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4일 월요일

[로마 제국] 제14대 황제 : 하드리아누스(Hadrianus, AD 117~138)

하드리아누스(Hadrianus, AD 117~138)

 

  • 로마 제국 제14대 황제(재위 : 117811~ 138710)
  • 출생일 : 76124
  • 사망일 : 138710

 

하드리아누스(Hadrianus)

# 어린 시절,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다

 

하드리아누스는 76년 로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원적(原籍)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히스파이나 바이티카의 이탈리카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고도 한다. 아버지는 푸불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 아페르, 어머니는 도미티아 파울리나로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촌 형제의 아들에 해당한다.

 

86년 아버지인 하드리아누스 아페르가 사망하면서 트라야누스와 기사계급에 속한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를 지명하였고 그때부터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하드리아누스를 로마로 데려와 살게 하였다.

 

#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의 죽음을 가장 먼저 전달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제2군단 군단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도나우강에 주둔한 제5군단 군단장을 역임하였다. 97년에 트라야누스가 네르바 황제의 양자가 되었던 해에 라인 일대 사령관 트라야누스가 새로운 제위 계승자가 된 의미에서 군대 축하 메시지 전달 사절에 뽑이는 영예를 얻었다. (네르바가 죽었을 때 트라야누스에게 네르바의 사망 소식을 전달하는 가장 먼저 전달하였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가 제2차 다키아 전쟁을 일으켰을 때 105년부터 제1군단 미네르비아 군단장으로 있으면서 다키아 전쟁을 지휘했고, 이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106년도에 법무관이 되었다. 107년에는 하 판노니아 총독을 지냈고, 이듬해 집정관을 지냈다. 이후 114년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수행할 때, 황제가 출정한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에 임명되었다.

 

# 트라야누스의 양자가 되는 과정이 모호하다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와 5촌 관계였고, 트라야누스 치세 동안 황제의 최측근이었던데가 다키아(지금의 루마니아) 전쟁에 참가하여 큰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이런 승진과 공적, 혈연 관계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자신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내정했다는 이야기나 확실한 징후는 전혀 없었다. 아울러 그는 트라야누스 시대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트라야누스의 측근들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장 정책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져 확장 정책을 주도했던 측근들과 대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에 일어난 파르티아 전쟁에서 하드리아누스는 트라야누스 측근들의 견제로 후방인 시리아 속주 총독 직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나마 이것도 트라야누스의 황후로, 하드리아누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었던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의 적극적인 지지로 얻어낸 자리였다. 그러나 파르티아 전쟁은 실패로 돌아갔고, 병을 얻은 트라야누스는 로마로 돌아가다 서기 11789일에 셀리누스 항구에서 병사했다. 죽기 직전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하드리아누스는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트라야누스는 생전에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정해서 왕조를 열겠다라고 연상시킬 수 있는 일이나 행동을 하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아들을 원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가 아닌 네라티우스 프리스쿠스(L. Neratius Priscus)를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루머도 돌았다. 마지막으로, 트라야누스가 하드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내릴 때 동석했던 인물들이 다 하드리아누스를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트라야누스의 명령이 진실이었냐는 점에 대해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다.

 

# 양자 입적과 황제 등극에 대한 의혹

 

이에 대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통치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 동안 원로원 의원을 지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는 베일에 쌓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황제 등극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로 인한 계승 음모를 거론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이는 그럴듯한 이야기였다고 하는데, “트라야누스는 실제로 하드리아누스를 입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등극과 양자 입적은 당숙모 폼페이아 플로티나 황후가 꾀한 일이고, 며칠 동안 트라야누스 황제의 사망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또 디오 카시우스는, 플로티나 황후가 그 동안 하드리아누스의 입양을 알리는 편지들을 로마 원로원에 보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당대 로마인들조차 의문점을 제기한 증거는 황후가 보낸 트라야누스의 편지왜 트라야누스 황제의 서명 대신 황후 플로티나의 서명이 있느냐였다고 한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의 등극 직전 플로티나 황후는 이에 대해 황제가 너무 허약해져서 서명을 할 수 없었다는 구실을 댔을 것이라고 전한다. 또 다른 소문에 따르면 플로티나가 트라야누스 황제의 방에 누군가를 몰래 들여보내서 황제의 목소리를 성대모사하게 하면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입적과 후계자 지명을 알렸다고 하는데 분명한 사실은 플로티나 황후가 트라야누스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은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이 확실해진 순간이었다고 한다.

