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93~211)
- 로마 제국의 제20대 황제
- 재위 : 193년 4월 14일 ~ 211년 2월 4일
- 출생일 : 145년 4월 11일
- 사망일 : 211년 2월 4일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Lucius Septimius Severus)는 로마 제국의 20대 황제로 아들 카라칼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면서 로마 황제 자리의 세습제를 사실상 시작한 황제이다. 오늘날에는 학자들에게 4세기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정) 체제의 원형을 제공한 황제이자 군사전제정 체제의 교과서를 제공한 전제군주의 시초, 또는 2세기 동안 누적된 문제 해결에 노력해 반세기 이상 쇠퇴를 막아낸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베루스 가문]
그의 부계는 셉티미우스 씨족 가문의 지파 중 하나인 세베루스 가문이다. 로마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 들을 때, 생소하게 들리는 이름처럼 세베루스 황제의 성씨인 셉티미우스는 이탈리아와 로마 내 로마인들에게도 매우 생소한 희성이다. 그 어원은 로마인들이 많이 애용하지 않은 개인이름(프라이노멘) 셉티무스에서 파생됐다. 이 가문이 로마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공화정 말 형사재판에서 판사를 맡은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가 처음이며, 그 다음으로 등장한 인물은 폼페이우스를 이집트에서 배신하고 죽인 백인대장 셉티미우스이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유명인물은 아우구스투스 사후 게르마니아에서 벌어진 반(反) 티베리우스 항명사건 당시, 폭도로 변한 부하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게르마니쿠스 모욕을 막으려다가 암살된 수석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를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네로의 악랄한 근위대장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가 네로가 자살한 후 갈바가 아직 로마에 입성하지 않았을 때 “나는 사실 가이우스(통칭 : 칼리굴라) 황제의 사생아다”며 반란을 유도할 당시 그 주장이 거짓말인 것을 밝혀내 내란 위기를 막아낸 근위대 백인대장 셉티미우스도 이 가문 내에서 유명했다.
셉티미우스 가문 사람 중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이는 기원전 74년 치안판사를 지낸 셉티미우스 스카이볼라 정도라고 하며, 그 다음으로 유명한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친척어른인 전직집정관 셉티미우스 아페르 형제와,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먼 친척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고 한다.
모계의 경우에는 본국 이탈리아 혈통이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집안으로, 고대 로마의 유명한 씨족 가문인 풀비우스 가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외가쪽 친척들이 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의 외사촌으로는 동향 친구이자 최측근이며 사돈관계를 맺게 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가 있었다. 한편 세베루스의 첫 아내인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 역시 렙티스 출신의 이탈리아 혈통이었다.
[162년] 처음으로 공적 경험을 시작하다
162년 처음으로 공적 경험을 시작했고 이 무렵 이미 이탈리아로 건너온 뒤 재정착했던 일가 친척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원을 받은 뒤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셉티미우스를 추천하면서 마르쿠스 황제에게 원로원 의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60년대 동안 세베루스의 공직 경험은 이후 경력과 달리 평범했고 아직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변호사 일도 병행했는데, 25살 이후 공직 최소연령이 지난 뒤 본격적으로 명예로운 경력을 경험하기 전 하필 로마와 제국 전체를 휩쓴 안토니누스 역병이 퍼졌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안전한 렙티스 마그나로 잠시 피신해야만 했다.
[191년]
세베루스는 사촌형의 도움으로 히스파니아 속주에서의 군경력과 이때의 경력을 바탕으로 호민관과 법무관을 지냈으며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총독을 맡았다. 그러다가 191년에는 제국 서방 방어와 도나우 방어선에서 중요한 속주인 상 판노니아의 총독을 맡았다. 총독 임명에는 실력보다는 같은 아프리카 출신인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의 영향력이 더 컸다는 말도 있지만 그는 제국에서 실력과 경험 모두 평가가 훌륭한 장군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황제였던 콤모두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삼촌과 사촌형의 소개 아래 동향 출신의 파카 마르키아나(Pacca Marciana)와 결혼했고, 사이에 두 딸을 얻었는데 두 딸 모두 요절했고 아내마저 186년경 병으로 잃었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후계를 얻기 위해 재혼을 결심했는데, 이때 예비신부 후보들이 들어오면 운세를 보고 판단했고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세베루스 왕조 시대동안 가공할 만한 황후 율리아 돔나였다.
[콤모두스 암살 이후 혼란기에 황제를 자칭하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내란에 일어나 뒤를 이은 페르티낙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살해당하자 황제를 자칭하였고 뒤이어 시리아 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자칭하였다.
