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AD 193)
- 로마 제국의 제19대 황제
- 재위 : 193년 3월 28일 ~ 193년 6월 1일
- 출생일 : 133년 1월 30일(디오 카시우스) / 137년 2월 2일(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 사망일 : 193년 6월 1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는 로마 제국의 열아홉 번째 황제이다.
[부유한 원로원 가문]
부친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디디우스 세베루스는 본국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밀라노 출신, 어머니 아이밀리아 클라라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다. 훗날 제위 경쟁자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세베루스 가문 출신이다. 부계는 대대로 밀라노의 지역유지였고, 어머니는 북아프리카 속주 출신이지만 일찍이 로마인이었고 집정관을 배출한 원로원 가문 여인이었다고 한다. 위로는 두 형이 있었으며, 성년 이후 비슷한 계급 여성인 만리아 스칸틸라와 결혼해 슬하에 외동딸 디디아 클라라가 있었다.
[군단 경험과 속주 총독을 경험하다]
172년경에는 제국 최정예군단 중 하나인 게르마니아 주둔 22군단장에 올랐고, 3년 뒤에는 페르티낙스와 함께 나란히 파트너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후에도 그는 어린 시절 황제의 어머니 집에서 자랐던 덕에 달마티아, 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총독을 지낸 뒤, 이후 비티니아 총독을 거쳐 카르타고에서 총독 사무를 볼 수 있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됐다. 특히, 그는 페르티낙스의 후임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되었다고 한다.
[콤모두스 황제 암살 이후 혼란의 상황]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부유한 원로원 의원으로 콤모두스 황제에게 추방당했다. 이후 콤모두스 황제는 192년 12월 31일에 살해당하고 페르티낙스가 제위에 올랐으나 페르티낙스도 193년 3월 말에 레토가 이끄는 황실 근위대에게 살해당했다.
[경매를 통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이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장 레토와 1만 명의 근위대의 추대를 받아 페르티낙스의 장인 플리비우스 술피키아누스와 겨루어 승리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새 황제를 정하는 일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황제 후보자가 원로원 회의장도 아닌, 근위대 진지에 나타나 일종의 경매 방식을 통해 군사들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입찰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더 웃긴 것은 이때 근위대는 이를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제위 경매에 관한 공고문을 벽에 붙여 놓았다.
따라서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사위들인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이런 행태에 혀를 내둘렀고 개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건국 이래 개판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제위를 원한 이들은 있었고 경쟁은 치열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두 명의 경쟁 후보가 남게 됐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3]였고, 두 번째 후보는 유력한 전직 집정관이자 상당한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리고 경매방식으로 의논된 새황제 최종후보는 결국 군인들에게 막대한 보너스를 약속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로 선택했다. 그런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행동은 디오 카시우스의 당시 현장 목격담에 따르면, 매우 비양심적이고 저급했다고 한다. 또 그는 상대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술피키아누스를 뽑는다면 자기 손으로 페르티낙스 모살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그들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속주 총독들이 제위 쟁탈전에 가담하다]
황제에 오른 율리아누스는 경쟁자 술피키아누스에게 어떠한 정치적 보복도 하지 않았고, 페르티낙스와 달리 무리하게 콤모두스 시대와의 절연을 외치며 로마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티낙스의 죽음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즉위과정, 사회 분위기는 야심있고 능력있는 속주 총독과 군사령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됐다. 따라서 국경 지역 주둔군을 휘하에 거느린 3명의 경쟁자 간의 제위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총독이 4월 중순에 시리아의 4개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받고 안티오키아를 임시수도로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라고 자처했다.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자처했다. 그러나 좀 더 강력한 후보자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냉혹하고 영리한 정치가인 그는, 니게르가 먼저 황제를 참칭한 것을 알아챈 이후 가장 적절한 시점을 정해 16개 군단을 비롯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주둔군 전체의 지지를 얻어낸 다음 황제를 자처했다.
[로마로 향하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페르티낙스가 죽은 지 2주가 채 되지 않은 4월 19일, 세베루스는 지금의 빈 근처에 있는 카르눈툼에서 자신의 본부에 주둔 중인 군단으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게 했다. 그는 즉시 로마를 향해 진군을 준비했지만 우선은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협정을 맺고 그의 지원을 얻기 위해 그에게 카이사르 칭호를 주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협상을 시도하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즉위 후, 전임자를 살해한 근위대장 라이투스를 제거하지 않다가 뒤늦게나마 처형했는데 이 부분도 그의 근위대 장악능력을 확실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설상가상 세베루스를 살해하기 위해 암살범들을 보내기도 했지만 밀착 경호를 받고 있는 세베루스의 보안을 뚫지 못했고, 민중들은 세베루스 진군 직전 니게르를 공동황제라도 올리던지 하라고 항의도 받았다. 그리고 이런 위기 속에서 율리아누스는 마지막 절망적인 조치로 원로원에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공동 통치자로 임명할 것을 요청했지만, 로마 가까이 오고 있던 세베루스로서는 권력을 나눠 가질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원로원에게 버림을 받다]
193년 6월 1일 원로원은 율리아누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세베루스를 황제로 임명했으며, 페르티낙스에게 신성한 영예들을 수여했다. 관리가 형을 집행하러 갔을 때 율리아누스는 모든 이에게 버림받아 홀로 된 채, 울고 불고 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 처형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율리아누스는 죽기 직전에 “그런데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단 말인가? 내가 누굴 죽였단 말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불과 2개월 만에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온 판노니아(도나우) 사령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그의 66일의 짧은 치세는 막을 내리고, 곧이어 시작된 세베루스 왕조에 의해 로마는 얼마간 안정을 되찾게 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비참하게 처형됐지만, 그래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또다른 정적들인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와 달리 그의 유족들인 아내와 외동딸에게 시신을 인도하고 정식장례를 치룰 수 있게 해줬다.
[가족 관계]
- 부친 : 퀸투스 페트로니우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 모친 : 아이밀리아 클라라
- 배우자 : 만리아 스칸틸라
- 자녀 : 디디아 클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