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3일 수요일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대 혁거세 거서간(BC 57 ~ AD 4) 1년 : 기원전 57년

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1년 기원전 57

 

시조 혁거세가 즉위하다 기원전 57년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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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姓朴氏諱赫居世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即位號居西干時年十三囯號徐那伐.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一曰閼川楊山村二曰突山髙墟村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五曰金山加利[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고삼국사절요에는 로 되어 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를 따랐다.]六曰明活山髙耶村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有馬跪而嘶則徃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剖之有嬰兒出焉則收而養之及年十餘[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로 되어 있고삼국사절요에는 으로 되어 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를 따랐다.]岐嶷然夙成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以初大卵如瓠故以朴爲姓居西干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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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1]

시조의 성은 박()이고,[2]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3] 전한 효선제(孝宣帝)[4] 오봉(五鳳)[5]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6] 4월 병진일(丙辰日)[7] 일설에는 정월 15[8]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9]이라고 하니이때 나이가 13세였다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10]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11]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첫째는 알천(閼川양산촌(楊山村),[12] 둘째는 돌산(突山고허촌(高墟村),[13] 셋째는 취산(觜山진지촌(珍支村)[14]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대수촌(大樹村),[15] 다섯째는 금산(金山가리촌(加利村),[16]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고야촌(高耶村)[17]으로이들이 바로 진한(辰韓)[18]의 6[19]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20]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나정(蘿井)[21]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단지 큰 알이 있었다.[22]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을 일컬어 이라고 하였는데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이로 인해 을 성으로 삼았다.[23] 거서간은 진한 말로 이라는 뜻이다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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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혁거세(赫居世)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본서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B.C. 69년에 탄생하여, 13세가 되던 B.C. 57년에 신라의 왕위에 올랐고그로부터 만 60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승하하였다경주 지역의 선주 세력인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며알영(閼英)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죽어서 오릉(五陵)에 묻혔는데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남해(南解)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거서간(居西干)은 혁거세에게 붙여진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2. 시조의 성은 박()이고 시조 혁거세의 성씨가 이었다는 것은 혁거세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이 시기에는 중국식 성씨 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성씨의 개념 자체가 없었고단지 이름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6세기까지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 자료에 지배층의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양서(梁書)』 신라전에는 521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기록하였는데남사(南史)나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아예 왕의 성이 ()’인 것처럼 잘못 전하고 있다이 역시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는 신라 왕실에서 중국식 성씨 관념에 따라 성을 칭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중국 측 기록에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확인되는 것은 565년에 북제(北齊)가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地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면서 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고 표시한 것이 최초 사례이다.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국과 직접 교섭이 활발해지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의 경우도 대략 이 시기 이후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李純根, 11~26). 그렇지만비록 박씨라는 성씨의 사용 시기는 늦더라도혁거세를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 혈연집단이 상고기에 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존재했을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학계에서는 이들을 편의상 박씨 집단’, ‘박씨 족단(族團)’ 등의 이름으로 칭하고 있다.
    〈참고문헌
    李純根, 1980,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韓國史論』 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姜鳳龍, 1995, 新羅 中古期 部의 性格 變化와 姓氏制典農史論』 1
  3.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혁거세의 ()’은 붉다’, ‘밝다’, ‘빛이 나다는 의미를 지니는 한자어이다성씨로 알려진 도 밝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박혁거세의 박혁은 같은 말의 중복이 된다삼국유사』 권제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불구내왕(弗矩內王붉은 왕밝은 왕)’이라는 이칭이 전하는데, ‘이 ’, ‘의 훈차(訓借)임을 잘 보여준다. ‘거세(居世)’는 거서간에서 을 수식하는 용어 거서(居西)’를 후대인들이 시조 이름의 일부라고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동어반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新羅의 起源問題韓國古代史硏究博英社, 597).
  4. 효선제(孝宣帝중국 전한(前漢)의 황제로 B.C. 74년 7월에 즉위하여 B.C. 49년 12월에 사망하였다재위 기간 중 본시(本始)’, ‘지절(地節)’, ‘원강(元康)’, ‘신작(神爵)’, ‘오봉(五鳳)’, ‘감로(甘露)’, ‘황룡(黃龍)’ 등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하였다.
