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1년 : 기원전 57년
시조 혁거세가 즉위하다 : 기원전 57년 04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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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利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里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利를 따랐다.]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餘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餘를 따랐다.]歳,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辰言王 或云呼貴人之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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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1]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2]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3] 전한 효선제(孝宣帝)[4] 오봉(五鳳)[5] 원년(B.C. 57) 갑자년(甲子年)[6] 4월 병진일(丙辰日)[7] 일설에는 정월 15일[8]이라고도 한다.에 즉위하여 호칭을 거서간(居西干)[9]이라고 하니, 이때 나이가 13세였다. 나라 이름은 서나벌(徐那伐)[10]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朝鮮)[11]의 유민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는데,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12]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13]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14]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15]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16]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17]으로, 이들이 바로 진한(辰韓)[18]의 6부[19]이다.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20]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21]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22]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나이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남들보다 일찍 성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진한 사람들이 표주박[瓠]을 일컬어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에 큰 알이 표주박처럼 생겼으므로, 이로 인해 ‘박’을 성으로 삼았다.[23] 거서간은 진한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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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 : 혁거세(赫居世)는 신라의 건국 시조로, 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본서와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B.C. 69년에 탄생하여, 13세가 되던 B.C. 57년에 신라의 왕위에 올랐고, 그로부터 만 60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승하하였다. 경주 지역의 선주 세력인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알영(閼英)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죽어서 오릉(五陵)에 묻혔는데,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남해(南解)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 거서간(居西干)은 혁거세에게 붙여진 신라 고유의 왕호이다.
- 시조의 성은 박(朴)이고 : 시조 혁거세의 성씨가 ‘박’이었다는 것은 혁거세 당시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이 시기에는 중국식 성씨 제도가 도입되지 않아 성씨의 개념 자체가 없었고, 단지 이름만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표현하였다. 6세기까지 만들어진 신라의 금석문 자료에 지배층의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한다. 『양서(梁書)』 신라전에는 521년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법흥왕을 ‘모진(募秦)’이라고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나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아예 왕의 성이 ‘모(募)’인 것처럼 잘못 전하고 있다. 이 역시 적어도 6세기 전반까지는 신라 왕실에서 중국식 성씨 관념에 따라 성을 칭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중국 측 기록에서 신라의 왕성(王姓)이 확인되는 것은 565년에 북제(北齊)가 진흥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使地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면서 왕의 이름을 ‘김진흥(金眞興)’이라고 표시한 것이 최초 사례이다. 6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국과 직접 교섭이 활발해지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김’이라는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박’의 경우도 대략 이 시기 이후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李純根, 11~26쪽). 그렇지만, 비록 박씨라는 성씨의 사용 시기는 늦더라도, 혁거세를 정점으로 하여 형성된 혈연집단이 상고기에 신라의 최고 지배층으로 존재했을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학계에서는 이들을 편의상 ‘박씨 집단’, ‘박씨 족단(族團)’ 등의 이름으로 칭하고 있다.〈참고문헌〉李純根, 1980,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 『韓國史論』 6,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姜鳳龍, 1995, 「新羅 中古期 部의 性格 變化와 姓氏制」, 『典農史論』 1
-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 혁거세의 ‘혁(赫)’은 ‘붉다’, ‘밝다’, ‘빛이 나다’는 의미를 지니는 한자어이다. 성씨로 알려진 ‘박’도 ‘밝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박혁거세’의 ‘박혁’은 같은 말의 중복이 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불구내왕(弗矩內王: 붉은 왕, 밝은 왕)’이라는 이칭이 전하는데, ‘赫’이 ‘붉’, ‘밝’의 훈차(訓借)임을 잘 보여준다. ‘거세(居世)’는 ‘거서간’에서 ‘간’을 수식하는 용어 ‘거서(居西)’를 후대인들이 시조 이름의 일부라고 오해한 것에서 비롯된 동어반복으로 파악하기도 한다(李丙燾, 1976, 「新羅의 起源問題」,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97쪽).
- 효선제(孝宣帝) : 중국 전한(前漢)의 황제로 B.C. 74년 7월에 즉위하여 B.C. 49년 12월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중 ‘본시(本始)’, ‘지절(地節)’, ‘원강(元康)’, ‘신작(神爵)’, ‘오봉(五鳳)’, ‘감로(甘露)’, ‘황룡(黃龍)’ 등의 연호를 차례로 사용하였다.
