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8대 신대왕(新大王, 165~179)
三國史記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신대왕이 즉위하다 [165년 10월(음)]
신대왕(新大王)은 이름이 백고(伯固)[고(固)는 구(句)로도 쓴다.]이고,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다. 용모가 영특하며 성품이 어질고 너그러웠다. 처음에 차대왕이 무도(無道)하여 신하와 백성이 따르지 않게 되자, 화란이 일어나 피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산골짜기로 달아나 숨었다. 차대왕이 피살되기에 이르자 좌보(左輔) 어지류(菸支留)가 여러 신료[公]와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맞아들였다. 〔신대왕이〕 이르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국새(國璽)를 바치며 아뢰기를, “선왕이 불행하게도 나라를 버렸는데, 〔신대왕에게〕 비록 아들이 있지만 국가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무릇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어진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삼가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왕위에 오르시기를 청하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는〕 엎드려 세 번을 사양한 다음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 신대왕(新大王) : 고구려 제8대 왕으로 태조대왕 37년(89)에 태어나 신대왕 15년(179)에 사망하고, 재위 기간은 165~179년으로 전한다. 이름은 중국측 사서에는 백고(伯固), 본서 분주와 『삼국유사』에는 백구(伯句)로 나온다. 중국측 사서와 국내 사서에 전하는 이름이 거의 비슷한 점에 주목하여 후대 사가들이 신대왕 ‘백고=백구’를 기준으로 초기 왕계를 정리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임기환, 20~22쪽). 또한 차대왕과 마찬가지로 분주(分注) 왕명이 없는데, 본문 왕호인 신대왕과 유사한 ‘신왕(新王)’인 까닭에 별도로 적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13~14쪽). 그리고 ‘신대왕’이라는 왕명은 정변을 통해 새롭게 즉위한 ‘새 왕’(李道學, 194~195쪽; 노태돈, 1999, 78쪽; 박경철, 97쪽)을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본서에는 차대왕 20년(165) 3월에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사망하고, 이해 10월에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다음 신대왕이 즉위했다고 전하지만, 『삼국유사』 권1 왕력편(王曆)에는 태조대왕과 차대왕이 모두 신대왕에 의해 시해되었다고 나온다. 사서마다 즉위 과정이 조금 다르게 기술되었는데, 실제 태조대왕이 165년까지 생존했을지는 의문이다.한편 본서에는 신대왕이 제6대 태조왕 및 제7대 차대왕의 동생으로 165년에 즉위했다고 나오지만,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수성(遂成; 차대왕)의 아들로 순제 양가(陽嘉) 원년(132) 이전에 즉위했다고 나오며,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궁(宮; 태조왕)의 아들로 144~146년 이전에 즉위했다고 나온다. 각 사서마다 계보와 즉위년이 다른 것이다. 이에 일본학계에서는 태조왕~신대왕의 왕계는 중국측 사서를 참조하여 5세기 이후에 삽입한 것이라며 신대왕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津田左右吉, 1922; 池內宏, 1940; 武田幸男, 300~308쪽). 물론 신대왕의 계보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그의 계보와 관련한 본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자체 전승이며(鄭早苗, 103~113쪽), 활동 사실도 국내외 사서에서 모두 확인되는 만큼 실존 인물임은 명확하다. 특히 『후한서』 권51 열전41 교현전(喬玄傳)에는 165년 전후의 역사적 상황을 기술하며 신대왕 백고(伯固)를 ‘새로 즉위한 왕’이라는 뜻에서 ‘사자(嗣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본서의 기록처럼 신대왕이 165년경에 즉위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노태돈, 1994: 1999, 71~72쪽). 다만 신대왕은 친형이라는 태조왕이나 차대왕과 나이차가 많고, 77세라는 고령에 즉위해 14년이나 재위했기 때문에 현전하는 기록만으로는 이들을 친형제로 보기는 어렵다. 이에 이들의 나이를 조정하여 친형제로 보거나(김기흥, 237~240쪽), 태조왕과 차대왕은 친형제이며 차대왕과 신대왕은 가까운 친척으로 보기도 한다(노태돈, 1999, 80~84쪽). 『후한서』 고구려전처럼 이들 각각을 부자관계로 보거나(劉子敏, 138~141쪽; 朴燦奎, 25~27쪽), 차대왕은 태조왕의 서자이며 신대왕은 태조왕 적자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李道學, 184~191쪽). 또한 계루부 왕실을 구성하는 소혈연집단의 동일 세대 인물로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58~267쪽).