  5. 오봉(五鳳전한 효선제 때의 연호로, B.C. 57년부터 54년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6. 갑자년(甲子年: 60간지의 첫해로참위설(讖緯說)에서 3년 전에 해당하는 신유년(辛酉年)’과 함께 혁명의 해로 일컬어진다(갑자혁명설). 혁거세의 즉위 시기가 갑자년으로 전해지게 된 배경으로는진흥왕 대에 신라의 역사가 처음 정리될 때혁거세의 실제 즉위 시점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사관들이 갑자혁명설에 기대어 임의로 정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今西龍, 8~10李基白·李基東, 141강종훈, 294~296). 한편 혁거세가 B.C 57년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신라 초기사를 정리하는 학자들도 있다(金元龍, 4~13李鍾旭, 16).
    〈참고문헌
    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國書刊行會
    金元龍, 1976, 斯盧六村과 慶州古墳歷史學報』 70
    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 古代篇一潮閣
    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一潮閣
    강종훈, 2017, 고구려보다 빠른 신라 건국 기록한국고대사산책역사비평사
  7. 4월 병진일(丙辰日二十史朔閏表(陳垣, 1962, 中華書局, 19)에 따르면오봉 원년 4월은 삭일(朔日즉 음력 초하루가 기축(己丑)’일로 나온다따라서 병진일은 4월 28일이 된다.
  8. 정월 15일 새해의 첫 보름날에 해당하며세시풍속에서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라는 이름으로 중시된다삼국유사』 권제기이제사금갑(射琴匣)조에는 신라에서 정월 15일을 오기지일(烏忌之日)’이라 부르며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고 전하는바시조의 즉위 시점을 정월 15일로 전하는 일설은 이런 풍속에 구애된 것일 수도 있다참고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도 율령에 의거한 지방민 처벌 논의가 정월 15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나오고 있어새해를 맞아 처음 6부의 지배층이 함께 모여 국정을 협의한 날짜가 정월 15일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데혹시 이러한 관행이 혁거세의 즉위 시점을 정월 15일로 상정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李文基, 1989, 蔚珍鳳坪新羅碑와 中古期 六部問題韓國古代史硏究』 2, 143~145).
  9. 거서간(居西干신라 시조 혁거세에게 붙여진 왕호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거슬한(居瑟邯)’으로도 나온다그 의미는 미상이나본서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말미에서는 진한인들이 왕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하면서, ‘귀인(貴人)’을 칭하는 말이라는 설도 소개하였다본서에서는 혁거세에게만 한정된 왕호로 나오지만삼국유사의 왕력편과 기이편에서는 그의 뒤를 이은 남해(南解)도 차차웅이라는 왕호와 더불어 거서간으로 불렸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10. 서나벌(徐那伐지금의 경주 지역을 가리키는 신라 때의 지명이다신라가 건국된 곳으로애초에는 국명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그 의미는 미상이다. ‘서나는 금석문 자료나 중국 측 문헌 자료에 사라(斯羅포항 냉수리 신라비양서』 )’, ‘사로(斯盧삼국지』 한전)’, ‘설라(薛羅진서)’ 등으로도 나오는데, ‘가라(加羅)’가 흔히 가야(加耶)’로도 표기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라(徐羅)’의 이표기로서 서야(徐耶)’가 자형이 유사한 徐那로 오기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실제로 본서 권34 잡지지리신라조에는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라고 하여 徐那伐이 아닌 徐耶伐로 나온다.
  11. 조선(朝鮮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 여기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로서 위만조선을 가리킨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사에 의하면위만조선 말기에 조선상(朝鮮相역계경(歷谿卿)이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하는데이를 통해 한()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때를 전후하여 많은 수의 유이민이 한반도 중·남부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경주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 각지에서 B.C.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고조선 계통의 유적·유물이 다수 확인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一潮閣, 73~74).
