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9일 토요일

[로마 제국] 제21대 황제 : 카라칼라(Caracalla, 211~217)

카라칼라(Caracalla, 211~217)

 

  • 로마 제국의 제21대 황제
  • 재위 : 198~ 21748일 (단독통치 : 211~217년 4월 8일)
    공동통치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198~211), 게타(210~211)
  • 출생 : 18844
  • 사망 : 21748

 

세베루스 왕조 출신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율리아 돔나의 장자였다. 카라칼라(Caracalla)란 본명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다.

 


본명은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바시아누스((Lucius Septimius Bassianus)인데 아버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안토니누스 가문에 셀프 입적하면서 바꾼 이름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그리고 황제 즉위 후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세베루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 였다. 그러므로 황제로서 공적인 통칭은 세베루스 안토니누스이고, 살아생전 공식적으로 안토니누스라고 불렸다. 이런 이유로 당대 고대 기록을 보면, 본명인 바시아누스, 제호로 취한 세베루스 안토니누스나 안토니누스가 별칭 카라칼라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196]

 

카라칼라는 정식으로 카이사르 칭호를 받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카이사르로 추가 개명했다. 그 해 생일에는 임페라토르 칭호를 부여받았고, 다시 한번 안토니누스 가문 남성에 배속됐다.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어거지로 장남 카라칼라를 셉티미우스(혹은 세베루스) 가문에서 안토니누스 가문으로 공식 편입한 조치였는데, 정치적 정당성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 커서, 세베루스 부자의 사후 입양 추가 조치는 여론이 반반인 제국 내 내전상황과 수습 속에서 세베루스 진영 결집 선언과 똑같았다.

 

[198] 공동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198, 카라칼라에게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하고, 128일부터 공동황제(Co-augustus)이자 정식 황제로 지명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710월에 있었던 크테시폰 전투에서 승리한 후 파르티아의 수도 크테시폰을 성공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 아버지 세베루스는 카라칼라에게 호민관 특권까지 내렸다. 이로써 카라칼라는 일찌감치 공동황제가 됐다.

 

[199]

 

199년 카라칼라는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들판 형제 사제단) 12인 중 한명으로 지명됐다. 이는 카라칼라가 암살되거나, 망명하더라도 그 칭호를 받는 이상, 기록말살형의 불명예는 피할 수 있다는 조치였다. 더욱이 이 직책을 통해 카라칼라는 제국의 모든 영예를 손아귀에 넣게 됐다. 한편 이해 말, 카라칼라는 불과 11살의 나이에 국가의 아버지칭호를 부여받았다.

 

카라칼라는 어린 시절, 상당히 명민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부모님에게 공손한 아이로 큰 사랑을 받았고, 냉혹하기로 이름난 세베루스 황제 역시 이런 장남을 무척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화는 모두 성년식 직전까지의 바시아누스 모습이었고, 이후부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세베루스는 애당초 아들에게 잡아먹힐 성격도 아니고, 본래부터 한 성격하는 사람인지라 카라칼라를 제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어머니 돔나는 커갈수록 자신에게 반항하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장남과, 이런 형의 태도에 격렬히 반발하며 형과 크게 싸운 게타 틈바구니에서 마음 고생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세베루스는 두 아들 중 카라칼라의 연년생 동생인 게타를 더 예뻐했고, 어머니 돔나 역시 재주와 재치 모두 형보다 뛰어난 게타를 아꼈다고 한다. 형제의 대립과 카라칼라의 큰 결점, 게타가 자연스레 쌓게 된 인망 등은 세베루스 황제 부부에게 큰 인상을 줬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게타에게 209년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하사한다. , 게타에게 후계자의 기회들을 단순히 주지 않고, 아예 또 다른 공동황제로 삼아 차기 황제로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결정이 본래부터 원수지간에 가까울 정도로 사이가 나쁜 동복형제를 서로 정적으로 만들고 만다. 특히 본래부터 게타는 형 카라칼라보다 잘생긴 외모를 가진데다, 목소리가 훌륭했고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대단해 저절로 인망이 쌓이는 와중에, 반항적인 형의 태도를 형한테 자주 지적해 서로 사이가 무척 나빴다고 한다.

 

[204]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생전, 카라칼라는 아버지의 동향친구이자 할머니의 조카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Gaius Fulvius Plautianus)의 딸인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Publia Fulvia Plautilla)와 결혼했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는 근위대장인 자신의 권력을 남용해 온갖 비열하고 잔인한 행동과 악행, 폭력 등으로 사람들의 신망을 얻지 못한 위인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었다.

