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투스(Augustus)
- 로마제국 초대 황제(재위 : 기원전 27년 1월 6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
- 출생일 : 기원전 63년 9월 23일
- 사망일 : 기원후 14년 8월 19일
# 평민 아버지, 귀족 어머니
옥타비아누스의 아버지는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로 로마에서 40킬로미터 떨어진 벨리트라이라는 마을 출신의 평민이었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인 아티아 발바 카이소니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딸이었다.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평민이었기에 어머니 아티아가 카이사르의 조카딸로 귀족이었음에도 옥타비아누스는 평민층에 속하였다(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서야 비로소 귀족의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 의붓 아버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기원전 59년 옥타비아누스가 네 살 때, 아버지 옥타비우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후 어머니 아티아가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재혼하였다. 필리푸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손이었고 기원전 57년에는 집정관을 역임하였다. 필리푸스는 어린 옥타비아누스에게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는 누나인 소(小) 옥타비아와 함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나이자 자신의 외할머니인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서 자랐다.
기원전 51년, 율리아 카이사리스가 죽자, 옥타비아누스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때부터 어머니 아티아와 계부 필리푸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단련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제1상속자
기원전 46년, 아티아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히스파니아 원정에 참여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오랜 숙적이었던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와 싸우려 하였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병이 들어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병에서 회복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배를 타고 카이사르의 뒤를 쫓았으나 배는 곧 난파되었다. 육상으로부터 숙련된 정비사들이 와서 난파된 배를 수리한 후 원래 자신이 머물던 적의 영토에서 카이사르의 막사까지 배를 타고 횡단하였는데, 이 사건은 외할머니의 남동생인 카이사르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이것을 계기로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제1상속자로 낙점하였다.
훗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성적으로 총애했기 때문에 입양한 것이라며 강도높게 비난하였지만 중상모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 카이사르 암살 이후 로마로 향한 옥타비아누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훈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군사들과 함께 마케도니아로 피신하라는 장교들의 조언을 거절하고 이탈리아로 가 자신의 잠재적인 정치적 세력을 규합하려 하였다. 카이사르가 죽고 난 뒤 정식 입양된 옥타비아누스는 양부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를 쓰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가 이끌던 정예병과 파르티아를 치려고 모은 군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세력을 넓혔고, 특히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계자임을 강조하며 많은 지지를 얻어냈다. 기원전 44년 6월까지 그는 3천 명의 충성스러운 노련한 병사들을 얻었고 봉급으로 5백 데나리우스를 주었다.
#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와의 만남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과거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만났다. 그리고 독재관 카이사르의 암살자들과 쉽지 않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카이사르의 장례식 때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복수를 외친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암살자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도 많은 로마 시민과 카이사르 옹호자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는데, 그가 카이사르의 신격화 운동에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 갈리아 키살피나에 눈독을 들인 안토니우스
로마에서 인기가 떨어진 데다 집정관 임기도 거의 끝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원래 카이사르의 암살범 가운데 한 명인 데키무스 유니무스 브루투스 알비누스가 다스리다가 안토니우스에 편입된 갈리아 키살피나를 통제할 모든 권한을 자신에에 일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다. 그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전임 병사들로 구성된 자신의 군대를 만들고 있었고, 11월 28일에는 안토니우스 휘하 두 개의 군단을 돈으로 현혹하여 쉽게 격파하였다. 옥타비아누스의 막강한 군사력과 원로원으로부터의 공격 때문에 로마에 있는 것에 위협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갈리아 키살피나로 떠났다.
# 원로원, 안토니우스를 견제하기 위해서 옥타비아누스에게 권한을 부여하다
데키무스 브루투스가 갈리아 키살피나를 포기하기를 거부하자 안토니우스는 무티나에서 그를 완전히 포위하였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각하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는데 원로원에게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키케로의 도움으로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 1월 1일에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추가로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받았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고 곧 옥타비아누스는 당시의 집정관이었던 히르티우스, 판사와 함께 무티나의 포위를 풀러 출병하였다. 기원전 43년 4월 안토니우스군은 포룸 갈로룸 전투와 무티나 전투에서 패배하여 칼리아 트란살피나로 퇴각하였다. 두 집정관이 전사하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의 군대까지 지휘할 수 있게되었다.
