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모두스(Commodus, AD 180~192)
- 로마 제국의 제17대 황제
공동통치 : 177년 ~ 180년 3월 17일
단독통치 : 180년 3월 17일 ~ 192년 12월 31일 - 출생일 : 161년 8월 31일
- 사망일 : 192년 12월 31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이며, 로마 제국 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 사람으로 언급되어 ‘포학제(暴虐帝)’라고도 불린다. 콤모두스가 등극함으로써 이른바 오현제 시대는 종식을 고했다.
[161년] 진정한 금수저로 태어나다
서기 161년, 로마 근교의 도시 라누비움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소 파우스티나 황후의 자녀 14명 중 열 번째로 태어났다. 로마 최상류층 내에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이후 오랜 만에 태어난 남자 일란성 쌍둥이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
콤모도스의 남자 형제들은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모두 죽었는데, 그의 쌍둥이 형제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풀부스 안토니누스도 4살 때 요절했다. 다행히 8살 아래의 남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가 있긴 했지만, 나이와 능력상 이 당시 콤모두스는 지극히 멀쩡하고 재능도 있던 터라 결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제위에 있을 때에 태어나 황제의 직위를 물려받은 유일한 황제가 되는 코스를 그대로 밞아나갔다
[166년] 차기 황제이자 공동황태자로 공인받다.
다섯 살 때인 166년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이 해에 남동생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당시 3세)와 나란히 차기황제이자 공동황태자로 공인받았다.
[17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후계자로 공식 선포되다
동방 순행을 마치고 176년 가을, 로마로 돌아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콤모두스를 공식 후계자로 선포했다.
[177년] 공동 황제에 오르다
177년에는 공동 황제의 직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원로원으로부터 제호까지 받은 뒤 그해 첫 집정관으로 취임했다. 콤모두스가 첫 집정관에 올랐던 177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원로원은 어린 콤모두스를 위해 특별히 법까지 완화해 콤모두스를 도왔다.
[178년] 도나우 전선에서 싸우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콤모두스가 16살이 되던 해인 178년 결혼시켰다. 신부는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함께 도나우 강에서 벌어진 게르만족들과의 전투에 참전한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프라이센스의 딸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였다. 그런데 이 결혼은 콤모두스의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허례허식 없이 평범한 결혼식으로 진행시켰으며, 결혼 직후 새신랑은 로마를 떠나 본국 이탈리아의 북부 국경으로 향했다고 한다.
콤모두스는 아버지와 함께 178년과 179년에 도나우 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180년으로 계획된 원정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같은 해 3월에 제위에 올랐다.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고 단독 황제가 되다
180년 3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죽자 콤모두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즉위 후 다 이겨가던 게르만 부족과의 전쟁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단독황제에 오른 콤모두스가 마르코만니 전쟁을 중단시키고 휴전회담을 결정하기 전, 로마군 장군들은 이 결정을 반대했다. 휴전 결정은 그 당시 로마의 재정상태가 최악인 것을 감안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182년] 누이 루실라의 암살 시도 실패, 콤모두스의 흑화
182년 누이 루실라(Annia Aurelia Galeria Lucilla)가 원로원과 공모하여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를 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분노한 콤모두스는 상당수의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했다.
루킬라는 164년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해 어린 나이에 황후가 됐지만, 베루스는 게르만족과의 전쟁 후 로마로 귀환하다가 쓰러져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이때 루킬라는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이마저도 딸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남편과 사별하고 얼마 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믿음직한 충신이었던,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와 루킬라를 강제로 재혼시켰다. 두번째 남편 폼페이아누스는 외모도 괜찮고 성격이 겸손하고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오늘날의 터키 안티오키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 능력, 성격과 별개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시민권을 얻은 기사계급(에퀴테스) 출신이었고 본인 대에야 비로소 원로원에 입성한 ‘신참자’였다. 따라서 본래부터 황후로서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했던 루킬라는 신분의 격을 이유로 44살에 접어든 새남편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고, 재혼 직전까지 새남편을 거절할 정도로 불쾌해했다. 그래서 부부 사이는 자연스레 굉장히 나빴는데, 두 번째 결혼에서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170~217)를 낳았다.