세베루스의 판노니아 군이 이탈리아로 향할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이끄는 판노니아 군단병들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생전부터 오랜 전쟁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최정예였다. 이런 군단병들이 세베루스의 신속한 결정에 따라 무지막지한 군세로 로마로 진격하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페르티낙스 암살를 주도한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를 반역죄로 처형한 뒤 툴리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플라비우스 게니알리스를 새 근위대장들로 임명했다. 이는 뒤늦은 민심 수습이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같은 동향 출신으로 세베루스를 콤모두스 시대동안 밀고 끌어준 라이투스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편에 선 뒤, 그와 공모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알비누스와 연합하여 로마로 입성하여 율리아누스를 제거하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에게 근위대장 중 한명인 크리스피누스를 파견해 공동황제를 제안했다. 하지만 세베루스는 그와 공동황제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율리아누스의 제위 등극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티낙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본인이 황제를 참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베루스는 이런 뜻을 확고히 전달한다는 의미로 파견된 크리스피누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 율리아누스와 원로원에게 공동황제 제안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7대 군단 4만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알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는 조건으로 연합하고 12개 군단 7만 2000명 중 2개 군단을 본국으로 내려보내 율리아누스를 살해하고 로마에 입성해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니게르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다]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기사계급 출신으로 세베루스와 마찬가지로 직계 내에서는 본인대에서야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 출신이다. 그는 탄탄하지만 평범한 군대 경력을 거쳐 189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191년에는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니게르는 사실 문무 전반에서 오랜 경력을 자랑한 전형적인 2세기 당시의 원로원 신참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절 황제령 이집트에서 오랜 행정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콤모두스 치세 초기에는 다키아 일대에서 도나우 일대 군단을 이끈 군경력도 가진 베테랑이었다. 이 사람 역시 페르티낙스가 살해되자, 193년 4월 13일 시리아 군단 병사들에 의해 선포됐는데 세베루스보다 먼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세베루스가 4일 전 먼저 제국의 황제 칭호를 참칭했다고 한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8개 군단 4만 8000명의 동방 군대를 이끄는 니게르와 내전을 벌여 193년 말에 벌어진 페린투스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194년 1월 니카이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0월 이수스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니게르를 대파하고 추격대를 보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살해했다.
[알비누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단독 황제가 되다]
195년 말. 세베루스는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음을 선포했다. 쉽게 말해서 대가 끊긴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에 황제의 정통성과 권위 향상을 위해 셀프 양자입적한 것인데, 이때 원로원과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된 행동은 세베루스 자신의 정통성 강화를 위해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적통 콤모두스를 신격화시키고 기록말살형을 철회시킨 것이다. 여기에 더해 명망있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후예임을 자처하기 위해서, 훗날 카라칼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장남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Septimius Bassianus)의 이름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로 바꿨다. 그리고 어린 카라칼라가 겨우 7살의 나이임에도 ‘카이사르’의 칭호도 하사했다.
세베루스 부자의 네르바-안토니누스 계보 참칭 선언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과 각 군대에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달라”고 재차 요구했다. 따라서 싸울 수 밖에 없음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196년 브리타니아 속주에 주둔 중인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갈리아로 건너갔다.
세베루스는 새 법령들을 통과시키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면서 그 해에 많은 시간을 로마에서 보냈지만, 원로원이 아닌 군을 이용해 알비누스를 ‘로마의 공적’으로 선포하는 새로운 방식의 권위 확보에 치중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197년 1월이 되어서야 옛 동지인 알비누스와 마지막 대전을 치르기 위해 길을 떠났다. 결정적인 전투는 197년 2월 19일 루그두눔(지금의 리옹) 외곽에서 많이 벌어졌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양군은 총 15만명이었다고 하며 오랫동안 결과를 예측하기 힘든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베루스군이 우세해졌는데, 전투 도중 세베루스가 말에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이는 세베루스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히 그는 재빨리 황제의 의복을 찢어서 정체를 숨겼고, 때맞춰 기병대가 도착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알비누스의 군대는 결국 패배하였고 알비누스는 루그두눔으로 달아났지만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베루스는 벌거벗겨진 알비누스의 시신을 땅에 내려놓고 그 위로 말을 달려 시체를 훼손했으며, 알비누스의 시신을 수습해 목을 자르고 머리를 로마로 보냈다. 이때 그는 원로원을 조롱하고, 협박하는 서한을 보내며 원로원 내 배신자들에게 명확히 경고했다.
내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 제거 이후, 상당히 잔혹하고 무례한 행동을 벌여 큰 질타를 받았다. 왜냐하면 그는 알비누스의 가족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용서해줬다가 마음을 바꿔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일가를 모조리 살해했기 때문이다. 이때 세베루스는 알비누스의 아내, 아들들의 시신을 알비누스의 몸통과 함께 론 강에 던져버리게 했는데, 더 문제가 된 것은 루그두눔을 무참히 약탈한 행동이었다고 한다.