 

카라칼라는 이 결혼을 반기지 않았고, 장차 황제가 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될 장인과 아내 모두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24월 결혼식을 올린 이후 아내와 식사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려고 했으며, 자신이 정권을 잡으면 둘 다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결혼 생활 중 204년 딸을 한 명 얻었다. 그러나 이후 기록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딸의 언급이 없는 것을 봤을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권력을 놓고 다툰 카라칼라와 플라우티아누스 부녀의 갈등은 205122일에 극도로 악화되었다. 사료마다 다르지만 이들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카라칼라가 평소 그들을 죽여버리겠다고 일갈한 발언이 플라우티아누스 귀에 직접 들어가면서였다고 한다. 플라우티아누스 쪽은 카라칼라를 없앨 계획을 세웠고, 카라칼라 역시 처가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명을 내렸다.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까지 암살하려고 했다는 죄로 플라우티아누스는 아들과 함께 황궁에 비무장 상태로 왔다가 체포돼 즉시 교살됐다.

 

[205]

 

2051, 카라칼라는 죽은 플라우티아누스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인 플라우틸라를 리파리 섬으로 추방했다. 결국 카라칼라는 아버지가 죽은 2112월 제위에 오른 뒤 동생 게타를 1년도 못 되어 살해한 다음 사람을 보내 추방시킨 아내를 죽여버렸다.

 

[211]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죽다

 

24일 브리타니아 로마군 병영이 있는 에부라쿰(현재의 영국 요크)에서 65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때 론디니움(런던)에 머물고 있던 게타는 평소 효자로 이름난 사람답게,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에부라쿰까지 달려가 며칠 밤 아버지 곁을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삼부자는 처음으로 한 막사 안에서 같이 머물게 됐는데, 이때 세베루스는 숨이 끊어져가는 상황에서 서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다.

 

세베루스가 죽자, 카라칼라는 남은 칼레도니아 원정을 중지시키고, 로마군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남으로 철군시켰다. 이후 카라칼라는 로마로 귀환하기로 결정했으며 동생 게타 등과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경쟁한다.

 

[212] 동생 게타를 살해하다

 

카라칼라는 게타가 지지자들의 밀착 경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2122월 저녁, 게타가 율리아 돔나와 함께 있는 때를 틈타 백인대장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고 들고가서 직접 그를 살해했고 근위병들을 시켜 동생을 경호하는 지지자들까지 모두 죽여버렸다. 이때에 관해, 황실 사람들과 교류를 하여 상황을 알고 있던 디오는 카라칼라가 저녁에 어머니 눈 앞에서 칼로 동생의 복부를 마구 찔러 죽였다고 하며, 놀란 어머니에게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해서 그런 거라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고 한다. 그는 죽은 동생 게타의 생일 기념일을 없앴고, 212년 원로원에게 게타의 기록말살형을 추인할 것을 요청해 죽은 친동생을 기록말살형에 처하게 만들었다.

 

카라칼라는 신변안전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근위대를 찾아가 자신이 하마터면 동생의 손에 죽을 뻔했기에 그를 죽였고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이때 군인들은 그를 의심했지만 카라칼라가 많은 선물을 내리고 급료를 대폭 올린다는 약속을 했기에 일단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이렇게 그날 저녁 근위대를 자신의 편으로 일단 돌려 놓은 카라칼라는 다음 날, 원로원에 나타났다. 이때 그는 어머니, 근위대 앞에서 그랬듯이 게타가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주장을 반복하며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해명했다.

 

카라칼라의 잔인함과 부도덕함을 더 질타받게 한 사건은 211(혹은 212) 전직집정관 가이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아페르가 죄를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살해된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오촌동생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적극 추천해주고, 세베루스가 정치적, 사회적 위기에 빠진 순간마다 진심을 다해 그를 도운 집안어른이자 은인으로, 카라칼라에게는 몇 없는 남자친족이면서도 그의 제위를 지켜줄 유력인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인 직후부터 이런 것을 무시하며, 더 강하고 잔혹한 공포심을 심어주는 명령을 계속 내렸다. 따라서 세베루스 아페르 부부는 고령의 노인들임에도 자신들을 체포하려고 카라칼라 병사들이 집안에 들어 닥치자 자택 옥상에서 몸을 던져 부부가 함께 목숨을 끊었다.

