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7대 차대왕(次大王, 146~165) 즉위하다 [기원후 146년]
三國史記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차대왕이 즉위하다 [146년 12월(음)]
차대왕(次大王)은 이름이 수성(遂成)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씩씩하여 위엄이 있었지만 인자함은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 차대왕(次大王) : 고구려 제7대 왕으로 태조대왕 19년(71)에 태어나 차대왕 20년(165)에 사망하고, 재위 기간은 146~165년으로 전한다. 이름은 수성(遂成)인데, 『삼국유사』 권1 왕력편에는 “이름은 수(遂)”라 하여 ‘성(成)’자가 생략되었다. 다른 고구려왕들과 달리 분주(分注) 왕명이 없는데, 본문 왕호인 차대왕과 유사한 ‘차왕(次王)’이어서 별도로 적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2002, 13~14쪽). ‘차대왕’이라는 왕명은 태조왕[국조왕]을 이은 ‘다음 왕’이나(李道學, 194~195쪽; 박경철, 97쪽), ‘둘째 왕’을(노태돈, 1999, 78쪽)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차대왕의 아버지는 제2대 유리명왕의 왕자로 고추가(古鄒加)를 지낸 재사(再思), 어머니는 부여 출신이라고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태조대왕의 동생으로 그의 양위를 받아 146~165년에 재위했다고 나오지만,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121년에 궁(宮; 태조왕)이 사망한 다음 아들인 수성이 즉위하였고, 132년 이전에 사망하였다”고 하여 차이가 난다. 또한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궁(태조왕)이 사망한 다음 아들 백고(伯固; 신대왕)가 즉위하였다”고 하여 계보상 차대왕은 빠져 있다. 각 사서마다 차대왕 전후의 계보와 재위년이 다른 것이다. 이에 일본학계에서는 태조대왕에서 차대왕~신대왕으로 이어지는 왕계는 중국측 사서를 참조하여 5세기 이후에 삽입한 것이라며 차대왕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津田左右吉, 1922; 池內宏, 1940; 武田幸男, 300~308쪽). 물론 차대왕의 계보나 재위년에 다소 문제가 있지만, 그의 계보와 관련한 본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자체 전승이며(鄭早苗, 103~113쪽), 태조대왕 69년(121)부터 활동한 사실은 국내외 사서에서 모두 확인되는 만큼 실존 인물임은 명확하다. 특히 차대왕을 이은 신대왕 백고가 『삼국사기』 기록처럼 165년경에 즉위한 사실은 『후한서』에서도 확인되는 만큼 재위기간은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고 파악된다(노태돈, 1994: 1999, 71~72쪽). 다만 차대왕은 친형이라는 태조왕과 나이차가 많고, 76세라는 고령에 즉위해 20년이나 재위했기 때문에 현전하는 기록만으로는 양자를 친형제로 보기 어렵다. 이에 두 사람의 나이를 조정하여 친형제로 보기도 하지만(노태돈, 1999, 80~84쪽; 김기흥, 237~240쪽), 『후한서』처럼 부자관계로 보거나(李道學, 184~186쪽; 刘子敏, 138~141쪽; 朴燦奎, 25~27쪽), 계루부 왕실을 구성하는 소혈연집단의 동일 세대 인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58~267쪽).한편 그는 121년에 유주자사 풍환(馮煥)의 침략을 격파하여 최고 군사 지휘권자에 임명되었는데,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이 해에 태조왕이 죽고 수성이 즉위했다고 나온다. 이에 그가 121년에 즉위했다고 보기도 하지만(李道學, 187~188쪽; 刘子敏, 138~141쪽), 대체로 이때부터 실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노태돈, 1999, 80~84쪽). 그 이후 태조대왕 71년(123)부터 좌·우보와 함께 국정 전반을 관장하였고, 태조대왕 80년(132)부터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출신의 측근들과 함께 왕위 찬탈을 도모하였다. 마침내 태조대왕 94년(147)에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는데, 즉위한 다음 측근들을 중용하는 한편, 태조왕의 아들과 측근을 숙청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렇지만 즉위 이전의 활발한 군사 활동과 달리 재위기간에는 뚜렷한 활동을 남기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재지변이 이어지는 가운데 폭정을 일삼다가 차대왕 20년(165)에 연나부의 조의 명림답부에게 살해되었다. 이처럼 차대왕은 관나부, 환나부, 비류나부 출신 인물의 도움으로 즉위하였다가 연나부 인물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이는 계루부 왕실을 구성하는 소혈연집단이 각 나부와 연계하여 세력기반을 확장하고 왕위계승권을 확보하던 나부체제의 운영양상을 보여준다.〈참고문헌〉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国大学文学部池內宏, 194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亜学』 3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先生古稀記念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盧泰敦,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一考察」,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刘子敏, 1996, 『高句丽历史硏究』, 延边大学出版社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朴灿奎, 2000, 「高句丽太祖王宮考」, 『东疆学刊』 17-4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박경철, 2018, 『한국고대사의 재인식』, 서경문화사
-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 이 기사에서 보듯이 본서에는 차대왕이 태조왕의 친동생으로 나오지만,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태조왕인 궁(宮)의 아들로 나온다. 태조왕과 차대왕의 계보를 본서에서는 형제관계로 기술한 반면, 『후한서』에서는 부자관계로 파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는 대체로 당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원리는 형제계승이 지배적이었는데(李基白, 90~91쪽), 중국인들이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계보를 잘못 파악했다고 보았다(高寬敏, 126~127쪽). 이에 대해 최근 고구려 초기에는 실제 계보와 관계없이 현왕을 전왕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사자(嗣子)’라 지칭했는데, 중국인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관계로 기술했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61~262쪽).〈참고문헌〉李基白, 1959, 「高句麗王妃族考」, 『震檀學報』 20高寬敏, 1996, 『“三國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
- 그 때 나이가 76세였다 : 『삼국사기』에서 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를 명시한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다소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차대왕이 고령에 즉위한 ‘할아버지 왕’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이를 명기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194~195쪽; 김기흥, 223~225쪽). 또한 당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원리는 세대주의적 계승원리로 다음 세대가 일정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그전 세대에서 왕위를 계승하거나 한 세대의 왕위계승 후보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동일 세대에서 왕위를 계승한 결과, 차대왕이 고령에 즉위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즉위시의 연령을 명기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58~260쪽).〈참고문헌〉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