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토요일

[로마 제국] 제3대 황제 : 칼리굴라(Caligula, AD 37~41)

칼리굴라(Caligula)

 

  •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재위 : 37316~ 41124)
  • 출생일 : 12831
  • 사망일 : 41124[28]

 

칼리굴라(Caligula)

# 혈통적으로는 완벽했던 칼리굴라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네로의 어머니인 소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게르마니쿠스 부부에게는 아들이 다섯명이 있다. 칼리굴라의 형 4명 중 큰 형 네로 카이사르,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 시대 때 세야누스의 음모로 죽었으며, 칼리굴라 바로 위의 두 형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유년기 때 죽었다.

 

혈통적으로 보면 법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된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그는 혈연적으로는 부모 양쪽을 통해서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 아그리파의 피를 모두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 게르마니아 군단의 마스코트, 칼리굴라

 

그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방면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서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을 라인 강 방위선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단병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칼리굴라 당사자는 칼리굴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 세야누스의 야망으로 보호자인 소 드루수스 사망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한 후,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함께 귀국하였는데, 아버지의 입양동생이자 고모부인 소() 드루수스가 공식적으로 칼리굴라와 그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보호자가 되었는데, 얼마 안 있어 티베리우스 사후 제위를 노히던 세야누스와 아내 리빌라의 공모로 독살당한다. 드루수스는 일찍부터 세야누스의 교활함과 야망을 알아채조 티베리우스에게 그의 기용을 반대했다고 한다. 세야누스는 의도적으로 리빌라를 유혹해서 아내와의 이혼과 리빌라와의 재혼을 약속한 뒤, 그녀와 불륜관계를 맺고 공모해 드루수스를 독살한 것이다.

 

# 세야누스의 야망으로 반역죄로 내몰린 어머니와 형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한 이우, 증조부이자 할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칼리굴라의 두 형인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르를 입양 형식으로 후계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세야누스의 음모로 카이사르 가문 직계들에게 반역죄가 씌워져 대 아그리피나와 큰 형 네로 카이사르가 세야누스의 1차 고발과 티베리우스의 2차 고발 형식을 통해 반역 혐의로 외딴 섬으로 추방되었다. 큰형 네로는 31년에 유배지에서 자살했고, 작은 형 드루수스는 33년에 지하실에서 짚으로 만든 침대 매트리스까지 뜯어먹으면서 버티다가 아사하였다. 대 아그리피나는 외딴 섬에서 서기 33년에 아사하였다.

 

# 소 안토니아의 보호로 목숨을 건진 칼리굴라

 

칼리굴라는 이후 친할머니인 소 안토니아에게 보호를 받았다. 소 안토니아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딸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였으며, 황제 티베리우스의 동생의 아내였다.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아내인 소 안토니아의 편지를 받고 칼리굴라를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 후계자 후보들이 줄줄이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의해서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미루스와 함께 제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 티베리우스의 공동후계자? 단독후계자!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의 젊은 후계자로서 칼리굴라(당시 24)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성사될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의 만년에 공포정치를 펴서 인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공동상속인으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를 단독상속인으로서 황제로 추대했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이후 칼리굴라의 양자로 임명되었다)

 

# 취임 후 7개월만에 중병

 

칼리굴라는 황제 취임 직후에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키고 로마 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런데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로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후유증으로 정신에 이상이 생겼고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서기 38년 중병에서 완쾌된 칼리굴라는 공동제위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였다. 이것에 대해서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 일가 내의 티베리우스파대 드루수스파’(게르마니쿠스파)의 대결과 황실 내부의 오랜 갈등이 폭발한 사건으로 보고 있다.

 

# 비정상적인 통치?

 

칼리굴라는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한 내용으로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았으며, 국고를 탕진해 재정을 파탄시키고 이로 인해 민심의 급속한 이탈을 불러왔다. 또 자신의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정상적인 통치를 하였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들과 같은 복장을 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는데,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 서양 학계에서는 그가 짧은 재위 기간동안 공공건축, 인프라 입안 및 건설, 화폐발행권 일원화 등 행정 개혁과 내정 정책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행정적 측면에서 이미지와는 달리 괜찮았다는 평가를 해주고 있다. 그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물 공급을 위해 즉위 후 로마 시에 수도교 2개를 건설했다.

 

#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좋다!”

 

중병 이후 그는 둘째 여동생 드루실라와 그 남편 레피두스를 나란히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여동생 드루실라가 서기 38년 로마를 휩쓴 열병에 걸려 사망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꼬였다. 그리고 레피두스가 자신의 두 여동생인 소 아그리피나, 율리아 리빌라와 공모해서 벌인 암살계획 사건이 드러나면서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인재들을 기용했는데,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의 오빠 코르불로, 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의 창건자 베스파시나우스가 그 대표적인 인재들이다. 그는 프린켑스 권한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고전의 한 문구를 인용했는데 나를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날 증오해도 상관없다이다.

 

399월 칼리굴라는 갈리아 북부로 원정을 떠난다. 뜬금없는 원정이라고 비난을 받지만 애초에 안정상 위협을 겪던 갈리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원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과가 미비하기 때문에 사후에 그가 받는 비난 중 하나가 된다.

 

# 근위대에 의해 암살당함

 

411,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에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 의해 아내, 딸과 함께 죽임을 당했으니, 통치기간은 310개월에 불과했다.

 

칼리굴라가 카이에라와 사비누스, 루푸스의 손에 피살된 직후, 카이레아는 서둘러 미리 황궁으로 불러 가두었던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남자 혈육이자 칼리굴라 황제의 숙부 클라우디우스를 찾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하들을 보내 황후인 밀로니아 카이소니아와 율리아 드루실라 공주를 죽였다. 그들을 황제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를 인질로 삼아 로마 외곽의 프라이토리아니 병영으로 연행했다.

 

#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르다

 

칼리굴라 황제의 또 다른 근위대 장교 아레키누스 클레멘스를 필두로 한 근위대 병사들은 자신들의 직책 등의 현실적인 이유 등도 있어서 클라우디우스 즉위에는 찬성하면서도 칼리굴라에 대한 암살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카이레아, 사비누스와 그 부하들은 황제 살해 및 가족법에 따른 존속살해 혐의, 즉 대역죄로 체포된다. 클라우디우스는 말과 돈으로 근위대를 설득해서 칼리굴라 암사를 주도한 카이레아 등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자살을 명하였다.

 

칼리굴라가 암살된 후, 원로원이 제정 대신 로마 공화정의 부흥을 기획했었지만, 근위대가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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