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일 일요일

[로마 제국] 제12대 황제 : 네르바(Nerva, AD 96~98)

네르바(Nerva, AD 96~98)

 

  • 로마 제국 제12대 황제(재위 : 96918~ 98127)
  • 출생일 : 30118
  • 사망일 : 98127

 

네르바(Nerva)

# 고령의 황제,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룬 황제

 

그는 66세가 되어서 황제가 되었다. 네로 밑에 있었을 때, 그는 네로의 측근이자 65년 피소 음모를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의 충신으로, 베스파시아누스와 도미티아누스 재위 시절인 71년과 90년에 집정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96918일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었고, 같은 날에 원로원은 네르바를 황제로 선포했으니, 이는 친위대가 내린 결정이었기에 원로원이 이런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의 전제 정권 기간에 제한당했던 자유를 회복하기로 선포했다.

 

9710월에 근위대는 그가 후계자로 양자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신중을 기울여, 네르바는 인기있는 장군이었던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입양했다. 재위에 오른 지 15개월 만인 98127일에 자연사하였다. 네르바의 가장 큰 성공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택하여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이뤄낸 것이었다.

 

# 네르바의 초기 시절, 황제의 지지자

 

네르바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50km거리에 있는 나르니라는 마을에서 칼리굴라 재위 기간 보좌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와 세르기아 플라우틸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0년 혹은 35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코케이우스 가문은 후기 공화정과 제정 초에 가장 존경받고 저명한 정치 가문들 중 하나였다.

 

네로 황제의 조언가로서, 그는 65년의 피소 음모를 성공적으로 감지해내 밝혀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시절에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와 친구가 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네로의 자살 이후 혼란의 기간에 등장한 오토 황제가 네르바의 매부였는데(네르바의 여동생 코케이아가 오토의 친형 루키우스 살비우스 티티아누스 오토와 결혼했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플라비우스 왕조가 들어서자마자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로 등장했다.

 

71년 집정관직을 수행한 이후 역사 기록에서 사라진 네르바는 89년 사투르니우스 반란 기간에 재등장하였다. 도미티아누스는 사투르니우스의 반란 이후에 네르바에게 집정관직을 제공하였고 네로 시절 피소 음모 기간에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네르바가 음모를 밝혀내는 데 역할을 하였다.

 

# 도미티아누스 암살 이후에 황제로 선포되다

 

96918일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마자 원로원이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카시우스 디오에 의하면 공모자들은 암살에 앞서 네르바를 잠재적 후계자로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최소한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보았다.

 

네르바는 고령이었고 자식이 없었으며, 병치레 때문에 황제 후보자가 되기에 부적절하게 보였겠지만, 그것 때문에 황제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네르바는 네로의 죽음이 초래했던 무정부 상태를 경험했었기 때문에 즉위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다.

 

정권이 교체된 후 네르바는 도미티아누스 집권기에 가혹하게 박해받았던 원로원 의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도미티아누스가 압류한 모든 사유재산은 각 가문들에 돌려졌다. 사람들은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 동요했기에, 네르바는 로마 민중들 사이에 지지를 얻기 위해 세금 감면, 토지 분배 등의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의 집권이 짧았기 때문에 공공사업의 대부분은 플라비우스 왕조 시기에 착수되었던 계획들을 완료하는 수준이었다.

 

# 친위대의 쿠데타로 곤경에 빠지다

 

97년경 네르바가 후계자로 시리아의 강력한 총독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니그리누스 쿠리아티우스 마테르누스의 입양을 고려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생각은 게르마니아 국격 부대의 군단장이자 좀 더 인기있는 군지휘관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를 지지했던 이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하였다. 9710월에 긴장 상태는 카스페리우스 아일리아누스의 주도로 친위대가 황궁을 포위 함락하고 네르바를 인질로 잡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네르바는 친위대의 요구에 의해서 도미티아누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넘기기로 동의하고 오히려 친위대에 감사를 전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네르바의 권위는 회복불능으로 손상이 되었다. (나중에 트라야누스는 네르바를 공격하라고 명령한 친위대 지휘관들을 제거한다)

 

#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입양하다.

 

네르바는 군대와 민중 모두의 지지를 받는 후계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후계자로서 트라야누스의 입양을 선포하면서 실질적으로 황제에서 물러나게 된다.

 

에드워드 기번은 네르바가 무기력했음을 언급한다. “네르바는 자신의 노쇠한 나이가 자신의 전임자들의 기나긴 폭정하에서 커진 민중의 혼란이라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자신이 알기 이전에도,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범들한테 황제로 거의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의 온화한 자질은 선량한 자들에게 존경받았으나, 퇴폐한 로마인들은 죄인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정의를 지닌 좀 더 강인한 인물을 요구했다.”

 

현대 역사학계는 이 평가를 확장하여, 네르바를 선의적인 인물이나 유약하고 무기력한 통치자로 특징짓는다. 로마 원로원은 그의 통치기에 부활한 자유를 누렸으나, 네르바의 국가 재정 및 군대에 대한 권위 부족이라는 실정은 로마를 거의 엄청난 위험 경계 쪽으로 궁극적으로 이끌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