 

카라칼라는 아내 푸블리아 풀비아 플라우틸라도 처형시키도록 명령했다. 이때 카라칼라는 아내 풀비아 플라우틸라가 확실히 죽은 것을 확인하겠다며 그녀의 머리를 가져오게 하고 이를 직접 확인했다.

 

[화폐 개혁과 안토니우스 칙령]

 

카라칼라가 군심을 잡기 위해 무리해서 군인들의 연봉을 500데나리우스에서 750데나리우스로 인상시킨 조치는 국고의 일시적 고갈로 이어졌다. 따라서 카라칼라는 급히 세금을 인상해 징수케 하고, 부자들이 내는 상속세와 노예해방세를 무려 2배나 인상해 강제 징수했다(상속세 공제범위도 없어지고 무조건 내게 바뀌었다). 그럼에도 이는 국고 고갈 해소에 큰 도움이 도지 못했는데, 카라칼라는 통화 가치를 약간 절하하는 방식의 새로운 화폐 안토니니아누스(Antoninianus)를 발행하기에 이른다.

 

이어서 카라칼라가 취한 가장 역사적이고, 이후 로마의 역사를 뒤집어 놓은 조치인 안토니누스 칙령(Constitutio Antoniniana)이 발표됐다. 그는 이 칙령을 발표하면서, 제국 내 모든 자유인들에게 동등히 시민권이 확대, 부여하고 그들에게도 로마 시민들이 부담하는 권리와 의무를 지게끔 했다. 다시 말해서 이 법으로 로마 시민권의 메리트는 사라지고, 본국 이탈리아 주민들과 속주민들, 로마 시민권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유민들, 도시 시민들과 농촌 농민들의 관계가 동등해지게 만든 것이다. (현대 학계에서는 카라칼라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후기 로마-동로마로 이어지는 차별 없는 로마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 성립에 기여하고 시민-속주민 구분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로마법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 또한 상당하다)

 

[막장으로 돌입하다]

 

카라칼라는 과대망상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했고, 본인 스스로를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로 여겨 그가 했다는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했다. 무기와 갑옷 등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입었거나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들었다면, 거액을 들여 사들이게 했다. 사생활 역시 콤모두스가 망가진 이후 보여준 것처럼 사치스럽게 변했고, 카라칼라 곁에는 권세를 위해 아부하는 무리로 넘쳐 났다.

 

카라칼라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병사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부자들은 막대한 재물을 그에게 상납하라고 강요했다. 조금이라도 부를 축적하면 연례행사처럼 삥을 뜯었고, 황제 측근들에게 내려진 선물 역시 그들에게서 강탈한 재물로 구입해 충당했다. 이에 신흥귀족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문예 후원가 고르디아누스 1세는 일시적으로 은퇴하는 척 하고는, 안토니니아스로 알려진 카라칼라 찬송 장편서사시를 손수 저술해 위기를 넘겼다.

 

더 큰 문제는 카라칼라의 분노 조절과 종잡을 수 없는 변덕이었다. 디오에 따르면 이는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서 물려받은 시리아인들의 잔혹함 때문이라고 하는데, 디오의 주장이 편향적이고 과장적이긴 해도 카라칼라의 만행은 로마인들을 벌벌 떨게 했다. 여느 황제도 하지 않던 행동들, 가령 콜로세움에서 경기가 열리면 동냥을 하려고 온 빈민들에게 호된 채찍질을 해서 모조리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황제가 원로원과 부자들을 협박해 내기를 강요한 다음, 게임에서 진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내보내 굴욕을 줬다. 이때의 일에 대해, 디오는 카라칼라가 내기에서 진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내려보내면서 거지 복장을 입게 하고, 동냥하는 연기를 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관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들이 관객들에게 노예들이나 할 법한 충성 맹세를 하도록 강요하고 채찍질까지 퍼부어 모욕감을 줬다. 당연한 말인데, 카라칼라는 이를 흡족해하며 지켜봤다.

 

이렇게 되니 213년 초, 카라칼라는 더 이상 로마에 머무르기 불편했다. 로마 전체는 그를 증오했다. 원로원과 부자, 장교, 일반 병사 중 양심 있는 이들은 카라칼라라면 이를 갈았다. 주변 동맹국 부족장들과 아르메니아 왕도 알았을 정도로 카라칼라의 잔혹함과 기행은 유명했다. 다행이라면 아버지 생전부터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를 작살낼 때부터 함께해온 측근 무리가 그를 지켜주고 있었고, 어머니 돔나는 카라칼라가 내치를 방치한 것을 모두 처리해 나라는 어느 정도 괜찮게 굴러갔다.

