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7일 목요일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 : 페르티낙스(Pertinax, AD 193)

페르티낙스(Pertinax, AD 193)

 

  • 로마 제국의 제18대 황제
  • 재위 : 19311~ 193328
  • 출생일 : 12681
  • 사망일 : 193328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는 로마의 군사 지휘관으로 있다가 콤모두스를 이어 1933개월간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 지속되는 혼란의 시기를 연 주인공들 중 한 명이다.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군대에 들어간 후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정치적, 군사적 거물로 떠올랐다. 이 공로로 인해 속주의 총독, 원로원 의원의 자리를 차지했다.

 

콤모두스의 죽음 이후, 그는 황제의 자리를 얻게 되었고 여러 안정화, 개혁 정책을 시도했으나 워낙 짧은 재위 기간 탓에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와 같은 개혁 정책으로는 근위대의 권력 제한이 들어있었는데, 이는 근위대의 반발을 불러와 결국 그가 암살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령으로 명예가 회복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해방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다]

 

이탈리아 북서부의 도시 알바폼페이아(오늘날의 이탈리아 알바)에서 해방노예 헬비우스 수세스수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시대 동료 원로원 의원인 역사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페르티낙스는 북이탈리아에서 해방노예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입대 전까지는 이탈리아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30줄이 되어서야 출세를 위해 스스로 입대해 군 생활을 했는데, 꽤 늦은 나이에 일개 병사로 시작했지만 클리엔텔라 관계를 맺고 있던 부모의 옛주인 일가 사람들이 파트로누스로 큰 도움을 주면서 마침내 군단 대대장 지위까지 올랐다고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기]

 

그는 일개 병사에서부터 사령관에 이르기까지 로마군 계급을 차근차근 올라갔는데, 파트로누스들의 도움 외에도 능력이나 인품이 상당히 괜찮은 탓에 161년 벌어진 파르티아 전쟁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이자 공동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휘하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이후 페르티낙스는 철인황제와 그 동생 루키우스의 신임 아래 원로원 의원직을 거머쥐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그는 법정 공방에 휘말리게 되고 결국 좌천되게 된다. 하지만 다시 전쟁이 일어나자 중앙 정부는 다시 그를 불러 중임을 맡겼다. 마르쿠스 황제는 마르코만디 전쟁을 치룰 당시, 자신의 맏사위 폼페이아누스를 돕기 위한 핵심장군으로 페르티낙스를 선정해 그를 마르코만니 전쟁에 소환했다. 다시 승진 가도를 걷게 된 페르티낙스는 모이시아ㆍ다키아ㆍ시리아를 관할하는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69년 게르만 족의 침입을 막아내면서 그 실력을 제대로 인정받았다. 이에 마르쿠스 황제 시절인 175년 그는 처음으로 집정관에 올랐으며, 황제의 신임 아래 185년까지 시리아, 다키아, 모이시아 일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에 올랐다.

 

[콤모두스 황제의 시기]

 

콤모두스가 단독황제가 된 이후에도 페르티낙스는 신임을 받았고, 182년 루킬라가 주도한 황제암살미수사건 이후 흑화된 콤모두스가 정치를 내팽겨치고 제국 내 주요장군들을 반역죄로 소환될 당시에도 그 신임이 유지되었다. 그렇지만 페르티낙스는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권신 섹스투스 티기디우스 페렌니스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고, 185년경 소란 사태로 시끄러워진 브리타니아로 임지를 옮겼다.

 

185년 페렌니스가 콤모두스에게 반란 음모가 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새로운 단독근위대장으로 해방노예였던 황실침실시종 클레안데르가 올랐다. 그런데 클레안데르는 부패했어도 능력이 있던 페렌니스보다 비열하고 탐욕스러운 간신인 탓에 결국 페르티낙스는 185년 브리타니아 군단병들의 시위를 진압한 것이 너무 강압적인 군율을 적용해 문제가 많다는 이유로 공격받기 시작했으며 이는 3여년 만인 187년 불명예스럽게 사직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페르티낙스는 로마군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늘 담당한 장군이자 충신이었기에, 원로원과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콤모두스는 페르티낙스를 총애하진 않아도 중용해줬다. 그 결과, 그는 콤모두스의 동료 집정관이 되는 영예를 누렸고 188년부터 189년까지 아프리카 속주 총독으로 파견됐다.

