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아누스(Traianus, AD 98~117)
-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재위 : 98년 1월 27일 ~ 117년 8월 8일)
- 출생일 : 53년 9월 18일
- 사망일 : 117년 8월 8일
# 최고의 통치자(Optimus Princeps), 성공적인 속주 출신 황제
트라야누스는 원로원이 “최고의 통치자”(Optimus Princeps)라고 공식적으로 선포하였으며, 로마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군사 활동을 이끈 성공적인 군인 황제로 흔히 ‘오현제시대’의 두 번째 황제이다.
트라야누스는 오늘날 스페인의 세비야에 가까운 곳에 있던, 히스파니아 바이티카라는 로마 속주의 이탈리아족 정착지인 이탈리카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카는 기원전 2세기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건설한 식민도시였다. 그는 최초의 속주출신의 황제라 할 수 있는데, 그가 황제가 된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인 의미가 된다.
트라야누스는 로마 귀족이자 플라비우스 왕조의 두 번째 황제였던 티투스의 처형인 마르키아와 울피아 씨족 출신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 겸 장군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 전쟁 기간 동안 베스파시아누스 곁에서 복무했다고 한다.
# 동성애적 성향
77년 혹은 77년경에 트라야누스의 아버지는 시리아의 총독이었고, 트라야누스 본인은 군사 호민관으로 있었다. 91년에 트라야누스는 30대 후반의 나이로 집정관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로마 정착지 출신 귀족 여성 폼페이아 플로티나와 혼인했는데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트라야누스가 동성애 쪽 성향이 있다는 것이 율리아누스와 카시우스 디오 같은 작가들에게서 언급이 되었다. 그의 추정상 연인으로는 하드리아누스, 궁정의 하인들, 배우 필라데스, 아폴라우스투스라는 무용수,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수라 등이 있었다.
# 네르바의 후계자로 선택되다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 명성을 얻었다. 89년에 그는 안투니우스 사투르니우스가 일으킨 라인강 지역 반란에서 도미티아누스를 지지하였다. 노년의 네르바가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친위대의 쿠데타까지 경험하였고 추가적인 쿠데타를 우려한 네르바는 군대 내에서 신망이 높았던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98년 1월 27일에 네르바가 사망하자 트라야누스는 별 문제 없이 황제 자리를 물려받았다. 트라야누스는 친위대 사령관 아일리아누스에게 자신이 있는 독일로 오라고 명령을 했고, 그곳에서 아티우스 수부라누스에게 직위를 빼앗긴 채 처형당했다.
트라야누스는 황제로서 오만(contumacia) 대신에 겸손(moderatio)으로 전제권력을 휘둘렀다고 본다. 마침내 의원들 사이에서 인기가 대단해서 로마 원로원은 “최고”를 뜻하는 optimus라는 칭호를 트라야누스에게 부여했다. 원로원들로서는 압류당했던 재산을 되돌려준 은혜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 다키아 전쟁
즉위 직후 그는 도미티아누스가 중단한 다키아 원정을 감행한다. 다키아 원정에 주력한 이유는 1) 도미티아누스 암살의 간접적 원인이 다키아 원정 실패에 있었다는 점, 2) 로마 제국의 중요한 북방 경계선인 도나우강 하류의 안전 도모였다.
서기 101년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전쟁을 시작하였다. 2차례의 원정(101~102, 105~106)에서 트라야누스는 다키아를 정복했으며, 다키아 속주를 창설했다. 다키아 원정 과정에서 이전의 로마 정책과는 달리 피정복민들에 대한 잔인하고 단호한 말살 정책을 펼쳐서 다키아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트라야누스는 다뉴브강 건너편에 있느 다키아 국경집단을 로마 제국으로 합병시켰다(다키아 전쟁). 101년 5월에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왕국에 대한 첫 원정에 돌입했고, 다뉴브강의 북쪽 기슭을 건너 도나우강의 철문 근처인 타파이에서 다키아군을 패배시켰다. 비록 승리했지만 트라야누스군도 피해를 입었고 병력을 재편성하고 보강하기 위해 그 해의 추가적인 군사 활동을 연기했다. 겨울이 지난 뒤 드라야누스 군대는 다키아 영토 더 깊이 진격했고, 1년 뒤, 데케발루스가 항복하도록 했다. 트라야누스는 개선식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고 ‘다키쿠스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102년의 강화조약 이후 데케발루스는 재무장하면서 힘을 키웠으며 105년에 로마가 점령한 다뉴브강 북쪽 영토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 트라야누스의 공격이 이어졌고(제2차 원정), 결국 데케발루스는 달아났으나 로마군 기병대에게 몰려서 자결하였다. 기병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라는 자가 데케발루스의 잘려진 머리를 트라야누스에게 전했고, 이후에 머리는 로마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전히되다가 게모니아이 계단으로 던져졌다.
다키아 원정 이후 줄어든 군비, 다키아의 풍부한 금, 은광으로 인한 예산의 증가, 그리고 다키아로부터 철저히 약탈해온 풍부한 전리품으로 인해 추가 예산이 확보되자 트라야누스는 속주들과 이탈리아 등지에서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실시하고 장려하였다.
