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AD 134~154) 5년 : 기원후 138년
▶ 정사당을 설치하다 : 138년 02월(음)
- 五年, 春二月, 置政事堂於金城.
- 5년(138) 봄 2월에 금성(金城)[1]에 정사당(政事堂)[2]을 설치하였다.
▶ 열병을 하다 : 138년 07월(음)
- 秋七月, 大閱閼川西.
- 〔5년(138)〕 가을 7월에 알천(閼川)[3]의 서쪽에서 군사들을 크게 사열하였다.
▶ 태백산에 제사를 지내다 : 138년 10월(음)
- 冬十月, 北巡親祀大[정덕본에는 大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太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太를 따랐다.]白山.
- 〔5년(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太白山)[4]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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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금성(金城) : 신라 초기의 왕성.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 37)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정사당(政事堂) : 신라 왕성인 금성에 설치된 정치 기구. 본 기사에서 정사당의 성격이나 기능, 운영 방식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말 그대로 정사를 다루는 곳으로 볼 수 있겠는데, 신라 귀족 관인들의 회의로 널리 알려진 ‘화백회의(和白會議)’의 기원을 이 정사당에서 찾기도 한다. 물론 상고기에는 한자식 표현인 ‘정사당’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정사당(政事堂)’은 당(唐)과 고려(高麗)에서 재상(宰相)들이 정사를 논의하던 곳을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따라서 본 기사에서의 ‘정사당’은 훗날 정사당에 해당하는 정치 기구로 신라 상고기부터 존재했던 것을 후대적 관념에 입각하여 부회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본서 권45 녹진(綠眞) 열전에는 헌덕왕 14년(822)에 상대등 김충공(金忠恭)이 ‘정사당’에서 관인의 인사 관련 업무를 보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정사당에서 다룬 업무가 비단 인사에 한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고기의 정사당은 왕을 위시한 삼성 족단의 지배층이 모여 국사를 논의하고 처리한 곳으로 이해하면 맞을 것이다(강종훈, 2016).한편 본서 첨해이사금기를 보면, 3년 7월에 궁의 남쪽에 ‘남당(南堂)’을 설치하고, 2년 후인 5년 정월부터 남당에서 정사를 보았다고 한다. 이 남당과 정사당의 관계는 분명하지 않은데, 남당이 설치되면서 정사당의 역할을 대체하였다고 보기도 하지만(李鍾旭, 1982), 녹진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 하대까지 정사당이 존재했으므로 두 개가 병존하면서 성격을 달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남당은 행정 집행적 성격의 기구로, 정사당은 논의를 위한 회의체적 성격을 가진 기구로 파악하는 견해가 그 한 예이다(朴南守, 2007).〈참고문헌〉李丙燾, 1954, 「古代南堂考」, 『서울대학교논문집』 1(人文社會科學);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全德在, 2004, 「新羅 和白會議의 성격과 그 변화」, 『歷史學報』 182朴南守, 2007, 「신라 화백회의 연구현황과 중층적 회의구조」, 『新羅文化』 30강종훈, 2016, 「회의체」, 『신라의 통치제도』(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08), 경상북도
- 알천(閼川) : 경주 시내를 흐르는 하천으로, 지금 경주시의 보문호수 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형산강(서천)으로 합류하는 북천(北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11년조 기사의 주석 참조.
- 태백산(太白山) : 지금의 태백산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태백시에 걸쳐 있는 산이지만, 본 기사에 등장하는 태백산은 현재 경북 영주시 순흥면과 봉화군 물야면, 충북 단양군 가곡면에 걸쳐 있는 소백산을 가리킨다. 본서 권32 잡지1 제사지 중사(中祀)조를 보면, 동악(東岳) 토함산, 남악(南岳) 지리산, 서악(西岳) 계룡산, 중악(中岳) 부악(父岳: 공산(지금의 팔공산))과 함께 북악(北岳)으로서 신라 오악을 구성하는 산으로 나오는데, 그 위치를 오늘날 영주 지역에 해당하는 ‘나이군(奈已郡)’으로 소개해 놓았다. 『삼국유사』 권4 의해5 의상전교에서도 부석사(영주시 순흥면 소재)가 있는 곳을 ‘태백산(太伯山)’이라고 표기하여, 신라 당시에 지금의 소백산을 태백산으로 불렀음을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