루킬라는 황제가 된 친동생 콤모두스를 질투하고, 그 원한이 갈수록 커졌다. 또 루킬라는 자신의 유일한 지위라고 생각된 아우구스타 자리를 공유하게 될 콤모두스의 황후이자 올케 브루티아 크리스피나에게 불만을 품었다. 루킬라는 자신의 자리가 되었어야 됐던 황후 자리를 차지한 콤모두스의 아내 크리스피나를 미워했는데, 결국 어처구니없는 악감정으로 182년 두 번째 남편의 조카, 루킬라와 내연관계였던 애인들, 콤모두스의 장인, 다른 여동생들의 남편들과 음모를 꾸몄다. 안토니누스 일가 여성들과 친인척, 근위대장, 원로원 등이 대거 참여한 루킬라의 황제 시해미수 사건은 콤모두스의 모든 것을 180도 바꿔버리면서, 그의 치세를 그야말로 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녀의 조카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퀸티아누스(Claudius pompeianus Quninitianus)가 이때 완력이 상당하고 건장한 콤모두스 암살을 담당했고, 콤모두스 암살 시도는 콜로세움에서 결행되기로 결정났다. 그래서 그는 옷에 단도를 감추고 콤모두스가 콜로세움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황제가 가까이 오자 그는 숨어 있던 곳에서 급히 달려 나오며 단도를 휘둘렀는데, 바로 황제를 찌르지 않고 “원로원이 너에게 이 칼을 보내노라!”라고 대사를 외치느라 시간을 낭비했다. 이 말을 하는 사이에 그는 즉각 호위병에게 칼을 빼앗기고 붙잡혔다. 콤모두스는 비록 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얼마 후에 사오테루스가 암살되자 그는 한층 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두 차례의 암살 사건으로 젊은 나이에 큰 충격을 받은 콤모두스는 며칠을 끙끙 앓을 정도로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는데, 병석에서 일어난 이후 조사 결과까지 알게 되자 완전히 사람이 변하더니 쓸데없는 의심병이 생기고 정상생활조차 힘들어 할 정도로 사람이 변해버렸다.
암살범이 본인 앞에서 현장체포되는 순간 원로원을 대놓고 언급했기에 이미 증거는 명확했다. 이는 암살범 심문에서 더 확실해진 탓에 로마의 핵심 브레인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원의 유력한 의원들, 아버지 시절의 유능한 관리들이나 주변 친척, 친지들 그리고 능력 있는 군단장들까지 반역죄에 죄다 엮여 조사받았다. 그래서 로마 제국이 자랑하는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줄줄이 죽여버렸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콤모두스 치세는 피로 얼룩졌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암살미수범 퀸티아누스는 심문 후 처형되었고, 심문 중 암살 주동자가 황제의 맏누나 루킬라, 루킬라가 루키우스 베루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콤모두스의 조카) 루킬라 플라우티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질녀 부부 등이라고 불어버린 탓에 심문 보고를 들은 콤모두스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모든 조사가 끝나고 반역죄 처벌이 벌어진 순간, 암살음모 주동자들인 황실 직방계 황족들, 원로원, 군대, 근위대 등등 로마 각 분야 인사들이 죄다 처형되거나 연좌죄로 추방되는 대형 사건이 됐다.
[근위대장 페렌니스를 통한 원격 통치]
콤모두스는 모든 사항을 근위대장 페렌니스를 통해 전달하면서 자발적 은둔통치를 시작했다. 페렌니스는 통치권을 잡고 있는 상황 속에서 당연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콤모두스를 사치와 향략에 빠지게끔 했다. 그 결과, 고대 기록에 의하면 루킬라 사건 이후부터 콤모두스는 술에 취해 궁 안에서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기도 했으며, 수시로 온천을 즐기면서 로마에서 가장 아름다운 3백 명에 달하는 첩들과 함께 놀았으며 3백 명의 어린 소년들을 사들여 자신들의 기분에 따라 한 명씩 골라내며 하렘 같은 생활을 즐겼다고 한다.
[근위대장 페렌니스를 반역죄로 처형하다]
근위대장 페렌니스는 나름 유능했고 꽤 일처리를 잘해냈고, 로마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그래서 콤모두스를 망치는 가운데에서도 제국이 멀쩡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하면서, 권력을 지켰다. 하지만 185년 페렌니스는 브리타니아에서 벌어진 병사들의 파업이 터지고, 이때 잠시 정신을 차린 콤모두스가 여기에 개입하면서 몰락하게 됐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지나치게 권력이 강해진 그가 콤모두스를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가운데 하나를 황제로 세우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기록에 따르면 페렌니스에게 불만을 품은 브리타니아 군단이 장정 대표 1500명을 로마로 보내 황제에게 위험을 경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기록 외에도 브리타니아 군단이 시위를 한 실제 이유는 페렌니스의 정부가 부패해서였거나 또는 페렌니스가 그해에 일찍이 브리타니아 내의 로마군 사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할 때 가혹했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고, 콤모두스는 이 사건 직후 페렌니스와 그의 아들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새로운 간신 클레안드로스의 등장]
콤모두스는 친정 대신 페렌니스가 맡았던 일을 고스란히 자신의 새 침실 시종인 탐욕스러운 해방노예 출신 관료 클레안드로스(클레안데르)에게 내렸다. 프리지아(프리기아) 출신의 클레안드로스는 노예로 고향에서 로마로 팔려왔다가 황실로 들어가, 황궁 안에서 뛰어난 머리와 눈치를 바탕으로 차근차근 승진하여 최고 관직에 올랐다. 클레안드로스는 어디에서 음모를 꾸미는 악인이 아니었고, 유능했다. 하지만 그는 페렌니스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비양심적이며 지위를 이용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부패했어도 유능한 전임자 시절보다 신임 근위대장 클레안드로스가 실권을 쥔 뒤에도 로마는 계속 막장으로 치달았는데, 문제는 이 인물의 경우에는 그래도 눈치는 보면서 매관매직을 본 전임자와 달리 노골적이고 아첨꾼 그 자체라서 로마 제국에 끼친 폐해는 심각했다.