 

# 황제로 즉위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셀리누스로 가서 조문을 표한 뒤 다시 시리아로 돌아갔다. 그 뒤 동부 변경의 안정을 위해 메소포타미아 속주와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한다는 처리와 함께, 야만족의 침입으로 불온한 정세에 놓인 도나우강 유역에서 물러나 속주 다키아와 모이시아를 재편성하고 이듬해 7월에 로마에 돌아왔다.

 

하드리아누스의 즉위 과정과 정통성에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로마에 도착하기도 전, 4명의 저명한 원로원 의원들이 국가 전복 혐의로 처형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처형된 이들은 모두 최고 고위직(집정관)을 지낸 사람들이어서 로마인들에게 이 사건은 네 명의 집정관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드리아누스의 제위 계승에 대해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견을 드러냈는데, 이때 하드리아누스의 후견인이던 심복 근위장관 푸불리우스 아킬리우스 아티아누스가 예방적 차원의 처치로서 원로원의 명령에 따라집정관을 맡았던 유력한 원로원 4명을 살해했다. 이것은 하드리아누스의 명령이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 ‘확장 보다는 안정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치세에 이루어진 특기할 만한 사실들은 1) 속주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의 포기와 동부 변경 안정화, 방벽 건조 등을 통한 제국 주변 지역 방어책의 정비, 2) 로마 제국 전체의 통합과 평준화, 3)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 4) 관료 제도의 확립과 행정제도의 정비, 5) 법 제도 개혁 등이 있다.

 

그가 황제로 취임할 때, 선제 트라야누스의 적극적인 정책에 의해 제국의 판도는 최대에 이르렀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일찍이 다키아를 속주로 삼았고, 파르티아 전쟁에서 메소포타미아, 아시리아, 아르메니아를 속주로 삼았으며, 치세 말기에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동방에 인접해 있던 파르티아와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하드리아누스는 외교 기조를 공세에서 수세로 전환하고,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 아르메니아 속주를 포기하는 대신 동방의 변경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통일을 위해서는 평화가 필수불가결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국의 동부 이외에도 제국의 방어력을 정비하는데 힘썼다. 군사적인 요충지에는 방벽(리메스) 구축으로 천연의 요새를 지어 제국을 방비했다. 그 중에서도 칼레도니아인과의 분쟁이 있었던 브리타니아 북부에도 방벽을 구축하였다. 보통 하드리아누스 방벽(하드리아누스의 벽)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게르만인과의 경계였던 라인 강이나 도나우 강 지역, 북아프리카에도 방벽이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 스스로가 군기를 철저하게 바로잡고자 하여 순찰 여행 도중에도 현장에서 병사 훈련을 사찰했고, 직접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또한 군단에 현지 병사를 채용함으로써 군단의 규모를 안정시키고 군비를 절약하였다.

 

파르티아 문제를 수습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 내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우선 속주를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 속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탈리아와의 일체화에 노력을 기울여, 하드리아누스 자신도 두 차례에 걸친 장기간의 순찰 여행에 나섰다. 여행 목적은 제국 방비의 재정비와 제국 행정의 조사, 통합의 상징으로서 황제 자신을 주지시키며 제국 각지(특히 길리시아화된 지역)의 순찰에 있었으며, 건설 관계자를 동반하는 등 공공 부분의 공사도 함께 행해졌다. 20년간 3차례에 걸친 제국 전역을 시찰하여 제국 영토의 방위나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에 대한 대처, 통치 기구 정비 등 제국 내부를 튼실하게 만드는 데 충실하게 노력하여 제국을 재구축한 황제로 불린다. 특히 통치 기구 정비가 매우 철저하여 그가 구축한 관료 기구는 제국의 기초를 마련하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다

 

하드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전임자인 트라야누스 시절 일어난 유대인 대반란을 해결해야 했다. 하필이면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에 원정을 나가 있을 때 뒷통수를 친 것인지라 제국의 입장에서는 유대인의 반란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무척 강경하게 반란을 진압했다.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은 132년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바르 코크바의 난). 하드리아누스는 134년 이를 진압한 이후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차단할 겸 예루살렘 지역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강제이주시켰다. 그렇다고 유대 전체에서 유대인을 몰아낸 것은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추방했을 뿐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유대인에 적대적인 분위기가 되어가면서 많은 유대인이 외지로 이주한 것은 사실이다.

