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토요일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 티베리우스(Tiberius, AD 14~37)

티베리우스(Tiberius)

 

  •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재위 : 14918~ 37316)
  • 출생일 : 기원전 421116
  • 사망일 : 기원후 37316[79]

 


# 반역자의 아들, 티베리우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4211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아버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어머니 리비라 드루실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리우스는 반아우구스투스파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 때 참여하자 1세 때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르시아와 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티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에 맡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 미모의 어머니에 반한 제국의 일인자 옥타비아누스

 

티베리우스가 3살 때에 사면령이 내려져서 티베리우스 일가는 로마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 옥타비아누스가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의 미모에 반하여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이혼하라고 압력을 넣었기 때문에 부모는 이혼하였고, 리비아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였다. 티베리우스는 리비아가 결혼한 직후에 출산한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에게 거두어져 양육되었다. 티베리우스가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에게로 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티베리우스는, 승승장구하던 옥타비아누스 휘하에서 정무나 군무업에 종사하게 된다. 기원전 298,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개선식에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조카 마르켈루스와 함께 개선식에 참가하였고, 그 후 드루수스와 함께 군단의 사령관으로서 각지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 후계자의 후견인이 되어 강제 이혼당한 티베리우스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으며 임페라토르에 등극한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를 모색하다가 자신의 딸과 아그리파의 사이에서 낳은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를 후계자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다. 두 명의 손자들의 후견인으로 아그리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그리파가 기원전 12년에 죽으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친척 중의 최연장자인 티베리우스를 후견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첫 번째 아내 폰포시아의 딸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하고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이혼당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딸인 율리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 로도스 섬에서의 은거

 

티베리우스는 빕사이나와의 이별을 슬퍼했지만 율리아와의 결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품행이 좋지 않던 율리아의 행실로 부부 사이가 악화되어, 티베리우스는 자진하여 로도스 섬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 동안 율리아가 간통죄로 추궁받아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추방당한다)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2년에 로마로 귀환하였지만, 후계자 후보인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이미 요절한 상태라 티베리우스가 후계자 후보가 된다.

 

#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황제에 즉위하다

 

기원전 4,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다. 그때, 티베리우스에게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게 된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외손자이며, 율리우스 가문의 혈통이 흐르는 인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티베리우스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들이 된 아그리파의 아들 아그리파 포스트무스는 양아들 결연이 파기되어 추방되면서 티베리우스가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후계자가 된다.

 

기원전 13년에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사실상 공동 임페라토르가 되었으며, 서기 14년부터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노환으로 실질적으로 단독 임페라토르가 된다. 이윽고 14819일에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그의 유언장에 의해 유산의 상속자로 지명되었고 임페라토르에 즉위하게 된다.

 

# 뛰어난 행정 수완, 형편없는 인기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는 금융 위기 대책, 변경 방위망 확립 등 뛰어난 행정 수완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전차 경기대회와 검투사 경기를 중지시키는 등 재정 낭비 중단 정책을 단행했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는 낮았다고 한다. 서기 26년부터 사망하는 37년까지 카프리섬에 은거하여, 근위대장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를 통해서 로마를 통치했기 때문에, 그의 인기는 한층 더 떨어지게 한다. 또한 29년에 아그리피나 소탕작전으로 티베리우스의 인기는 더욱 떨어졌고, 서기 311028일에는 권력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던 세야누스를 교묘한 전략을 사용해서 처형하기도 했다. 3779살에 병에 걸려 사망한다.

 

#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이 평가한 티베리우스의 치세

 

유대 출신의 철학자 필론(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티베리우스의 치세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죽은 뒤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가 물려받은 제국은 세계의 모든 땅과 바다라 해도 좋은 광대한 로마 제국이었다. 이 제국에서는 어떤 규모의 '싸움'도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원인은 제국 전역에 공정한 법이 엄정하게 시행되어왔기 때문이다. 제국의 동쪽과 서쪽, 남쪽과 북쪽에서도 모든 땅과 바다가 로마 제국의 이름 아래 조화로운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 제국 내부에서는 야만족도 문명인과 뒤섞이고, 정복자는 피정복자와 뒤섞이고, 양쪽 모두의 소망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각자 자신의 책무를 다한다. 나날의 생활을 보면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부가 축적되어 금과 은은 화폐와 공예품의 형태로 넘쳐 흐르고, 제국 전역에 퍼진 교역망을 통해 부와 물산이 왕성하게 교류되고 있다. 군사력도 보병, 기병, 해군으로 정비되어, 제국 안에서는 어디서나 안전하게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제국은 하나의 통일체인 것이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라인 강까지를 끌어안은 제국은 태양이 뜨고 지는 것까지도 끌어안고 사는 듯 하다. 이런 모든 특전은 본국 이탈리아에 사는 로마 시민들만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럽인과 아시아인을 포함한 제국의 모든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특전이다. 이런 상태의 제국을 물려받는 행운을 얻은 황제는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처음이었다. 개인 규모든 제국 규모든, 부에서도 권력에서도 번영의 기반에서도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문을 열고 그 행복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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