다키아 전역이 영구적으로 점령된 것은 아니었다. 다키아 방어는 아풀룸에 주둔한 게미나 제13군단 단 하나의 군단에 맡겨졌으며 이들은 필요시에 국경에서 거주하던 동쪽이나 서쪽의 사르마티아인들을 타격할 수 있는 전위부대 역할을 했다. 이후 로마가 강할 때에 다키아의 돌출부는 다뉴브 지역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제어를 위한 도구였으나 로마가 약할 시에는 3세기의 위기 때처럼 로마에 장애물이 되었고 결국엔 버려졌다.
# 기독교에 대한 트라야누스의 입장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없는 시간까지 쪼개어 국정을 돌봤던 황제로, 말도 안 되는 보고서와 편지이더라도 성실히 모두 답변한 원칙주의자였다. 그런데 그는 행정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 일일이 법으로만 해결하기 보다는 그 테두리 안에서 융통성 있게 해결하도록 단호하게 지시했다. 그래서 그는 상당히 유연하고 지혜로운 모습도 많은 행정가였다. 이는 서기 110년 플라니우스가 보낸 기독교도 처리 문제에 관해 황제가 직접 답변한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트라야누스는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후대로마인들에게 착한 이교도 황제로 칭찬받을 정도로 매우 상식적이고 공정하게 플리니우스에게 조언했다
또 트라야누스는 플라니우스를 비롯한 총독, 관료들에게 마구잡이식 처벌을 피하고, 모든 소송 절차에 따라 일방적으로 행정을 처리하면 안 된다고 말했으며 익명의 밀고자들은 무시하라는 단호한 답변을 보냈다.
<서한집>에 따르면, 플라니우스에게 서기 110년 트라야누스는 기독교도들의 행방을 굳이 밝히지도 캐지도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법을 따르면서도, 마구잡이식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종교 조직으로서의 기독교는 탄압할 생각이 없다는 의미로, 공공연하게 로마의 국가적 의례를 거부하는 개인의 행동만을 문제로 삼은 것이다.
# 파르티아 전쟁, 초기의 성공
어느 정도 행정적 정비와 개혁이 이루어지자, 트라야누스는 군사 원정을 다시 계획하고 114년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였다. 로마는 네로 황제 이후로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파르티아의 뜻에 맞는 인사를 앉히고 로마가 이를 승인하는 형태로 양보해서 파르티아와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새로운 왕에 등극한 코스로이스는 서기 110년 협정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아르메이나 왕을 폐위하고 파르타마시리스를 새 왕으로 앉혔다. 이것은 로마의 동의를 받지 않은 협정 파기였고, 트라야누스는 로마에 우호적인 아르메니아 왕이 폐위되자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서기 113년 가을, 동방을 향해 출격했다.
로마사 학자들은 군인이었던 그가 로마 군인들이 갖고 있던 군사적 영예와 정복에 대한 강한 열망 때문에 전쟁을 계획했다고 설명한다. 트라야누스의 동방 출정은 117년까지 계속되었는데, 전쟁 준비는 다키아 원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트라야누스가 동방 원정을 시작했을 때 10개 군단이 동부전선에 집결하였고 모든 군대의 보급물자는 로마 제국의 동부 속주들이 분담하였다.
전쟁 명분이 파르티아 측의 협정 파기와 파르타마시리스의 즉위인 만큼, 로마군은 트라야누스 지휘 아래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파르타마시리스를 폐위시키고 아르메니아를 병합시켰다. 이어 황제의 지휘 아래 로마군은 코카서스 일대와 흑해 동부 연안까지 모조리 로마 속주로 병합시켰다. 결국 트라야누스 황제는 개전 2년만에 로마 영토를 티그리스 강 유역과 유프라테스 강 상류, 페르시아만가지 넓혔다. 이 과정에서 트라야누스는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합병하고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였다. 그는 페르시아만에 당도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유럽 대륙의 군주로서 정복활동을 통해 가장 동쪽 먼 곳에 도달한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나바테아 왕국을 굴복시켜 아라비아의 속주로 편입시켰다.
# 한계에 봉착한 파르티아 원정, 그리고 사망
그러나 눈부신 군사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다키아 원정 때 초토화를 떠올린 파르티아 군소 영주들의 게릴라 활동과 보급선의 장기화, 보급기지였던 안티오키아의 지진 등으로 말미암아 파르티아 전쟁은 점차 소득은 없고 비용만 많아지는 형태로 변하였다. 이는 오촌 조카 하드리아누스와 같은 일부 엘리트들이 경고한 부분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제국 전역의 반란으로 확대되었다. 파르티아도 반격을 했고, 아르메니아도 로마에 대항하였다.