[콤모두스를 노리는 세 번째 암살 시도]
이 무렵 콤모두스를 노리는 세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주동자는 궁정 관료가 아니라 완전히 외부인으로, 군대를 이탈하고 산적 두목이 되어 갈리아 지방에서 문제를 일으키던 마테르누스(Maternus)였다. 그는 187년 3월에 로마에서 열리는 키벨레 축제 기간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이었지만, 음모 사실이 거사 직전에 발각되었고 축제 기간 전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하지만 이미 암살사건을 세 번이나 경험한 콤모두스는 182년 초의 첫 암살사건 때 처음 얻은 두려움과 강박증세, 분노조절, 의심 등 정신적 불안증상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클레안데스의 최후]
콤모두스와 클레안데르 공존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서기 19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로마 시는 화재에 이어 곡물부족에 시달리게 되고 전염병과 기근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클레안드로스의 정적들이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클레안드로스가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살 수 있는 모든 곡식들을 사들여 인위적인 곡물 부족을 초래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로마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대전차 경기장에서는 성난 군중들이 남쪽으로 아피아 가도를 지나 로마에서 6km 떨어진 곳에 있는, 당시 콤모두스가 머물고 있던 퀸틸리 빌라까지 들이닥쳤다. 그들은 클레안드로스의 처형을 요구했다.
시민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야 콤모두스는 사태를 깨닫고 사태수습에 나섰다. 그는 모든 이들의 표적이 된 클레안드로스를 참수하고 시민들에게 수급을 던져주는 걸로 봉기를 가라앉혔다. 이에 군중들은 기뻐하며 몰락한 권신 클레안드로스의 시신을 마구 다룬 후에 그의 목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콤모두스는 로마로 돌아와서 환호하는 민중들의 환대를 받았다.
[막장이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다!]
콤모두스의 막장행보는 아직 암살 전처럼 심각한 과대망상 증세를 공개적으로 보이지 않은 터라서 덜 알려졌다. 또 콤모두스의 매형 폼페이아누스와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가 원로원에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과 군대는 확고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콤모두스를 버리지 않았다.
당시, 고령의 폼페이아누스는 선황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유지를 받든 고명대신이었고 당시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불손한 움직임이 나오기 직전 상황에서도 끝까지 안토니누스 왕조와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를 유지했다고 한다. 또 그는 이 시기동안 세 차례나 제위를 제안받았음에도 모두 거절했으며 그때마다 마르쿠스와 콤모두스에 대한 신뢰와 충성을 언급했다. 따라서 의외로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폼페이아누스는 콤모두스의 막장극에 질린 나머지 나이와 눈병으로 인한 이유를 들어 은퇴해버리고 교외의 시골별장으로 들어가버렸다고 한다. 반면, 누나 파딜라의 남편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인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복점관과 원로원 의원을 지내면서 끝까지 로마에 남아 장인의 유지에 따라 콤모두스를 도우려고 했던 고문으로 있었다. 또 둘째누나 파딜라 부부는 콤모두스를 돕기 위해 카파톨리노 언덕의 황궁 일부에 거주했다고 한다.
[콤모두스 흑화의 원인 : 루키아]
동시대 콤모두스를 접견한 디오로 대표되는 이들의 기록을 보면, 콤모두스는 엄청난 완력과 큰 키, 떡 벌어진 건장한 체격과 별개로 천성이 착하고 유순한 사람이었다는 평과 함께, 그가 즉위 전이나 직후 2년 동안 결점도 없었고 암살 직전까지도 그 위험성이 심각한 괴물까진 아니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렇지만 별이유없이 재위 2년만에 친누나 루킬라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을 경험한 이후부터,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치에 의욕을 잃고 완전히 망가져 버렸고 이후 등장한 측근들 역시 거진 문제투성이인 터라 잔혹하고 악랄한 구석이 없는 편인 암군임에도 로마 제국 77명 황제 중 역사상 최악의 황제 중 한명으로 늘 거론된다
[190년] 헤라클레스의 환생으로 착각하다
190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로마의 반이 소실되었는데,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좋은 기회라고 여긴 콤모두스는 재건된 로마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을 붙여 ‘콜로니아 콤모디아나’(콤모두스의 땅)라고 명명했다. 또 달력을 자신과 연관된 이름으로 바꾸었다.