# 안토니우스와 타협하고 원로원을 압박하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을 준 후, 원로원은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주려고 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협조하지 않기로 하였다. 심지어 옥타비아누스는 포 계곡에 주둔하면서 안토니우스에 대한 모든 공격적인 대응에 협조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해 7월, 옥타비아누스 휘하 백인대의 사절이 로마로 들어왔고 히르티우스와 판사가 남긴 집정관의 권한을 자신이 전부 받아야 함을 요구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공공의 적으로 천명한 것을 무효화하는 포고문을 발표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 요구가 거절되자 4만 8천명의 8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행진하였다. 그는 기원전 43년 8월 19일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친척인 퀸투스 페디우스는 공동집정관이 되었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
# 제2차 삼두정치 시작
기원전 43년 10월, 볼로냐 근처에서 열린 회담에서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군사독재 체제인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였다. 3명의 집정관은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추방 명령을 내렸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만약 그들이 국외 탈출을 기도하면 그들을 잡아 처형하였다. 3명의 집정관들이 암살자들의 유산과 재산을 몰수하는 동안 암살자들에게 내건 현상금은 로마 시민을 크게 고무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처음에는 추방 명령법을 제정하는 것에 반대하였는데 추방 명령을 받은 자신의 새 조력자 키케로의 목숨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의 키케로에 대한 증오는 매우 커서 결국 키케로도 숙청의 희생자가 되었다. 많은 수의 공화파 원로원 의원이 죽었고 3명의 집정관은 자신의 지지자들로 원로원의 빈자리를 채웠다. 20세기의 역사학자 로널드 사임은 이를 로마 혁명(Roman Revolution)이라 명명하였는데, 이 사건이 구세대 원로원 의원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 세력을 구축하여 뒷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2년 1월 1일 로마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신으로 선포하고 ‘신성한 율리우스’(Divus lulius)라 부르게 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신의 아들’(Divi filius)임을 강조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공격하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28개 군단을 해로로 보내어 그리스에 세력을 모으고 있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다.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의 필리피에서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난 뒤, 로마군은 승리하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자살하였다. 두 번의 필리피 전투 모두 안토니우스군이 로마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 성과를 이용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얕잡아 보이게 하려 하였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필리피 전투 이후, 제2차 삼두정치의 집정관들 사이에서 새로운 영토협정이 맺어졌다. 안토니우스는 갈리아를,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관장하기로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동쪽 이집트로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자신의 상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옛 정부이자 카이사르의 어린 아들 카이사리온의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만나 동맹을 맺었다. 레피두는 아프리카 속주로 가게 되었는데 원래 히스파이나로 가게 되었으나 안토니우스가 방해하고 옥타비아누스를 히스파니아로 가게 하였다.
#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한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와 풀비아
옥타비아누스는 마케도니아 원정 이후 제대할 병사들을 위해서 일단 이탈리아에 남아서 로마 시민들의 땅을 몰수하여 병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추진했던 퇴역병의 정착계획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남동생이었던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당파는 결집하였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풀비아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딸인 클로디아 풀케라와 이혼하기로 결심하였다. 풀비아는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녀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병사들을 길러 옥타비아누스를 치려 하였다. 기원전 40년 초, 루키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응징에 페루시아(오늘날의 페루지아)에서 농성을 끝내고 항복하였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루키우스와 그의 군사들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편 풀비아는 그리스의 시키온으로 유배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루키우스에게 충성하는 많은 지지자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기원전 40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기일을 맞아, 옥타비아누스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의 인사를 루키우스와 공조했다는 이유로 처형하였다. 페루시아도 다른 장군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약탈하고 도시에 불을 질렀다. 이 잔인한 사건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인생을 더렵혔고 흑역사가 되었다.
# 공화파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다
제1차 삼두정치의 집정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승리한 이래, 아직 로마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39년에 제2차 삼두 정치의 집정관들과 협정을 맺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가지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파가 아닌 공화파 소속의 폼페이우스와 동맹을 맺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폼페이우스와 일시적으로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는데 폼페이우스의 부하이자 사위인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의 딸, 즉 폼페이우스의 외손녀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하였다. 스크리보니아는 옥타비아누스의 유일한 적녀인 율리아를 낳았는데, 율리아가 태어난 날은 옥타비아누스가 스크리보니아와 이혼하고 훗날 로마 제국의 초대 황후가 되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재혼한 날이기도 하였다.
#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잠정적으로 화해하다
이집트에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3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기원전 40년에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할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출한, 브룬디시움에 진을 쳤다. 그러나 카이사르파의 중요한 정치적 지지기반이었던 백인대장들이 싸움을 거부하고 그들 위하의 병사들은 백인대장을 따라 전투 중지를 원하였기에 옥타비아누스와 싸움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한편 시키온에서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였는데, 공교롭게 안토니우스가 그녀를 보기 위해 시키온으로 가던 중이었다. 풀비아의 죽음과 백인대장들의 항명은 두 집정관을 잠정적으로 화해시켰다. 기원전 40년 가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브룬디시움 조약에 서명하였는데,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맡기로 하였다. 기원전 40년 말엽,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의 확고한 동맹을 위해 자신의 친 누나인 소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옥타비아는 대 안토니아와 소 안토니아 두 명의 딸을 낳았다.
