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秦) 시황제(始皇帝, BC 221~210)
- 출생 : 기원전 259년
- 사망 : 기원전 210년
- 즉위 : 기원전 221년, 시황제로 칭함
- 부 : 진의 장양왕(莊襄王)
- 모 : 조희(趙姬), 부호 여불위의 전 애첩
- 능묘 : 산시성 린퉁현 리산(酈山)
# 전쟁의 시대
정(政)은 기원전 259년에 태어났다. 전국시대(기원전 475년 ~ 기원전 221년)는 강력한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어 거의 언제나 전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그의 부친은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인 진의 장양왕이고, 모친 조희는 장양왕을 후원한 부유한 상인 여불위의 애첩이었다. 비평가들은 후에 시황제가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의 성격(탁월한 실용적ㆍ전략적 감각에 무용을 갖춘)은 초기 진나라 군주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는 13세 때인 기원전 246년에 부친이 사망하면서 진나라의 정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황태후인 조희와 여불위가 섭정을 하며 권력을 농단했으나, 기원전 238년부터 정이 친정을 했다.
# 정력적인 활동
시황제는 스무 명이 넘는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의 황후와 후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총애하던 황후나 후궁에 대한 언급도 없고, 심지어 이세황제 모후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성격에 관해서도 결단력과 세심한 주의력 그리고 정력적인 활동(그는 밤늦도록 쉬지도 않고 불철주야 집무를 보았다) 정도만 언급했을 뿐이다.
# 법가를 활용하여 전국을 통일하다
시황제는 법가의 열렬한 신봉자이던 이사(李斯)를 재상으로 삼아 행정을 효율적으로 만들고 전면적인 토지 개혁을 단행하여 군량 공급에 필요한 농업 기반을 조성했다. 온 백성이 ‘생산활동’에 동원되었고, 군대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공격력을 갖춘 기구로 태어났다. 진의 정예군은 군기가 엄격한 것으로 유명했고 포로들을 학살하는 잔혹한 병사들은 적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 사이에 진은 외교, 술수, 전략을 교묘하게 혼합하여 마치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이” 적들을 삼켜 버렸고, 기원전 221년까지 진의 호랑이는 모든 적들을 제거하고 중국을 통일한 후 자신을 시황제(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라 칭했다. 그의 의도는 이처럼 분명했다. “짐은 첫 번째 황제이며, 짐의 후계자는 계속해서 2세, 3세 황제 등으로 만방에 알려질 것이다.”
#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다
다음 11년 동안 그의 천재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났다. 시황제는 철권통치로 여러 제후국들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시켰고, 그 기본 틀이 제국의 전 기간에 걸쳐 작용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창출했다. 전 영토는 36개의 행정 단위인 군으로 나뉘어 제국 관료들의 통제를 받았다(군현제). 시황제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단일 화폐를 사용하게 했으며 무엇보다도 단일 문자를 쓰게 했다. 시황제는 가장 많이 사용되는 3,000자를 단순화하여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서체의 기틀을 마련했다.
# 제국의 국경선을 표시하다(만리장성)
질서를 매우 중시했던 시황제는 제국의 국경선을 표시했다. 시황제의 명령에 따라 확장되고 통합된 만리장성은 길이가 4,000킬로미터에 이르렀고, 서쪽과 북쪽의 경계를 정했으며 이로써 초원의 기마 민족들에 대한 방어선이 정비되었다. 동쪽 변방에 있는 커다란 비석에는 그의 성공과 영토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태양과 달이 비추는 곳에서,
배나 마차로 갈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질서를 지키고
황제의 바람을 만족시킨다.”
# 사상을 통제하다 : 분서갱유
마지막으로 시황제는 사상을 표준화하려 했다. 전 인구의 15퍼센터를 동원한 것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한 탓에 전국은 불안으로 가득찼다. 중국의 민담에 의하면 만리장성을 1미터 축조할 때마다 한 사람씩 죽였다고 한다.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시황제는 서적을 불태우라 지시했으며, 이는 중국의 학자들이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행위였다(분서갱유).
시황제의 이러한 모든 행동은 그것이 악이든 선이든 제국의 통일이라는 실질적인 목표를 추구한 결단력에 따른 것이었다.
# 미신에 심취하고 죽음을 두려워다
한편 그는 미신에 심취했고 죽음을 두려워했다. 세 차례의 암살 기도에서 살아난 시황제는 암살을 병적으로 두려워하여 자신의 거처를 발설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또 불멸을 추구한 시황제는 방사(方士)나 무당에게 조언을 구하고 불로장생의 영약과 약초를 구했으며 산과 강의 신령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젊은 남녀로 구성된 사절단을 동해 건너 신비로운 불사의 땅이라는 봉래산(蓬萊山)으로 보냈다.
# 진시황의 무덤
말년에 시황제는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무덤을 사후 세계에서도 황제의 지위를 지킬 수 있게 설계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시황제의 지하 묘실은 우주를 재현한 것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 무덤에 자동발사식 석궁을 걸어놓았고 이세 황제는 아버지의 시신을 매장할 때 자식이 없는 후궁들과 무덤의 비밀을 아는 인부들을 모두 생매장하게 했다.
# 죽음과 이세황제
시황제가 동쪽 해안으로 순시를 가는 도중에 급사하자, 황제의 고문 이사는 황제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그 사이에 왕위 계승 절차를 조작하고 칙령을 날조하여 온후한 황태자 부소에게 자살을 명했다. 조작된 유서로 이사는 시황제의 둘째 아들인 호해(胡亥)를 이세황제로 옹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