[정적을 제거하다]
197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원로원이 동료 의원을 직접 재판할 수 있는 특권을 박탈했다. 이어서 세베루스의 숙청 리스트에 오른 29명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반역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는 유죄 판결을 내려 사형시켰다. 여기에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으로 제위를 돈으로 살 뻔 했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세베루스는 율리아누스와 본인이 연달아 호의를 베풀고 그 지위를 보장해줬음에도 두 황제에게 그 은혜를 역으로 갚은 술피키아누스를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베루스는 197년 정적들을 대거 숙청할 때, 술피키아누스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지지자 중 한 명으로 기소해, 유죄판결을 내린 뒤 곧바로 처형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권력 기반 : 군대의 힘]
원로원 대신 군인들의 힘을 기반으로 권위를 확립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에게 군대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들들에게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치세기 동안 군대 개혁을 착실히 진행시켰다. 따라서 로마군과 보조군들을 점점 항구적인 지역 방어군, 농민군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30개 군단 수를 33개로 증설했으며, 군단 자휘관들을 원로원 출신들에서 기사계급이나 전문 군인들로 바꾸기 시작했다. 또한 병영 기지를 쾌적하게 만드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동안 황제령으로 금지되었지만 사실상 행해지고 있는 몇 가지를 허용해줬다.
[파르티아 원정]
세베루스는 여러 정적과 외적을 격파하고, 군과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며, 자신과 세베루스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킬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 인물로 분류된 인사들을 색출하고 일부 속주들을 여러 개로 나눠 힘을 분산시켰다. 동시에 두 번째 결혼으로 맞이한 시리아 출신의 율리아 돔나 사이에게서 얻은 두 아들 카라칼라, 게타를 일찌감치 부제에 앉혀 후계 구도도 명확히 하는 등 얼마간의 안정을 이룩한다. 그 후에 그는 군사 원정을 떠났다. 이번 적은 로마의 주둔 기지를 위협하고 동방 속국들의 왕들을 위협하는 파르티아인들이었다. 앞서 벌인 원정은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세베루스는 그렇게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원정에서는 진지했다.
메소포타미아 북부로 들어간 세베루스는 군사를 함선에 싣고 유프라테스 강과 육로를 거쳐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으로 진군했다. 크테시폰 점령은 197년 말에 이루어졌다. 세베루스는 5년간 동방에 머물렀는데 처음 2년간은 새로운 식민지를 편성하고 중요한 무역 도시인 하트라(Hatra)를 점령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로마군은 하트라는 끝내 점령하지 못했다. 이후 세베루스는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돌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미라를 보고, 나일 강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피라미드와 테베의 신전들을 방문했다.
[친아들 카라칼라와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의 갈등]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202년 여름에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56세 정도였다. 로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도 꽤 고령이었다. 심각한 통풍으로 고통을 겪던 그는 이미 198년 초에 친아들 카라칼라를 아우구스투스 직위로 올려줌으로써 제위 계승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로 돌아오자마자 아들의 결혼 상대로 동향친구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를 선택했다. 근위대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북아프리카의 렙티스 마그나 출신으로, 동향친구인 황제 세베루스의 지지와 도움으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얻었다. 그는 황실 근위대장 자격으로 모든 전쟁에 황제와 동행했다. 그래서 그와 세베루스가 한때 연인 관계였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아내와 장인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3년 후인 205년 1월 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어느 설명에 의하면 카라칼라가 세 명의 백인대장을 설득하여 플라우티아누스를 음해하는 거짓 정보를 보고하게 했다. 그들은 조상들을 위한 축제가 끝난 후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저녁 식사 직전에 세베루스 황제에게 가서 플라우티아누스가 자신들과 다른 일곱 명의 백인대장들에게 세베루스와 카라칼라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말했다. 무엇이 진실이든 간에 플라우티아누스는 즉시 살해되었고 시신은 거리에 내팽개쳐져 민중의 야유를 받게 되었다. 이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쿠리아 의회를 소집한 뒤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자신이 그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했다.
카라칼라는 장인 플라우티아누스가 기록말살형에 처해지고 모든 이름이 비문에서 지워진 직후, 아내 플라우틸라를 완전히 죽여버리려고 했다. 그럼에도 세베루스 부부는 더 이상 이 사건을 질질 끌고 싶어하지 않아,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카라칼라의 아내)을 리파리 섬으로 유배보내는 선에서 서둘러 사건을 종결시켰다.
210년부터 칼레도니아 전역 제패를 목표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다가 211년 2월 4일 에부라쿰에서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죽었다.
세베루스는 키는 작지만 강인했다. 결국에는 통풍 때문에 몸이 매우 쇠약해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열정적이고 원기 왕성했다. 학식 면에서는 자신이 배운 것 이상을 원했으며 이 때문에 생각은 많아도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았고 적에게는 아주 가혹했던 그는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 주의를 기울였지만 자신에 대해 하는 말들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디오 카시우스, 77. 16]
[가족 관계]
- 부친 : 푸블리우스 셉티미우스 게타
- 모친 : 풀비아 피아
- 배우자 : 파키아 마르키아나, 율리아 돔나
- 자녀 : 카라칼라, 게타(율리아 돔나의 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