 

[콤모두스 암살 후,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다]

 

콤모두스가 1921231일 암살당하자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는 로마 거리를 지나 명망이 높았던 페르티낙스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콤모두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페르티낙스에게 알리고 그에게 황제 자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근위대의 지원이 필요했는데 페르티낙스는 각각의 근위병에게 12,000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하고 그들의 지원을 얻었다. 원로원은 새벽이 오기도 전에 회의를 열고 당시 제국의 장군인 페르티낙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그의 즉위는 사실 단독 근위대장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따라서 페르티낙스는 처음 콤모두스 암살 소식을 듣고, 황제 제안을 라이투스와 에클렉투스에게 받았을 때 확실히 황제 자리를 인정받기 위해 돈을 약속했다. 이때 근위대 병사들에게 병사 일인당 만 2천 세스테르티우스를 주기로 한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돈으로 확실한 지원을 약속받은 뒤 병사들과 자신의 지지자들의 호위 속에 원로원에 출석할 수 있었고 모든 원로원 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제위를 인정받았다.

 

페르티낙스는 자신을 도와준 라이투스와 프라이토리아니를 질서 회복을 위해 개혁대상으로 선언하고 대립했으며, 그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자신이 약속한 돈까지 지불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페르티낙스는 약속 이행을 요구한 병사들에게 혹독하고 강압적인 훈련을 지시하고 모욕까지 줬으니,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의 불만은 터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적을 만드는 페르티낙스]


페르티낙스는 콤모두스가 저지른 것을 수습하면서도 자신을 도울 수 있던 이들을 적으로 계속 돌리면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만 가고 있었던 것이다.

 

3월 초 페르티낙스가 오스티아에서 중요한 곡물 선적 상황을 시찰하고 있는 동안 심각한 쿠데타 기도가 있었는데 이 배후에는 근위대가 있었고 그들이 추대한 인물은 집정관 퀸투스 소시우스 팔코(Quintus Sosius Falco)였다. 그러나 음모는 발각되었고 팔코는 사면받았지만 병사 몇몇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몇 주 후 근위대장 레토 주도로 일어난 쿠데타는 성공했다.

 

328일 페르티낙스가 그날의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궁에 있었는데, 갑자기 300명의 군사들이 팔라티노 황궁 문으로 밀고 들어왔으며 보초를 서던 호위병들도 황실 관료들도 그들을 막지 않고 황제를 죽이라고 뒷통수를 쳤다. 이때 페르티낙스 황제 주위에 사람들은 그에게 달아나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권유했지만 페르티낙스는 그 자리에 남아 칩입자들에게 맞서는 용기를 보여주려고 했다.

 

[병사들에게 구타당하고 죽은 황제]


디오 등의 이야기에 따르면, 페르티낙스는 라이투스와 그 부하들이 궁 안으로 밀고 들어온 상황에서, 자신의 풍모와 과거의 업적들을 이용해 그들을 위압하고 언변으로 설득하려고 직접 대면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행동은 무모하고 멍청한 행동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병사들에게 위엄과 설득이라는 언변술은 이미 통하지 않았다. 66세의 페르티낙스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근위병 한 명이 나서서 병사들이 보낸 칼이나 받아라라고 소리친 다음 칼로 내리쳤고, 다른 근위병도 가세했다. 그렇게 고령의 황제는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구타당함으로써 비참하게 죽었다. 제위는 돈으로 근위대의 지지를 얻은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 넘어가고 만다.

 

뒤이어 같은 해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칙령을 내려 피살당한 통치자를 기리는 성스러운 장소를 마련하고 거기에 페르티낙스의 이름을 붙였다.

 

페르티낙스가 죽은 193년 한해 동안 다섯 명의 황제가 난립하게 된다.

 

[가족 관계]

 

  • 부친 : 헬비우스 수케수스
  • 배우자 : 플라비아 티티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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