이런 와중에 오늘날 키토스 전쟁이라고 부르는 유대 지역의 반란까지 터지면서 로마군의 식량 보급이 위태로워졌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도중에 포기하고 철수하게 된다. 다행히 유대 총독인 루시우스 퀴에투스가 유대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면서 트라야누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116년 트라야누스는 메소포타미아 남부를 명목상 자신들의 클리엔테스인 파르티아 왕자에게 넘겨주면서 사실상 전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트라야누스는 안티오키아로 돌아간 뒤 재정비하여 다시 메소포타미아를 재탈환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마의 수뇌부들은 재차 우려를 표했고, 하트라 공성전까지 실패하고 본인은 열사병으로 건강이 안좋아지는 상태까지 이른다. 결국 트라야누스는 로마로의 귀환을 결정하고, 자신의 유일한 남자 친족이자 누나의 손녀 사위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를 동방 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육로를 따라 킬리키아로 향했다. 그러나 결국 117년 8월 9일 킬리키아의 작은 섬 셀레누스에서 향년 6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된다.
# 트라야누스의 후계자 하드리아누스
일부에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택했다고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가 죽은 것을 비밀에 붙치고 그 후에 트라야누스가 죽은 후에도 커튼 뒤에서 지친 목소리를 말하며 트라야누스를 대역할 사람을 구하는 등으로 하드리아누스의 계승이 보장되도록 한 트라야누스의 부인 폼페이아 플로티나가 택했다고 한다.
로마의 역대 황제중 가장 뛰어난 군사적 업적을 세웠지만,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다키아 전쟁 승리 이후의 대처 역시 미완인 터라 이는 고스란히 후임 하드리아누스에게 넘어갔다. 다행히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벌인 전쟁으로 발생한 제국 군사비용과 인적, 물적 소비 관리 측면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에도 트라야누스의 전쟁들은 결과론적으로 3개의 완충국(가까운 게르만족, 파르티아, 나바티아 아라비아)을 없애거나 크게 약화시켜, 끝내 후임 황제들에게 재앙으로 찾아왔다.
# 트라야누스에 대한 평가, 영토는 넓혔지만 실속은?
Optimus Princeps라는 칭호가 보여주듯이 트라야누스는 이미 동시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완벽한 황제로 인식되었다. 로마 제국이 3세기 이후 쇠락기를 거치는 과정에서도, 후기 로마제국 시대의 로마인들에게 트라야누스는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원수정 시대의 수많은 임페라토르 중 유이하게 제국의 질서를 유지한 명군으로 찬사받았다
트라야누스는 외정에선 성공적일지 몰라도, 국정 운영방식이나 속주 행정 정책 결정 등이 평균 이상일 뿐 역대 로마 황제 중 가장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트라야누스는 여타 선대 황제들과 달리 속주의 상류층과 민간징세청부업자들이 중앙정부의 수세에 협조하는 과정에서 부수입을 끌어 올려 그 재원을 확보해 원로원과 황제가 이를 바탕으로 시혜를 베풀고 함께 이득을 얻는 형태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문제점은 온전히 후임 황제들이 뒤집어 쓰는 꼴이 됐다고 평가받을 만큼 로마 입장에선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체제 개편 역량이나 장래 야만족 문제가 제국 전체의 방어선에 큰 부담을 주게 될 것이란 선견지명도 후임 하드리아누스만 못했고, 제국 관리 능력은 오현제 중 가장 떨어지는 황제 중 한명으로 늘 거론된다. 간단히 말하면, 트라야누스의 치세는 도금된 영광일 뿐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가 다키아를 정복해 풍부한 금광, 은광을 얻고 다키아 포로들을 노예로 만든 부분은, 제국 경제의 기반인 대농장 경영과 국가의 금화, 은화 가치 유지에 도움이 됐다. 그렇지만 트라야누스는 두 후임(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달리 정복전쟁을 통한 전쟁특수와 전리품 확보를 통한 국가재정 운영 방식을 사용하면서도, 그는 국가 재정 운영을 영리하게 꾸리지 않았다. 이는 현대 학자들이 일관되게 지적하는 문제인데, 트라야누스의 내정 방향은 제국의 국고를 파산 위기에 몰릴 위험성에 노출케 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재위 기간 애매모호한 위치였다. 다키아 전쟁에서 미네르비아 제1군단을 지휘한 후, 제2차 다키아 전쟁 때 결정적 순간에는 전방 업무에서 해임되어 신설된 판노니아 인페리오르 속주의 총독을 맡도록 보내졌다. 문헌 자료들은 트라야누스가 법관 루키우스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 같은 다른 이들을 후계자로 고려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사망할 때 시리아 총독직을 맡고 있었던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친척이자 트라야누스의 조카딸의 남편이었고, 이런 모든 것들이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걸 정당학 했다. 추가로 하드리아누스는 히스파니아 출신이었으며, 플로티나 및 친위대 사령관 아티아누스와 연줄을 통해 트라야누스의 궁정에 영향을 지닌 히스파니아 원로원 의원들을 강력한 집단과 잘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황제로서 하드리아누스는 멀리있고 방어하기 불가능했던 메소포타미아를 포기하고 아르메니아뿐만 아니라 오스로애네를 로마 종주권 아래에 있던 페르시아의 세력권으로 돌려주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일부 신학자들은 트라야누스를 선한 이교도의 예시라고 논하기도 했다. 신곡에서 단테는 목성천에서 정의로 유명한 역사 및 신화 속 다른 인물들의 영혼과 함께 트라야누스의 영혼을 목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