 

[213] 북부 지역을 순찰하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완성했다.

 

213년 여름, 로마는 아그리 데쿠마테스(Agri Decumates) 지역과 라인란트 국경 양쪽에서 게르만 부족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원로원은 이러한 승리에 감동하여 카라칼라에게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칭호를 수여했으며, 게르마니아 방벽을 넘어선 예방전쟁을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파카토르 오르비스(Pacator Orbis : 지상에 평화를 가져온 자)’라는 존칭을 얻었다. 하지만 카라칼라는 이런 존칭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원로원에게 자신을 위한 금으로 만든 왕관을 바칠 것을 명령했다.

 

[214] 소아시아로 향하는 카라칼라

 

카라칼라와 수행원들은 동쪽으로 길을 떠나 다키아와 트라키아를 거쳐 소아시아로 들어갔다. 그가 갑자기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되어 온갖 다양한 방법으로 대왕을 새롭게 기리게 된 것은 트라키아를 통과할 때였다고 한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흉내내서 여러 마리의 코끼리를 수행원들과 함께 다니게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자들을 처형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 로마와 다른 도시들에 알렉산드로스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카라칼라의 영웅 숭배는 극에 달했고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와 자신의 얼굴을 반씩 조합한 두상을 그리게 했다. 따라서 이를 본 헤로디아누스는 이 두상이 본인을 비롯한 로마인들에게 우스꽝스럽고 괴이해보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215] 알렉산드리아 대학살

 

214-215년의 겨울은 소아시아의 북서 지역에 있는 니코메디아에서 보냈지만, 2155월에는 이미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는데, 카라칼라는 자신이 들린 도시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부하들이 건설한 터라 무척 만족스러워 했다. 헤로디아누스의 기술처럼 안티오키아 시민들이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들지 않아서 그랬던 것도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카라칼라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갔다. 여기서 알렉산드리아 대학살이 벌어지는데, 도착 당시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았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인구는 약 50만 명으로 제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그가 게타를 살해한 것을 비판, 또는 카라칼라와 모후인 율리아 돔나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조롱했다고도 한다. 원인이 무엇이든 카라칼라는 자신을 비판한 비무장 시민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잔인하게 대응했다. 황제는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거짓 약속을 한 뒤 속아서 온 비무장 시민들을 검거했으며,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을 병사들로 둘러싸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러한 대학살은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서 비무장한 수천 명의 시민이 카라칼라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어갔다.

 

[216] 니시비스 전투

 

카라칼라가 동부를 방문한 목적은 파르티아인들을 상대로 한 정복 전쟁이었는데 이를 니시비스 전투라고 한다. 알렉산드리아 학살 사건 이후 그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와서 군대를 편성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원정 준비는 이미 2년 전 그가 소아시아에 있었을 때 시작되었으며 군대를 강화하고, 통신 라인을 개선했으며, 군대에 주화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조폐국을 설립했다. 216년 초여름에 시리아 국경 지역에 집합한 군 병력은 당시로서는 대군인 8개 군단 전부 또는 일부로 구성된 상당한 규모였다.

 

# 파르티아 제국의 내분을 이용한 카라칼라

 

파르티아 제국은 213년 이후, 2명의 경쟁자들이 일으킨 내란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에는 매우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두 경쟁자 중 하나인 볼로가세스 6세는 메소포타미아 하류 지역과 수도 크테시폰을 장악했고, 다른 경쟁자 아르타바누스 4세는 이란 고원 너머 지역을 장악한 상태였다. 카라칼라는 이러한 분열된 상황을 이용하여, 아르타바누스 4세의 편을 들었고, 동맹 강화를 위해 그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제안은 함정이었고 카라칼라는 그가 안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로마군은 티그리스 강 동부의 시골 지역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고 파괴했다. 어떻게 기습했냐 하면 파르티아의 황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태도를 바꾸어 파르티아 측 하객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이때 신부를 포함한 수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살해당했다. 피의 결혼식 뒷통수 치기로 얻은 결과였지만 카라칼라는 만족했고 그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원정의 본부가 된, 메소포타미아 북부 도시 에데사로 가서 사냥과 전차 경주로 시간을 보내면서 다음해에 파르티아인들과의 교전에 필요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세웠으나 이 교전은 일어나지 못했다.

