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Nero, AD 54~68)
- 로마 제국의 제5대 황제(재위 : 54년 10월 13일 ~ 68년 6월 9일)
- 출생일 : 37년 12월 15일
- 사망일 : 68년 6월 9일 [30세]
배우자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 53년 결혼 / 62년 사망
- 포파이아 사비나 : 62년 결혼 / 65년 사망
- 스타틸리아 메살리나 : 66년 결혼
- 스포루스 : 67년 결혼
- 피타고라스(자유민) : 64년 결혼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본래 이름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이며, 황제가 되어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Caesar Augustus Germanicus)로 칭하였다. 클라우디우스의 외종손이자 양자이며, 칼리굴라의 외조카이다. (로마의 양자 시스템이 족보를 개족보로 만든 거 아닌가?)
그는 37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로의 친아버지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아우구스투스의 누이)와 안토니우스의 딸이다. 네로의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이자 게르마니쿠스크의 딸인 율리아 아그리피나(소 아그리피나)이다. 따라서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율리우스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셈이다.
# 네로의 친아버지(그나이우스)의 망나니 행동
네로의 아버지 그나이우스는 가문의 권력과 황제 가문과의 가까운 혈연 관계를 믿고 막장 짓을 저지르다가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에 사형 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티베리우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사형이 미뤄졌고 이종사촌형 게르마니쿠스의 막내아들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서 민심을 잡기 위해 티베리우스 때 유죄판결 받은 이들을 사면해 주면서 석방이 되었다. 자신을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감사의 표시로 죽을 때 자신의 재산을 네로와 함께 칼리굴라에게 넘긴다고 했고, 그것을 빌미로 칼리굴라는 그의 재산을 대부분 가져갔다. (이후의 역사에서 네로가 황제가 되면서 재산은 다시 돌아온 것?)
# 어머니의 재혼으로 인생 역전?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가 사망하였고, 서기 49년 어머니인 아그리피나가 숙부이자 당시 로마 제국 황제였던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면서 네로는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다. 황후가 된 아그리피나는 아들 네로를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시키면서 네로의 존재감을 높였다.
# 클라우디우스 황제 사망 후 황제로 즉위
당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맏사위이자 인망 높은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를 아들인 브리타니쿠스의 제위를 잠시 맡아놓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브리타니쿠스가 10살이 될 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죽기전, 혼란한 틈을 노린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최측근이자 황제의 측근 팔라스 등과 함께 클라우디우스의 또 다른 측근 세력인 나르키수스 등에게 요양을 베푼다는 석연찮은 이유를 내세워 로마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서기 54년에 양부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후,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인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제치고 황제로 취임하였다. 세네카가 작성한 원로원 즉위 연설이 세네카 특유의 문체와 젊고 잘생긴 금발머리 소년 네로의 외모와 쾌활한 성격까지 결합돼 원로원은 대환영하였다.
# 통제불가능한 황제
소 아그리피나는 권력욕이 대단했지만 애당초 며느리 옥타비아를 만족스러워 했던 터라 자연스레 아들 네로와의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네로는 친구 오토의 아내로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고 밤마다 포파이아 사비나와 잠자리를 가졌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자신들의 더 큰 권력을 쥐고 네로를 장악하기 위해서 아그리피나를 견제해야 했기 때문에 아그리피나의 지나친 정치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네로와 아그리피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그들은 아그리피나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 이후에도 소 아그리피나를 돕던 칼리스투스는 실각했고, 나르키수스는 즉결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후 세네카와 부루스조차 예상치 못한 소년 황제의 방종 속에서 이들조차 조금씩 네로의 행동에 불안감을 갖기 시작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아그리피나는 통제되지 않는 아들 대신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황제가 되었어야 했던 브리나티쿠스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결국 네로는 하수인을 시켜 식사 자리에서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했다. 네로는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마저 자객을 보내 살해했고,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씌운 뒤 외딴 섬으로 유배보냈다가 처형하였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혈육들이 대부분 네로의 손에 사라지면서 네로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그를 계승한 황제들이 받고 있던 유지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후광을 서서히 잃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아서 초기 치세는 겉으로는 꽤나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서기 59년 이후 자제력을 상실하고 점차 통제 불능의 황제가 되어버렸다. 눈치가 빠른 세네카는 가족까지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두려움을 느끼고 고령을 이유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세네카는 65년에 적들에 의해 고발당하고 자살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 기독교 박해
네로의 몰락은 엉뚱한 곳에서 촉발되었다. 64년 로마의 대화재가 일어났을 때 네로는 열심히 화재를 진압하고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네로에 대한 인기가 형편없었고, 네로가 로마를 불질렀다는 유언비어도 돌아다녔다. 결국 네로는 폭군답게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방화사건의 주범으로 기독교를 지목하였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 사실 네로 시대에는 콜로세움이 없었다.
#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의 반란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덱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네로는 게르마니아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행히 루푸스는 빈덱스와 결전을 벌여 반란군을 격파했고, 루푸스에게 패배한 빈덱스는 자결했다. 하지만 빈덱스의 자살 후에도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네로에게 불신임권을 행사한다. 게르마니아 일대 로마군은 그동안 라인 전선에서 명성을 쌓은 루푸스에게 네로를 탄핵하고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했다. 루푸스는 거절했지만 네로는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다.
# 네로의 최후
네로가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 병사들에게 불신임을 받게 되자, 갈바는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에게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압박했다. 황제를 칭한 갈바는 자신을 지지하면 병사 1인당 8만 세르티우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따라서 근위대와 군단병 모두의 마음이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것을 본 원로원들을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이 무렵 네로의 근위대장 중 한 명인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휘하 근위대와 함께 네로를 버리고 갈바로 쪽으로 붙었고, 네로가 믿고 있던 티켈리누스는 네로와 휘하 근위대를 내팽겨두고 야반도주하듯 도망쳐 버렸다. 네로는 68년 6월 8일 로마를 탈출하여 마지막까지 그의 편에 있던 해방 노예 파온(Phaon)의 별장에서 자살하였다.
# 네로에 대한 평가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는 그를 “평균 피에 몸 곳곳에는 점이 있었으며, 악취를 풍겼다. 암갈색의 머릿칼에, 매력적이라기보다는 평범한 풍모였다. 눈은 유약해 보이는 파란색이었고, 목은 굵었다. 배가 나왔고, 다리는 매우 가늘었다”고 그의 외모를 평가했다.
그에게 처음 반기를 든 율리우스 빈덱스, 네로를 연이어 탄핵한 로마군, 프라이토리아니, 원로원이 공통적으로 언급했듯, 네로는 “국고를 파탄내고, 어머니와 아내, 선황의 아들을 살해하고, 국가의 법과 로마시민권에서 보장한 타인의 권리까지 불법, 위법을 동원해 그 미덕까지 박살낸 극악무도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