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AD 69~79)
- 로마 제국 제9대 황제(재위 : 69년 12월 22일 ~ 79년 6월 24일)
- 출생일 : 기원후 9년 11월 17일
- 사망일 : 기원후 79년 6월 24일
배우자
- 플라비아 도미틸라 마요르
- 갈레리아 푼다니아
자녀
- 티투스
- 플라비아 도미티아 미노르
- 도미티아누스
# 돈에 밝은 가문
베스파시아누스는 아시아 속주의 세금 징수를 담당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와 그의 아내 베스파시아 폴라의 두 형제 중 차남으로 사비니 지방의 레아테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들로 차기 황제가 되는 티투스와 도미티아누스가 있었고, 딸로는 도미틸라가 있었다.
플라비우스 가문은 ‘금발머리에서 유래한 평민 성씨로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듣보잡 가문이었다고 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버지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사비누스는 대를 이어 세금징수원의 길을 걸었고, 다른 세금징수원과는 달리 양심적이고 정직했다고 한다. 퇴직 후에는 라이티아 속주(오늘날의 바이에른 지역 일부와 스위스 동부)에서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다. 그는 자신보다 신분이 훌륭한 고향 근처의 도시 누르시아의 명문가 처녀인 베스파시아 폴라와 아들 베스파시아누스를 결혼시켰다. 베스파시아누스의 장인은 제국군 군단 대대장을 지낸 기사계급의 관료였다.
# 베스파시아누스의 젊은 시절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은 시절부터 상당히 좋은 교육을 받았다. 집에서는 베스파시아누스보다는 형인 사비누스에게 더 기대를 걸었다고 한다. 항상 비교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머니나 형의 의사와는 반대로 페렌티움 출신 기사계급 가문의 딸이었던 도미틸라와 결혼하였다. (도미틸라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형을 따라서 공직에 입문하였고, 36년 트라키아 지방에서 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회계 감사관으로 선출, 크레타 섬과 키레네에서 복무한다. 차근 차근 단계를 밟아, 39년 조영관직을 거친 후 이듬해인 40년 법무관에 선출되었다.
# 황제의 총애를 받아 성장하다
원로원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출신을 얕잡아 보고 있었는데, 황제인 칼리굴라가 원로원을 견제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출세하기 시작했다. 칼리굴라를 향한 충성심은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에 공화정을 염두에 두던 원로원 회의에서 대담하게 ‘칼리굴라의 원한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서 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로부터 가이우스(칼리굴라)의 측근이며 친황제파로 눈도장을 찍게 된다.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제위에 올랐을 때, 클라우디우스의 가신이었던 해방노예 나르키소스의 천거로 그는 게르마니아에 있는 제2군단 아우구스타의 군단장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황실의 해방 노예 출신인 카이니스와 인연을 맺어 카이니스가 죽을 때까지 사실상 부부로 지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아래에서 무수한 행정, 군사적 경험을 쌓았으면 충성심도 인정을 받아서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원로원 귀족에 편입이 되었다. 네로 황제 때에도 뛰어난 장군으로 공을 세웠지만, 네로 황제가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다가 네로 황제의 시를 들으며 졸았다는 이유로 유배되어 양봉을 하며 지낸다.
# 유대반란 진압 도중 황제가 되다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 민족주의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발생한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이를 평정할 지휘관으로 임명을 받아 유대땅으로 파견되었다(66년). 그는 지략과 용맹으로 유대 북부 갈릴래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고, 요셉이라는 유대인 지도자를 포로로 잡게 된다. 후에 요세푸스라는 유대인이 제안한 로마와 유다 간의 절충안으로 양쪽의 상생을 모색하게 된다. 로마에서는 네로의 자살로 큰 혼란이 야기되었는데 이것을 수습할 적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가 선택되면서 로마에 입성하게 된다. 그는 황제가 된 후 혼란과 국가 위신의 회복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최대한 보복을 줄이는 방법으로 네로 자살 이후 터진 내전의 치유에 최선을 다하였다.
# 제국을 안정시키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즉위 이후 장남 티투스를 앞세워, 본인은 관용을 베푸는 방법으로 인기를 얻었고 뒤로는 명문 귀족 숙청 및 추방으로 권력을 강화시켜나갔다. 이외에도 비텔리우스 즉위 후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 장로교 복무해온 게르만 족장 율리우스 키빌리스 주도의 반란, 오늘날 벨기에에서 시작되어 갈리아 북동부로 퍼져나간 켈트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퀸투스 페틸리우스 케리알리스에게 두 반란을 진압하라고 지휘권을 주었는데 그는 손쉽게 두 반란을 모두 진압했다) 동방에서는 장남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며 유대전쟁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협력적인 인사들을 원로원에 충원시키면서 원로원을 서서히 약화시켜 나갔다. 개국 공신이지만 자체 군사력이 있어서 위험이 될 수 있는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와 도나우 군단장 프리무스에게 명예직을 주어 자연스럽게 은퇴시키는 방법으로 퇴장시켰다. 그리고 근위대장과 근위대의 힘을 통해 정적을 솎아냈는데, 이 중책을 맡은 이는 후계자 티투스였다.
# 로마의 국고를 다시 채우다
그는 재무행정분야의 개혁을 통해서 네로의 사치와 혼란으로 바닥난 국고를 다시 채워나갔다.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우려가 있는 속주 주둔병력을 개편하여 속주 총독, 야전사령관들의 군단 장악과 반란 위험성을 최소화시키는데 주력했다. 속주에게 라틴 권리를 부여하면서 불만을 다스렸고, 이렇게 라틴 권리가 부여된 속주는 로마 시민권자의 병력 자원과 세금 징수대상 확대 효과를 가져왔다.
최초의 평민 출신 로마 황제로 아들 티투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황조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재정의 건전화를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쳤는데, 유명한 것은 74년에 유료공중화장실을 설치한 것이다. 반대파는 비웃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는 “돈에서는 냄새가 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공중화장실에서 모은 소변을 가죽공업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양털의 기름 성분을 제거하기 위해 인간의 소변을 사용했다고 한다)
75년에는 콜로세움 건설을 시작했다(8년에 걸친 콜로세움은 로마 건축의 혁명이었다). 새로운 구조적 발상(아치)와 재료의 변화(대리석에서 콘크리트), 그 당시 최신 기계장치인 기중기가 이용되었다.
#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평가
베스파시아누스에 대한 평가는 그가 69년 내전과 유혈사태로 얼룩진 로마를 안정시키고, 70년부터 네로와 갈바, 비텔리우스가 저지른 실정을 수습한 것만으로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과거 옥타비아누스의 악티움해전 승리 못지않다고 찬사를 받았다. 아울러 이 황제가 재위기간동안 벌인 일들은 아우구스투스 못지않게 광범위하고 로마의 1세기 중후반~2세기까지 그 연속성을 지속케했기에, 당대사가들과 근현대사가들은 이런 그를 프린키파투스의 제2창건자라고 했다.
그는 사상 최초로 수도 로마가 아닌 지방 출신의 황제였고, 이는 이후에 로마 황제의 출생지에 대한 로마 제국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어 나중에 가면 속주 출신 황제들도 나올 정도가 되게 한 선구자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세리 집안의 차남으로서 로마 제국의 권부 최상층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으나, 치밀함과 부지런함으로 자신의 신분을 끌어 올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고, 제위 등극 자체도 개인적 야심을 앞세워 등장한 권력자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