#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제거하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제해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넵툰의 아들’(Peptuni filius)이라 불렀다. 기원전 36년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치기 위해 합동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53년 ‘카르하이 전투’에서 로마가 파르티아에게 패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파르티아 원정을 계획하였다. 타렌툼 협정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120척의 전함을 주고, 옥타비아누스는 2만 명의 군사를 준다고 약속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약속했던 병력의 1/10인 2천명만 보내주었다)
옥타비아누스를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함대는 기원전 36년 9월 3일 나우로쿠스 전투에서 아그리파의 군대에게 거의 완파되었다. 섹스투느는 남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퇴각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폼페이우스는 안토니우스 휘하의 장군에게 잡혀 처형되었다.
# 레피두스, 삼두 정치에서 물러나다
옥타비아누스와 레피두스는 항복한 폼페이우스의 병사를 손에 넣었는데 머지 않아 레피두스는 자신이 시칠리아를 다스릴 충분한 능력이 된다고 자부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떠나라 명령하였다. 그러나 레피두스의 군대는 자신들이 싸우는데 지치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을 돈으로 유혹하자 옥타비아누스에게 투항하였다.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고 최고제사장의 직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나 삼두 정치 체제에서 쫓겨나고 공직 생활 역시 끝이나면서 이탈리아의 카페 키르케이에 있는 장원으로 유배되었다. 로마의 통치권은 이제 서방의 옥타비아누스와 동방의 안토니우스에게로 양분되었다. 공화국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시민의 재산권을 보장해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전역한 병사들에게 이탈리아 외곽에 자리를 잡게 해주는 사이, 과거 폼페이우스 군대에 참가하기 위해 로마를 떠났던 3만여 명의 노예를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돌아오자 자신과 리비아, 옥타비아의 신변 안전 보장을 원로원에 요청하였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 누이인 옥타비아, 딸인 율리아는 주권면제권을 부여받았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압하다
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게 돌아갔다. 옥타비아누스가 달랑 2천 명의 군사만 보내주었고, 설상가상으로 작전 실패로 인해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도 추락하였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와 결혼한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군사를 보충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전처인 옥타비아를 로마로 돌려보냈고,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인 배우자(옥타비아)를 쫓아내고 동방의 정부(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선동은 로마에서 먹혔고 안토니우스의 인기가 추락하였다.
기원전 34년 아르메니아가 로마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안토니우스는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로 하여금 대아르메니아의 왕 자리에 앉히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들의 여왕’이란 호칭까지 사용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야망을 지녔다고 주장하였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이 발발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자살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잘 이용하여 크게 성공했었기에 다른 사람이 이것을 활용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훗날의 정치 인생을 위해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은 살려주는 대신에 카이사리온은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 공화국 최고 권력자가 되다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비공식적이지만 로마 공화국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르지 않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원하는 것들을 맞춰가며 차근차근 권력을 손에 넣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부터 8년간 해마다 집정관의 자리를 맡았다.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종결되었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적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한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서 로마는 다시 명목상 이전의 공화국 시절의 정치 체제로 회귀한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 황제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제일인자라는 뜻의 국가 제1시민(Princeps Civitati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흔히 ‘프린켑스’라고만 쓰는 이 칭호는 공화국 시대에 지도급 원로원 의원으로 인정받은 집정관 역임자이자 높은 위신과 덕망을 지닌 자를 뜻했다.
대중은 엄청난 양의 부를 아우구스투스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역사학자인 하워드 스컬러드는 아우구스투스의 진정한 권력은 군대와 ‘최종 결재권’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속주의 통치를 부탁했고 아우구스투스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하였다.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이었던 테렌티우스 바로 무레나가 아우구스투스에 대항하려고 했지만 결국 집정관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그 자리를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대신하게 되었다. 피소는 널리 알려진 공화정 지지자였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그와 협력하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늦봄에 아우구스투스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친구인 아그리파와 사위인 마르켈루스가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인장과 군단 통제권을 동료 집정관인 피소에게 위임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황제라고 믿던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잠시 거두게 된다.