 

# 암살의 음모

 

카라칼라가 동부에서 정복 전쟁을 벌이는 동안 황제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칼라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군대 사령관인 플라비우스 마테르니아누스(Flavius Maternianus)가 음모 소식을 알게 되었고, 카라칼라에게 서신으로 이 소식을 알리려 했지만 그의 서신은 안티오키아에서 황실의 서신을 담당하고 있는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에게 전해졌다. 이때 근위대장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Marcus Opelius Macrinus)가 주모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의심받았다.

 

[217] 카라칼라의 최후

 

#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 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심하다

 

카라칼라는 원정 행군 중에 뭔가 사소한 잘못을 범한 두명의 백인대장들에게 갑자기 화를 내면서 이례적으로 여러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질책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두 백인대장 중 한 명인 마르티알리스는 진작부터 은근히 카라칼라를 싫어하고 황위를 넘보았던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찾아가 황제를 죽이라고 충동질했다. 마르티알리스는 카라칼라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는데,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입증되지 않은 혐의를 받고 며칠 전에 처형되었다고 했으며,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카라칼라가 자신을 백인대장으로 승진시켜주지 않아서 화가 나서 그랬다는 기록이 있다. 어찌 되었든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는 둘 다 48일에 에데사에서 카르헤까지 카라칼라를 동행하는 수행원단에 포함되었고 카라칼라가 위험하다고 간주하며 그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 볼일(?)보다 죽은 황제

 

황제는 당시 복통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서 가는 길을 멈췄다. 야사에 따르면 기도를 위해 멈췄다고 하지만, 정사에 따르면 카라칼라는 기도를 위해 신전으로 이동 중이었고 이 근처에서 소변을 누기 위해 길을 멈췄다가 죽었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소변을 누기 위해 주변에 사람을 물리게 하도록 명령한 뒤 급히 발걸음을 옮긴 일이었다. 황제가 소변을 누기 위해 멀찌감치 떨어졌기 때문에, 카라칼라 곁에는 단 한 명의 시종만 있을 뿐, 나머지 호위병들은 황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여 등을 돌리고 있었다. 헌데 카라칼라는 소변을 누면서 마르티알리스를 불렀다. 이는 마크리누스와 마르티알리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마크리누스의 사주를 받은 마르티알리스는 부름을 받은 척하며 앞으로 다가가서는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누던 카라칼라를 검으로 한 번에 깊이 찔렀다. 로마식 양날 단검으로 급소를 단번에 찌른 만큼, 소변을 누던 카라칼라는 그 자리에서 비명도 못 지르고 즉사했다.

 

결국 카라칼라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만큼 최후가 매우 비참했다. 그러나 정작 카라칼라를 죽인 마르티알리스는 마크리누스에게 황제 시해의 범인으로서 바로 즉결 처분당한다. 혹은 태양신을 참배하는 신전에서 기도 중에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 민중들과 원로원 등 지도층 인사들에게 죄의식과 불안으로 잔인한 통치자로 평가받던 카라칼라의 삶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그의 나이는 겨우 29살이었다.

 

# 마크리누스, 황제가 되다

 

카라칼라가 죽자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마크리누스는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황제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물론 이는 연기였다. 그리고 마크리누스가 그를 뒤이어 황제가 된다.

 

몇 주 후, 카라칼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슬픔에 빠진 율리아 돔나는 자신이 비참하게 죽을 것을 비관해, 아들 카라칼라를 따른 병사들을 모아 반격을 도모했다가 사전모의가 들통난다. 이 행동으로 율리아 돔나는 더 큰 위기에 빠진다. 돔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의 둘째 마마이아의 남편과 마마이아의 사위, 의붓딸은 협력한 대가로 에메사로 추방됐다가 마크리누스 명령으로 살해됐다. 이어 여동생 마이사와 조카 소아이미아스, 마마이아는 억류 후 에메사로 추방되는데, 이때 이들의 모든 재산이 압류됐다. 마크리누스는 율리아 돔나에게 더 이상 과거 같은 삶을 누릴 수 없으며,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음을 알렸다. 결국 카라칼라 어머니 율리아 돔나는 유방암을 앓아 건강이 나빠 곧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 본인의 모든 것이 끝났다는 비참한 현실, 하나 남은 아들의 죽음, 젊은 시절부터 누린 부귀영화가 끝났음을 깨닫고 굶어 죽는 방법으로 자살했다.

 

[가족관계]

 

  • 부친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모친 : 율리아 돔나
  • 형제 : 게타
  • 배우자 : 풀비아 플라우틸라
  • 자녀 : (이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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