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AD 138~161)
- 로마 제국 제15대 황제(재위 138년 7월 11일 ~ 161년 3월 7일)
- 출생일 : 86년 9월 19일
- 사망일 : 161년 3월 7일
# 강력한 외가와 처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안토니누스
안토니누스는 이탈리아의 라부니움 근처에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와 그의 아내인 아리아 파딜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89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 아리아 파딜라는 98년에 보좌집정관이었던 푸불리우스 율리우스 루푸스와 혼인하여 아리아 루풀라와 율리아 파딜라라는 딸을 두었다.
안토니누스는 110년에서 115년 사이에 3차례나 집정관을 지낸 원로원 의원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의 딸이며 미인으로 유명했던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대 파우스티나)와 결혼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는 후임 황제가 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고모부가 된다. (이후에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며 장인이 되기도 한다) 강력한 외가와 처가를 가진 그는 당시 로마 엘리트들이 당연하게 여긴 명예로운 경력을 모두 경험하게 된다.
# 하드리아누스의 꼼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도 인정을 받아서 집정관, 이탈리아 반도 행정관 등을 역임하였다. 하드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선정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138년에 죽게 되자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삼았는데, 안토니우스에게 안토니우스의 처조카인 17살의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요절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7살짜리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안토니누스는 조건을 수락하고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어찌보면 하드리아누스는 후임황제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내정해 놓고 중간 징검다리로 안토니누스를 깔아놓은 것인 셈이다.
# 바지사장에서 차기 황제의 장인이 되다
이때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배우자로 자신의 양손녀 케이노이나 파비아로 정해놓았고, 루키우스 베루스의 배우자로 안토니누스의 딸 소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키도록 결정하였다. 그런데 안토니누스는 즉위 직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배우자를 자신의 딸(소 파우스티나)과 결혼시켰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손녀 케이오니나 파비아를 루키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명문가 출신 원로원 귀족 자제와 결손시킨 뒤 루키우스 베루스의 매형이 된 이 남자와 그 일가를 후원하는 방식으로 후계구도를 바꿔버렸다. 안토니누스는 바지사장에서 차기 황제의 장인이 되었다.
#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이탈리아 중심의 내정
황제로 즉위할 당시에 원로원에서는 전임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의 정책에 불만이 상당했다. 안토니누스는 원로원들을 설득시키고 전임자의 신격화와 그에 따른 영예 수여를 설득하였고 원로원과의 관계를 향상시켰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통치 기간에는 자연재해나 가끔씩 일어나는 분쟁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세기 중반부터 로마의 재정문제가 시작되었고, 본국 이탈리아를 비롯해 서방 속주들의 경제, 사회적 쇠퇴로 인해 동방 속주들과의 경제적 편차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안토니누스는 트라야누스의 대외전쟁들로 인해 누적된 문제와 하드리아누스의 효율성 중심 내치로 인한 문제 해결에 최선을 다했다.
안토니누스의 이탈리아 중심 내정은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치세 아래 경제적 취약성이 방치되었던 부분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평가받는다. 또 그가 막대한 공적 자금 투입을 하고 복지수혜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내린 결정 역시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조치로 해석되고 있다. 실제 그는 즉위 직후부터 트라야누스 시대부터 방치된 이탈리아의 쇠퇴를 비롯해, 파르티아 전쟁으로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벌어진 동방 내 파산상태의 지방도시 재건을 위해 상당히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안토니누스의 노력에도 이탈리아와 서방속주는 함께 발전해야 하면서도, 서로 경쟁구도였던 만큼 황제 개인 혼자 이를 해결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었다. 왜냐하면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정복은, 서방 속주(갈리아,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내의 상업, 농업, 제조업 발전과 상호 공존이라는 순환적 경제체계에 분명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 로마군의 질적 저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비판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라면 바로 국방비 절감에 따른 로마 정예 병력의 질적 약화일 것이다. 그가 통치하던 23년의 기간 동안 분명히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라는 말에 걸맞게 제국의 위엄과 힘이 국경선 너머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전임자들인 트라야누스의 군사적 업적들과 하드리아누스가 전역을 순방하면서 로마군을 효율적이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 공헌 덕분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지속된 평화의 결과, 안토니누스는 치세 내내 로마군의 비용 절감을 위해 상당히 노력하는 것에만 힘을 쏟았다. 그의 이런 노력은 오히려 로마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치하고 말았고, 하드리아누스 시대보다 훨씬 고립주의적인 수동적 방어 체계로 로마군의 방어 시스템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까닭에 그가 죽고 난 뒤 고스란히 나라를 물려받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는 즉위 직후 자연재해로 고통받는 와중에 끊임없이 밀려드는 외적들과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