차대왕의 폭정을 피해 숨어 있다가, 165년 연나부의 조의 명림답부에 의해 차대왕이 시해된 다음 좌보 어지류(菸支留)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대사면령을 내려 차대왕의 태자 추안(鄒安)에게 식읍을 내리고 양국군(讓國君)에 봉하는 등 반대 세력을 포섭하면서 권력기반을 닦았다. 또한 종전의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국상(國相)으로 개편하여 각 나부에서 자치적으로 수행하던 행정실무를 점차 국가적 차원에 총괄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67년 졸본의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 왕계의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러한 체제정비를 바탕으로 172년에는 한나라 군대의 침입을 격퇴하기도 하였다.〈참고문헌〉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国大学文学部池內宏, 194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亜学』 3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先生古稀記念 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広開土王碑」研究序説-』, 岩波書店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盧泰敦,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一考察」,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刘子敏, 1996, 『高句丽历史硏究』, 延边大学出版社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朴灿奎, 2000, 「高句丽太祖王宮考」, 『东疆学刊』 17-4임기환, 2002, 「고구려 王號의 변천과 성격」, 『韓國古代史硏究』 28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박경철, 2018, 『한국고대사의 재인식』, 서경문화사
- 태조대왕의 막내 동생이다 :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는 신대왕이 태조왕 궁(宮)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고[“宮死 子伯固立”],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신대왕은 차대왕 수성(遂成)의 아들로 그의 뒤를 이었다고 하였다[“遂成死, 子伯固立.”]. 각 사서마다 신대왕의 계보가 조금씩 다른데, 중국측 사서에서는 각 계보를 모두 부자관계로 기술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에 대해 종전에는 대체로 당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원리는 형제계승이 지배적이었는데(李基白, 90~91쪽), 중국인들이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계보를 잘못 파악했다고 보았다(高寬敏, 126~127쪽). 이에 대해 최근 고구려 초기에는 실제 계보와 관계없이 현왕을 전왕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사자(嗣子)’라 지칭했는데, 중국인들이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자관계로 기술했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61~262쪽).〈참고문헌〉李基白, 1959, 「高句麗王妃族考」, 『震檀學報』 20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차대왕(次大王) :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차대왕 즉위년조 참조.좌보(左輔) : 본서 권14 고구려본기2 대무신왕 10년(27) 정월조 참조.
- 어지류(菸支留) : 수성이 태조왕의 양위를 받아 차대왕이 된 다음, 차대왕 2년(147)에 관등이 대주부(大主簿)로 오르면서 좌보(左輔)가 되었는데, 이 기사를 통해 차대왕 시해 당시까지 좌보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어지류에 관한 다른 사항은 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대왕 80년(132) 7월조 참조.
- 이때 나이가 77세였다 : 본서에서 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를 명시한 경우는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기사는 다소 특이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신대왕이 고령에 즉위한 ‘할아버지 왕’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나이를 명기했다고 보기도 한다(李道學, 194~195쪽; 김기흥, 223~225쪽). 또한 당시 고구려의 왕위계승원리는 세대주의적 계승원리로 다음 세대가 일정 연령에 도달할 때까지 그전 세대에서 왕위를 계승한 결과, 또는 한 세대의 왕위계승 후보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동일 세대에서 왕위를 계승한 결과, 신대왕이 고령에 즉위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즉위시의 연령을 명기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여호규, 2010: 2014, 258~260쪽).〈참고문헌〉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