건강을 회복한 후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 직에서 사임하고, 구 귀족들에게 집정관 자리에 오를 기회를 늘려주었으며, 전통적인 공화주의자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는 공식적으로 집정관에 취임하지 않더라도 집정관처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그는 귀족 계급으로 호민관에 취임할 수 없었지만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고 죽을 때까지 행사했다.
기원전 12년에는 최고 제사장 ‘레피두스’가 죽은 뒤에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최고 제사장은 종신제인 데다가 단 한 명만 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기원전 2년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으로부터 “국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 군사적 업적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이미지를 승리와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의 칭호에 개선장군을 뜻하는 “임페라토르”를 집어 넣어 “신군 카이사르의 아들인 임페라토르 아우구스투스”(라틴어: 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라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의 북부, 알프스 지역의 라이티아와 노리쿰, 일리리쿰, 판노니아 등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25년에는 왕이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은 갈라티아를 전쟁을 벌이지 않고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기원 19년에는 스페인의 칸타브리아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이 지역은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편입된다.
기원전 17년과 16년에 일리리쿰 총독 푸블리우스 실리우스 네르바가 알프스 산악 지역의 노리쿰(오늘날의 티롤, 스티리아, 잘츠부르크)에 정복 사업을 개시하여, 황제의 의붓 아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완수했다.
기원전 12년에는 알프스 근방에서 군사 행동을 재개하였고,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가 이끄는 군대가 각각 일리리쿰에서 판노니아족, 동부 라인란트에서 게르만족을 공격하였다. 작전은 성공을 거두었고 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가 이끄는 군대는 엘베강에 도달했다. 하지만 얼마 후 드루수스는 낙마하여 죽었고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유해를 로마로 송환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동방을 파르티아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동맹국을 완충 지대로 적극 활용하였다. 동방 방위를 위해 시리아 속주에 군단을 주둔시켰으며, 티베리우스가 파르티아와 교섭을 하였다. 이 협상의 결과로 로마는 기원전 53년에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에 대패를 당했을 때 빼앗겼던 군단기(軍團旗)를 되찾을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대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란 5세를 왕위에 복위시키기도 했다.
파르티아가 언제나 위협적인 상대이기는 했지만, 실제 전쟁은 게르만족을 상대로 대부분 라인강, 도나우강 근교에서 벌어졌다. 안토니우스와 최종 전투를 벌이기 전에 달마티아의 부족들과 벌였던 전쟁 이후 로마군은 착실히 도나우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화하는 데 실패하였다. 서기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당한 참패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게르마니아의 총독인 바루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케루스키족 출신의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에게 전멸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티베리우스는 이후 여러 차례 라인란트로 진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죽은 후에 계승자인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라인강과 도나우강을 주 방어선으로 삼아 방위 체계를 구축한다.
노란색은 기원전 31년 영토, 녹색은 아우구스투스 때 얻은 영토, 분홍색은 동맹국
# 후계자 문제
아우구스투스는 정치 체제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은 이를 대중에게 알리려 하였다. 로마의 시민들, 특히 원로원 계급이 갖고 있는 군주제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를 추진한다. 기원전 25년에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자신의 딸인 율리아를 결혼시켰다. 하지만 마르켈루스는 기원전 23년에 2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16살의 나이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혼인시켰다. 아그리파 부부는 아들 셋, 딸 둘, 총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얼마 후, 아그리파는 5년 기한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제국의 동방을 담당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만 가지고 있었던 “호민관 특권”도 부여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양자로 삼는다. 이 두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로 기원전 5년과 기원전 2년부터 정치적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가 데려온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도 아꼈다.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와 결혼했으며, 기원전 12년에 아그리파가 죽고 나서는 티베리우스 부부를 이혼시킨 후 티베리우스를 미망인이 된 율리아와 결혼시켰다. 하지만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사망하고,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6년부터 로마 제국의 통치를 분담하였지만 얼마 후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 버린다.
서기 2년과 4년에 루키우스,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차례로 요절하였다. 서기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5년 기한의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았고,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맞아들였다.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 평정과 일리리쿰, 달마티아 반란을 진압하였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밑에서 착실히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방만한 행실로 인해 7년에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후계자로 삼을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13년에 아우구스투스가 가진 모든 특권을 부여받는다.
14년 8월 19일에 아우구스투스는 놀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에 건강이 갑자기 나빠지자 티베리우스를 소환해 밀담을 나누었다. 얼마 후, 황후 리비아의 품에 안긴 채 평온하고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티베리우스는 아들인 드루수스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의 추모 연설을 하였다. 이후 마르스 광장을 지나 아우구스투스 영묘 앞 광장에서 유해를 화장하였고, 영묘에 묻혔다. 얼마 후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