 

# 후계자 선정 과정에서의 잡음

 

서기 136, 건강이 갈수록 악화된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 선정을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그는 그해 루키우스 케오니우스 콤모두스라는 에트루리아 지방 출신의 로마 귀족 청년을 양자로 입양하면서, 이름을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게 했다. 이 귀족 청년은 금발머리와 벽안을 가진 상당한 미남으로, 그 가문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부터 내려온 귀족 집안이었고 그 평판은 원로원과 로마 안팎에서 대단히 훌륭했다. 또 그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 쓰고 118년 네 명의 집정관 사건때 처형된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사위인데다, 원로원 내의 유력 가문들과 끈끈한 인맥으로 연결된 터라 원로원과 사이가 냉담한 늙은 황제에게 훌륭한 후계자감이었다. 그래서 하드리아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은 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된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136년 집정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매부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루수스 세르비아누스가 자신의 이런 결정을 반대한다고 생각해, 90살의 세르비아누스를 반역죄로 기소했다. 또 하드리아누스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혈육이었던, 누나 도미티아 파울리나와 세르비아누스의 18살 손자(하드리아누스의 생질손)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도 함께 기소해 그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이때 아흔이 넘은 세르비아누스와 황제의 생질손 푸스쿠스는 황제의 양자 선정 결정 이후에도, 쿠데타를 시도하거나 그 세력을 과시하지 않은 탓에 위협요소가 아니었다고 한다. 따라서 90이 넘은 세르비아누스는 향을 피워놓고 신들에게 기도하는 등 자신과 손자의 억울함을 호소했는데, 까칠해지고 예민해진 하드리아누스는 이런 호소에도 그들이 쿠데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의심해 자살을 강요했고, 그들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자택에서 자결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이 사건 후, 하드리아누스의 까칠해진 성격과, 그가 자신의 누이 일가를 비롯한 혈육들과 아내에게 매정했던 일화가 다시 조명됐다.

 

# 안토니우스 피우스를 양자로 삼다

 

이렇게 하드리아누스는 매부와 생질손을 죽인 뒤, 양자로 삼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를 밀어줬는데 다음해 판노니아 총독으로 떠났던 후계자는 폐결핵에 걸려 1381월 요절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군대와 백성들에게 지불한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잃어버렸다며 분통을 터트렸고, 다시금 후계자 고민에 빠져들었다. 따라서 그는 138년 오랜 친구이자 인척관계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사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정한 뒤 통치권을 넘겨주고, 아예 로마를 떠나 바이아이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138710일 승하했다.

 

말년에 그는 병상에 누워서 안토니누스를 양아들로 삼아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했다. 황제가 서거한 뒤에는 하드리아누스를 신격화하여 국가신(國家神)의 반열에 올리는 것조차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 경우 신격화되지 못한 채 도미티아누스처럼 기록 말살형에 처해져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관련된 모든 기록이 말소될 수 있었다. 황제의 후계자가 된 안토니누스는 눈물을 흘려가며 필사적으로 원로원 설득에 힘썼고,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신격화에 대한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냈다. 이후 안토니누스는 경건한 안토니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평가

 

원로원과 지식인들은 그가 전임 트라야누스와 달리 변덕스럽고 잔혹한 면이 있음을 이유로 그를 네로의 재림이라고 불렀고, 대중들 역시 노래를 잘하고 예술이나 그리스 문화와 심취한 그를 '네로의 선한 버전' 정도로 평가해 극찬하면서도 불만을 종종 표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는 전임 트라야누스와 달리 생전부터 악평도 상당했고, 그의 치세 내내 로마 원로원은 이런 저런 이유로 그의 치세를 의심의 눈초리로 봤다.

 

죽을 때까지 하드리아누스는 재위 기간의 절반이 넘는 시간동안 속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통치 상태를 점검했고, 공공 건축물을 새로 세웠다. 어떻게 보면 하드리아누스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부분에까지 손을 댄 선견지명이 있는 황제였다. 실제 하드리아누스의 예방 조치 덕분에 로마는 흔들리던 시기에도 그럭저럭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은 긍정적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다. 반면 그의 속주 순방은 수도에서의 황제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며 당대 원로원 계급으로부터 비판받기도 했으며, 제국의 재정을 비효율적으로 소모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당대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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