20대 후반에 접어들 무렵인 190년 직전부터 콤모두스의 부도덕하고 광적인 행동은 정신불안으로 점차 심해졌다. 친정과 동시에 콤모두스는 마침내 자신을 강인함과 용기의 대명사로 불리는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헤라클레스를 흉내낸 사자 가죽을 자기 머리에 두르고 곤봉을 든 자신의 조각상을 남기게 했다.
[검투사로 활동하다]
콤모두스는 헤라클레스의 환생을 자칭한 뒤로, 직접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과 싸우기도 하는 등 다양한 기행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뛰어난 편이었다. 그는 실제로 엄청난 완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흉기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매 싸움마다 전승무패였다. 물론 전승무패의 기록 자체는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곤봉과 칼에 희생당한 자들은 검투사들보다는 주로 본인이 스스로 조달하게 한 범죄자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문 검투사들과 싸운 경기의 승리는 반드시 상대의 항복으로 얻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와 대결한 검투사들은 한 명도 죽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다만 그의 베스티아리로서의 실력을 생각해보면 검투사들 쪽에서 먼저 죽고 싶지 않아 항복했을지언정, 그가 황제의 권위를 이용해서 억지로 상대를 지게 만든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단순하지만 나스시시즘이 강하고 겁이 많은 인물]
콤모두스는 천성적으로 순하지만 단순했고, 나르시시즘이 강하고 겁이 많았다. 그래서 디오의 주장처럼 사치스럽고 편안한 생활에 젖었던 클레안데르 시대 이후부터는 음란하고 잔인한 습관에 빠져 이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는데, 이 시기부터는 여러 사람들을 죽이거나 그들을 시기하고 증오했다. 따라서 총독 율리아누스, 곡물 감독관 디오니시우스는 콤모두스 명령으로 피살됐고, 시리아 출신인 율리우스 알렉산데르는 다른 사람이 죽여야 할 사자를 창을 던져 먼저 죽인 죄목으로 처형됐다.
[192년] 콤모두스, 암살당하다
192년 11월의 시합들이 끝나고 콤모두스는 새해를 맞으며 신을 넘어 로마의 새로운 건국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 로마를 콜로니아 콤모디아나로 재건한 것을 축하하고, 황제를 ‘로마의 건국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기에 선출된 집정관 두 명을 모조리 죽이고, 다음 날 자신이 검투사 복장을 하고 스스로 검투사 집정관까지 되려고 했다는 도시괴담이 돌았던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다.
분명한 것은 로마와 이탈리아에는 피에 굶주린 흉흉한 분위기가 돌았고, 콤모두스의 측근과 첩실조차 황제의 광기에 불안감을 호소했다는 점이다. 로마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못했으며, 정적들은 황제의 변덕에 벌벌 떨었다. 황제의 최측근들도 정신분열, 환각, 지나친 과대망상에 시달린 그에게 치를 떨며, 로마 시민들의 갑작스러운 분노가 폭발하여 불러올 수 있는 파멸을 미리 막아보기 위해 축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근위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는 데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무장한 채 지내는, 그것도 맨손으로 싸워도 인간병기였던 황제를 죽일 방법은 별로 없었다. 결국 그들은 음식에 독을 탔으며, 그가 독 때문에 욕실에서 토하고 괴로워하는 틈을 타서 그의 레슬링 교관이자 스파링 파트너 나르키수스를 보내서 목 졸라 죽이게 된다.
[암살 이후, 군인 황제 시대의 시작]
그가 죽은 후, 원로원은 기록 말살형을 선고하였지만, 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호의를 얻기 위해 콤모두스의 죄를 면제하여 그의 기록은 회복되었으며, 신으로서 모셔졌다.
콤모두스가 암살됨에 따라 군대가 국가의 실권을 잡아, 다음 황제 페르티낙스 이후, 군인에 의해 황제가 옹립되게 되고, 후에 제국은 ‘군인 황제 시대’라고 불리는 정체기에 들어가게 된다.
[폭군 콤모두스]
네로와 카라칼라 등의 폭군과 함께 거론되지만 콤모두스가 넘사벽이다. 네로는 원로원, 프라이토리아니, 군대 모두에게 탄핵된 다음 국가의 적으로 몰락하긴 했지만, 적어도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좀 있었으며 정치적으로 무능해서 그렇지 나름대로 노력이라는 건 했었다. 또 카라칼라는 잔인하고 분노조절을 못한다고 비난 받았어도 암살당한 뒤 기록말살형 언급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의 암살에 관여한 마크리누스에게 신격화됐다.
[가족관계]
- 부친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모친 : 파우스티나
- 배우자 : 브루티아 크리스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