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D 161-180)
- 로마 제국 제16대 황제(재위 : 161년 3월 7일 ~ 180년 3월 17일)
- 출생일 : 121년 4월 26일
- 사망일 : 180년 3월 17일
# 준비된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이자 법무관인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와 도미티아 칼빌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세 살 때 죽었고, 그의 어머니와 조부가 그를 키웠다.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138년에 사망한 뒤,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의 삼촌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그때 조건으로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와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베루스를 양자로 받아들였다. 하드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레우스를 차차기 황제감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 루키우스 베루스와 공동 황제에 오르다
161년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죽은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케이오니쿠스 콤모두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두 사람은 군무 경험이 현저히 부족한 것이 앞으로의 불안 요소가 되고 있었다.
나름 준비된 황제라고 평가받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의 재위 첫 2년간은 어수선했다. 테베레 강의 홍수와 시지쿠스의 지진, 갈라티아에서는 가뭄이 발생했고 브리타니아 속주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으며, 국경 밖에서는 게르만족이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설상사강으로 동방에서는 파르티아가 로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마르쿠스는 동생인 루키우스를 동방으로 보내고 자신은 서방 전선으로 달려가야 했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로마에 돌아왔는데 파르티아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이 전리품과 함께 전염병도 가지고 와서 167년에 로마가 전염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파르티아와의 전쟁으로 전력이 동방으로 빠진 틈을 타서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방어선이 느슨해졌고, 이 틈을 타서 게르만족이 아드리아해의 항구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노예 해방까지 단행하여 병력을 충원하였고 용병까지 고용해서 항구도시 아퀼레이아를 탈환하는데 성공하였다.
# 루키우스 베루스의 사망, 단독 황제가 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서는 안타깝게도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가 169년에 사망하였다. 이후부터는 마르쿠스 혼자서 국경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전임 황제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에 태평성대가 지속되면서 약해진 로마군의 체질을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
마르쿠스는 제국의 동방 방어와 안정화를 위해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시리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해서 파르티아의 또 다른 도발과 동방 속주 내 소요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는 175년에 황제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도나우강 전선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자기 서거했다는 거짓보고를 그대로 믿고 반기를 든 것이었다.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반란에는 황후 소 파우스티나가 있었다는 설이 있다. 1) 남편의 뒤를 이을 자를 낙점하면서 이를 시험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다는 것, 2) 남편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말을 듣고 첫째 사위 폼페이아누스와 함께 황실을 도울 수 있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에게 “황제가 곧 서거할 것 같고, 아들 콤모두스가 아직 어리므로 제위를 이어달라”고 거짓 정보를 보내 부추겼다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정복 직전이던 콰디족, 아아지게스족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황후 소 파우스티나와 어린 아들 콤모두스를 발칸반도에 위치한 시르미움(오늘날의 미트로비카)로 부른 다음 동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발했다. 이후 이집트가 카시우스를 지지하지 않았고, 원로원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대한 신임을 재확인하였다. 황제와 원로원은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 푸불리우스 마르티우스 베루스를 진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마르티우스 베루스 군이 움직이면서 카시우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결국 카시우스는 휘하 백인대장에게 살해되었는데, 이때 차남 아비디우스 마이키아누스도 살해되었다. 이후 카시우스 부하들은 항복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의 머리를 가지고 찾아왔다. 마르쿠스는 거짓 보고에 속아 반란을 일으킨 카시우스의 수급을 보기를 거부하면서 정중하게 장례를 치룬 뒤 묻어주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처리는 관용적으로 진행되었다.
# 외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정하다
카시우스 반란이 자신이 서거했다는 거짓 보고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황제는 동방 속주로 행차하며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충성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 황후 소 파우스티나가 사망하여 슬픔에 빠진채 로마로 귀환했다. 로마에 돌아온 후 마르쿠스는 현지와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 속주 총독을 임명할 때 출생지 속주는 맡기지 않기로 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이때까지는 결점이 없었던 외아들 콤모두스를 상속자 겸 공식 후계자로 선정하였다.
이후 황제는 다시 쉬지 못하고 178년 도나우 전선으로 향하여 콰디족, 마르코만니족 연합군과 상대해야 했다.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3월 17일 자신의 설치한 병영 기지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떠오르는 태양한테 가라. 내 태양은 지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 전장에서 개고생한 철학자 황제
동시대에도, 현재까지도 역대 로마 황제 중에서 가장 고결한 황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하는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 사람들도 인정했듯이 그는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하얗게 불태우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명군으로 추앙받았다.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보낸 선제와 달리 그는 재위기간 동안 군사령관이자 황제로서 힘든 삶을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철학을 논하고 사색에 잠기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재위기간 내내 이민족과의 전쟁에 시달렸고, 황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전쟁터에 나가야 했다. 당시 로마 제국에는 유행병이 퍼져서 제국은 혼돈으로 빠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는 가장 치열한 전장이었던 도나우 강 방어선에서 고된 국방 문제까지 앞장서서 해결했다. 이런 격무들은 본래부터 건강치 않았던 그를 악화시켰으며, 끝내 로마 황제 최초로 전장에서 황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다 도나우 전선의 빈도보나 병영에서 삶을 마감하게 만들었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헌신과 노력은 위기에 빠진 제국의 상황을 최악으로 떨어지지 않게끔 했다.
# 함량 미달의 후계자 선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비판을 받는 이유는 함량 미달의 후계자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생전에 공동황제에 오른 콤모두스는 별다른 결격 사유가 없는 10대 소년이었고, 나름 책임감이 강했으며, 꼼꼼한 아버지에게 문제거리도 잡히지 않는 후계자였다. 법적, 혈연적으로 문제가 없었고, 당시 성격적인 결함이나 무절제한 사치 행각, 잔인성과 폭력성, 무책임함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실제로 콤모두스가 본격적으로 일탈을 시작한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단독황제가 된 지 2년 후인 182년에 친누나 루킬라의 야심으로 벌어진 그녀 주도의 암살 위험을 두 차례가 겪고나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