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Claudius, AD 41~54)
- 로마 제국 제4대 황제(재위 : 41년 1월 24일 ~ 54년 10월 13일)
- 출생일 : 기원전 10년 8월 1일
- 사망일 : 기원후 54년 10월 13일 [63세]
배우자
- 플라우티아 우르굴라닐라 : 9년 결혼 / 24년 이혼
- 아일리아 파이티나 : 28년 결혼 / 31년 이혼
- 메살리나 발레리아 : 38년 결혼 / 48년 사망
- 소 아그리피나 : 49년 결혼
# 황제의 삼촌
로마의 장군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小) 안토니아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손자이며,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손자이기도 하며, 티베리우스의 조카이기도 하다. 전임 황제인 칼리굴라의 친삼촌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에 ‘내 친손자’라고 명시한 카이사르 가의 직계 황족이었다) 그는 루그두눔(리옹)에서 태어난 까닭에 로마 황제 중 이탈리아 반도 밖에서 태어난 최초의 황제이기도 하다.
# 선천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클라우디우스
아버지 드루수스나 형인 케르마니쿠스와는 달리 원래부터 병약하고, 말을 더듬고 한쪽 발을 질질 끄는 버릇 때문에(소아마비나 뇌성마비?) 황실 안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머니 소 안토니아는 클라우디우스를 혼낼 때 “괴물”이라고 하거나 “자연이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 짓지 못한 인간”이라고 종종 무시했다고 한다. (그의 가정교사들도 종종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형인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배려해 주었고, 양할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도 그를 특별히 신경써주었다. 그리고 클라우디우스의 역사에 대한 재능과 흥미를 찾아낸 역사가 리비우스의 영향으로 에트루리아나 카르타고의 역사를 저술하면서 역사가로서의 측면을 갖게 되었다. 오히려 그의 약점은 이후 황실에 불어닥친 음모와 권력투쟁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 칼리굴라 암살 후 황제로 추대되다
칼리굴라가 황제로 즉위한 후, 원로원에 의해서 칼리굴라와 함께 집정관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41년 1월 24일에 칼리굴라가 암살되자 1월 25일 황제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근위대에 의한 추대이기 때문에 이후 군사력이 로마 황제를 결정하는 군인황제 시대의 선례가 되었다.
원로원은 칼리굴라가 암살된 직후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꿈꾸었다. 그러나 당시에 뚜렷하게 내세울 인물이 없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게 칼리굴라에 대한 ‘기록말살형’을 하지 말라고 정중하게 경고하였다고 한다.
# 클라우디우스의 업적
교양을 갖춘 역사가였던 그는 지혜로운 정책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이 심했던 유대의 통치 문제 등을 해결했지만, 시민들의 인기는 낮았다. 그는 갈리아인이나 아니누니족 출신의 해방 노예 등을 등용하여 다양한 행정 분야를 감독할 권한을 부여하면서 비원로원 의원의 정치 참여를 증대하여 황제권의 강화와 관료제를 발달시키려고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공공개혁의 일환으로 수로, 상하수도, 운하 외에도 제국 속주 간의 무역과 공업 발전에 힘을 쏟았으며, 그 일환으로 그의 업적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오스티아 항구 건설을 시작하였다.
45년에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하는 반유대주의정책을 실시하여 약 2만 5천 명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의 코린토스로 이주하였다(사도행전 18:1-2).
클라우디우스 통치 시기에 달마티아 총독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카밀루스 스크리보니아누스 반란 사건, 46년 소요로 발생한 트라키아 문제(이후 로마 황제의 속주로 합병됨), 칼리굴라의 최대 실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살해로 시작된 마우레타니아 반란이 복합적으로 발생하였다.
43년에 클라우디우스는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브리타니아인들의 항복을 받아낸 클라우디우스에게 원로원은 투표를 거쳐 황제의 개선식을 통과시키고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자”라는 뜻을 가진 ‘브리타니쿠스’라는 존칭을 결정해 클라우디우스와 그 가족들이 사용하도록 했다.
# 불행한 결혼 생활
그는 네 번의 결혼 생활을 하였는데, 모두 아내에게 무시받거나 권력 장악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첫 번째 아내 플라우티아와 두 번째 아내 아일리아는 클라우디우스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정숙하지 못해 갈등을 일으키다 모두 이혼했다. 48살의 나이에 조가 칼리굴라의 도움으로 세 번째 결혼(메살리나)을 하게 되었는데, 메살리나는 황후가 된 후에 사치와 욕심으로 발생한 각종 고발과 부정행위로 클라우디우스의 명성을 크게 실추시켰다. 메살리나는 자신의 연인 중 한 명인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공모해 48년 오스티아로 시찰나간 클라우디우스를 폐위시키기로 음모를 꾸몄고, 실리우스와 결혼식도 올렸다. (결국 실리우스는 간통, 중혼 및 국가 반역죄로 체포돼 처형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메살리나 처벌에 뜸을 들였지만, 측근인 나르키수스가 결단력이 부족한 클라우디우스를 대신헤 메살리나가 머물던 루쿨루스 별장에 사람을 보내 황제의 명이라 밝히고 그녀를 죽였다. 측근 팔라스는 황제의 조카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유일한 여성인 소 아그리피나를 추천했고 결국 클라우디우스는 그녀와 재혼하였다.
# 소 아그리피나와의 결혼
클라우디우스가 조카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친형이었던 게르마니쿠스와 달리 글라우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임에도 다른 남자 친척들과 달리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지 못하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으로 남아야먄 했다. 표면상으로나마 율리우스 가문이 제위를 계승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클라우디우스가 ‘문서상’ 율리우스 가문이 아닌 것이 정치적인 약점이 되었다. 그러나 근친혼이 흔했던 로마에서도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무리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고
54년 독버섯에 중독되어 사망했다고 하지만, 4번째 아내이자 다음 황제(네로)의 어머니인 소(小) 아그리피나에게 암살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유언장과 브리타니쿠스(클라우디우스와 메살리나 사이에서 낳은 아들)를 무시하고 네로를 추대한 것은 폭력과 살인이 동반되지 않았을 뿐이지 반쯤 쿠데타나 다름 없었다. (유언장에서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가 공동 제위계승권자로 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부루스 등이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명분을 내세워 휴지조각처럼 무시했다) 원로원도 세네카가 적어준 첫 연설문을 읽어나간 네로를 지지하면서, 네로 만을 황제로 승인했다.
#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평가
그는 원로원 개혁, 내정개혁, 오스티아 건설 등에서 드러나듯 즉위 전까지 정치, 실무 경험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행정가였다. 선천적으로 갖게 된 장애와 충분치 못한 경험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성실성과 노력으로 제정 시스템을 한층 업그레이드 시킨 명군으로 불리고 있다. 반면 지나치게 온화한 성품, 부족한 정치 경험, 오랜 시간 소외된 탓에 부족한 자신감은 원로원 내 반대파들과 세네카 등 당대 지식인들에게 ‘지나치게 우유부단하다’, ‘아내나 해방노예에게 이용당한다’ 등으로 까였고, 오늘날에도 그의 단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단점보다 더 큰 비판을 받는 부분은 50대의 나이에 즉위한 이후에도 마땅한 후계구도를 마련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해도 결론적으로 최대 실책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됐다. 또한 정치술이 부족한 까닭에 선량한 의도로 원로원 의원들을 향한 고발과 재판을 신중히 검토해 메살리나, 아그리피나 등의 음모를 막은 부분도 당대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원로원 중심주의자들로부터 오해를 사게 되면서 클라우디우스가 당대에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