, 네로 시대의 실세였다고 한다. 스테파누스 등은 오래전 일을 끄집어 내서 에파프로티투스를 제거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언젠가는 자신들도 황제에게 당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 ‘기록말살형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기뻐하며 생전에 남긴 모든 업적을 지워버리는 기록말살형에 처했음에도 군대는 이에 반발해 이듬해 책임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죽자 원로원과 근위대는 놀라운 점괘로 미래를 예언한 라기니우스 프로클루스에게 감탄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네르바는 그에게 400,000 세스테르티우스라는 거금을 내려줬다고 한다.

 

# 도미티아누스의 성격

 

도미티아누스는 책임감이 강하고, 일반 민중이나 속주민들에게는 자애롭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교성이 지나치게 부족했고, 사색적이었으며 의심이 많았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 형과 달리 사람들과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있게 새롭게 지은 팔라티노 황궁에 투명한 흰 대리석 주랑들을 만들어 일렬로 세우도록 했다. 또한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를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천거하는 도움을 주어 베스파시아누스가 정실부인 사후 평생 사실상 부인으로 대우한 해방노예 출신 여성 안토니아 카이니스에 대해 절대 새어머니로 인정하지 않고 해방노예로 냉정하게 대우할 정도로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 티베리우스, 칼리굴라와 비교되는 도미티아누스

 

한편 그는 여러 부분에서 티베리우스와 비슷해 보였지만 많이 달랐다. 티베리우스는 자기 우상화에 관심도 없었고, 원로원이 이를 먼저 제안했어도 늘 완강하게 거부했다. 반면 도미티아누스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어린시절부터 매우 귀족적이고 화려함을 선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나이가 먹을수록 더 귀족적이고 화려해졌다. 티베리우스는 기본적으로 자신과 타인 모두 엄격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도미티아누스는 당대에는 폭군으로 여겨졌고,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하지만 현대의 연구에서는 행정 능력 등이 재평가되고 있고 그가 황제로 기록말살형을 받을 정도로 어떤 악행을 벌였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의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자신과 비슷한 부류의 황제로 평가받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두 황제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에 비해 원로원 외 다른 로마인들에게는 인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기록말살형을 선고받을 만큼 폭군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자신을 우상화하고, 반대파들을 숙청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면서도 정치 조율 능력은 떨어졌기에 재위 4년여 만에 원로원과 갈등을 일으키다가 근위대장과 일부 근위대의 배신으로 암살당한 칼리굴라와 많이 비슷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칼리굴라와 달리 자기절제가 상당했고 위엄과 절제를 강조한 황제였다. 또 행정적 능력이 재평가된 황제답게 미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티베리우스와 통치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평가받고 있다.

 

# 로마의 전성기는 도미티아누스의 공헌?

 

도미티아누스는 세습왕조의 마지막 황제, 특히 암살로 제위를 잃은 황제들이 그렇듯 다음 황제와 그 왕조의 정통성과 명분 때문에 근대 이후 학자들에게 지극히 저평가되고, 폭군이 됐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도미티아누스의 성격, 행동 문제가 큰 결점이라고 해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평화는 전임자 도미티아누스가 로마제국을 안정적이고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실이며, 도미티아누스의 행정적 성과로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는 매우 과시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잔인한 황제였다. 따라서 자기과시로 점철된 사치, 잔인함, 편집증에 시달린 독재자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고, 이런 실패들이 업적보다 주목을 받으면서 이 사람의 치세 결과는 암살과 기록말살형이라는 불명예로 끝났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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