  12. 알천(閼川양산촌(楊山村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참고로 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첫머리에는 알천 양산촌에 대한 주석이 붙어 있는데남쪽에 담엄사(曇嚴寺)라는 절이 있다는 내용이다또 이 조의 말미에는 혁거세의 유체를 묻은 오릉이 담엄사의 북쪽에 있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이를 감안하면알천 양산촌의 위치는 지금 경주시 탑동 소재 오릉 일원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3. 돌산(突山고허촌(高墟村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참고로 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훗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서 남산부(南山部)’로 이름을 바꾼 사량부(沙梁部)가 본래 돌산 고허촌이었다고 한 전승이 실려 있고남산부의 소속 촌 가운데 남산 서쪽에 위치한 촌인 마등오촌(麻等烏村)이 들어 있음을 고려하면남산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허(高墟)’라는 지명은 본서 권신라본기진평왕 48(631)조에 보이는 고허성 축조 관련 기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확인된다한편 삼국유사』 권제탑상제천룡사조를 보면남산의 남쪽에 세간에서 고위산(高位山)’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그 봉우리 남쪽에 천룡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천룡사 부근에 석벽이 일부 남아 있음을 근거로 이를 고허성의 흔적으로 보면서고위산은 고허산의 음변(音變)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朴方龍, 1985, 都城·城址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14. 취산(觜山진지촌(珍支村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본서 권신라본기유리이사금 9(32)조에 본피부(本彼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는데후대의 본피부가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동남쪽 낭산(狼山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이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취산 진지촌에 협주를 붙여 진지의 이칭으로 빈지(賓之)’와 빈자(賓子)’를 소개하고 있는데그 가운데 빈자촌의 경우 동경잡기』 각방조에 괘릉(掛陵)으로부터 용가산(龍加山)에 이르는 곳에 빈자방(賓子坊)이 있다고 나와서 참고가 된다이를 근거로 진지촌의 위치를 경주에서 울산 방면으로 나가는 길목의 괘릉 남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塙書房).
  15. 무산(茂山대수촌(大樹村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본서 권신라본기유리이사금 9(32)조에서 대수촌의 후신으로 전한 후대의 점량부(漸梁部모량부)가 경주 시내에서 건천 방면으로 나가는 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을 감안하면이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금산(金山가리촌(加利村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금산이 경주시 동천동에 소재한 산임을 감안하면현재의 동천동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한편 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가리촌의 한자가 加里村으로 표기되었다.
  17. 명활산(明活山고야촌(高耶村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명활산 부근에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명활산 동쪽 기슭의 천군동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연식, 2018, 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고라촌[高耶村]의 위치韓國史硏究』 183).
  18. 진한(辰韓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마한(馬韓), 변한(弁韓변진[弁辰])과 함께 삼한을 이루었다. B.C. 2세기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진국(辰國)’의 후신으로 전한다삼국지』 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 “辰韓者 古之辰國也”). 일반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분포하던 소국들의 연합체로 일컬어지나애초에는 소백산맥 이북의 남한강 중상류 지역의 소국들도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전진국, 2018).
    〈참고문헌
    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삼국사기 사료비판론여유당
    전진국, 2018, 진한의 범위에 대한 재검토韓國古代史硏究』 91
  19. 진한(辰韓)의 6부 알천 양산촌 이하 명활산 고야촌까지를 흔히 사로 6으로 표현하는데삼국사기』 원문의 표현은 진한 6이다신라 건국 이전 경주 지역에 산재했던 여섯 개의 촌을 진한의 6부라고 한 것은 진한을 신라의 전신으로 보는 후대인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삼국사기 사료비판론여유당, 56~59). 6촌을 ‘6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본서 권신라본기혁거세거서간 17(B.C. 41)조의 주석 참조.
  20. 소벌공(蘇伐公삼국유사』 권제기이제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로 나오며하늘로부터 형산(兄山)으로 하강한 존재로 소개되어 있다.
  21. 나정(蘿井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하는 우물로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위치하며사적 제245호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남쪽 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조성윤, 2010, 慶州 蘿井 八角建物址의 創建年代와 存續時期嶺南考古學』 53).
  22. 큰 알이 있었다 건국 시조의 난생(卵生)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 설화에서나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 설화에서도 보인다신라의 경우 석씨의 시조인 탈해 역시 난생의 방식으로 태어났다고 한다난생은 하늘을 나는 조류에게서 볼 수 있는 생식 방식이며따라서 시조 난생 설화는 시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게 될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삼국사기에서 전하는 혁거세 탄생 설화에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이상한 기운이 빛과 같이 땅에 드리웠다라거나 말이 사람들을 보고 길게 울고서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등의 천강과 승천의 설화 모티브가 생략되어 있다.
  23. 큰 알이 … 성으로 삼았다 시조인 혁거세가 표주박을 닮은 알에서 태어난 데서 이라는 성씨가 유래하였다는 이 전승은 후대인의 부회에 해당한다혁거세가 밝은 왕으로 불린 것을 염두에 두고후손들이 의 음에 가까운 한자 을 자신들과 시조의 성씨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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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