- 오봉(五鳳) : 전한 효선제 때의 연호로, B.C. 57년부터 54년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 갑자년(甲子年) : 60간지의 첫해로, 참위설(讖緯說)에서 3년 전에 해당하는 ‘신유년(辛酉年)’과 함께 ‘혁명’의 해로 일컬어진다(갑자혁명설). 혁거세의 즉위 시기가 ‘갑자년’으로 전해지게 된 배경으로는, 진흥왕 대에 신라의 역사가 처음 정리될 때, 혁거세의 실제 즉위 시점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사관들이 갑자혁명설에 기대어 임의로 정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今西龍, 8~10쪽; 李基白·李基東, 141쪽; 강종훈, 294~296쪽). 한편 혁거세가 B.C 57년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신라 초기사를 정리하는 학자들도 있다(金元龍, 4~13쪽; 李鍾旭, 16쪽).〈참고문헌〉今西龍, 1933, 『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金元龍, 1976, 「斯盧六村과 慶州古墳」, 『歷史學報』 70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 古代篇』, 一潮閣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강종훈, 2017, 「고구려보다 빠른 신라 건국 기록」, 『한국고대사산책』, 역사비평사
- 4월 병진일(丙辰日) : 『二十史朔閏表』(陳垣, 1962, 中華書局, 19쪽)에 따르면, 오봉 원년 4월은 삭일(朔日) 즉 음력 초하루가 ‘기축(己丑)’일로 나온다. 따라서 병진일은 4월 28일이 된다.
- 정월 15일 : 새해의 첫 보름날에 해당하며, 세시풍속에서 지금도 정월 대보름이라는 이름으로 중시된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사금갑(射琴匣)조에는 신라에서 정월 15일을 ‘오기지일(烏忌之日)’이라 부르며 찰밥을 지어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고 전하는바, 시조의 즉위 시점을 정월 15일로 전하는 일설은 이런 풍속에 구애된 것일 수도 있다. 참고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도 율령에 의거한 지방민 처벌 논의가 정월 15일에 이루어진 것으로 나오고 있어, 새해를 맞아 처음 6부의 지배층이 함께 모여 국정을 협의한 날짜가 정월 15일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데, 혹시 이러한 관행이 혁거세의 즉위 시점을 정월 15일로 상정하는 데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李文基, 1989, 「蔚珍鳳坪新羅碑와 中古期 六部問題」, 『韓國古代史硏究』 2, 143~145쪽).
- 거서간(居西干) : 신라 시조 혁거세에게 붙여진 왕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거슬한(居瑟邯)’으로도 나온다. 그 의미는 미상이나, 본서 혁거세거서간 즉위조의 말미에서는 진한인들이 왕을 일컫는 말이었다고 하면서, ‘귀인(貴人)’을 칭하는 말이라는 설도 소개하였다. 본서에서는 혁거세에게만 한정된 왕호로 나오지만, 『삼국유사』의 왕력편과 기이편에서는 그의 뒤를 이은 남해(南解)도 ‘차차웅’이라는 왕호와 더불어 ‘거서간’으로 불렸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 서나벌(徐那伐) : 지금의 경주 지역을 가리키는 신라 때의 지명이다. 신라가 건국된 곳으로, 애초에는 국명으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의미는 미상이다. ‘서나’는 금석문 자료나 중국 측 문헌 자료에 ‘사라(斯羅: 「포항 냉수리 신라비」, 『양서』 등)’, ‘사로(斯盧: 『삼국지』 한전)’, ‘설라(薛羅: 『진서』)’ 등으로도 나오는데, ‘가라(加羅)’가 흔히 ‘가야(加耶)’로도 표기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라(徐羅)’의 이표기로서 ‘서야(徐耶)’가 자형이 유사한 ‘徐那’로 오기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실제로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신라조에는 “國號曰徐耶伐 或云斯羅 或云斯盧 或云新羅”라고 하여 ‘徐那伐’이 아닌 ‘徐耶伐’로 나온다.
- 조선(朝鮮) :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 여기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로서 위만조선을 가리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사에 의하면, 위만조선 말기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한(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때를 전후하여 많은 수의 유이민이 한반도 중·남부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 각지에서 B.C.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고조선 계통의 유적·유물이 다수 확인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73~74쪽).
-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의 첫머리에는 알천 양산촌에 대한 주석이 붙어 있는데, 남쪽에 담엄사(曇嚴寺)라는 절이 있다는 내용이다. 또 이 조의 말미에는 혁거세의 유체를 묻은 오릉이 담엄사의 북쪽에 있다는 전승이 실려 있다. 이를 감안하면, 알천 양산촌의 위치는 지금 경주시 탑동 소재 오릉 일원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참고로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훗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서 ‘남산부(南山部)’로 이름을 바꾼 사량부(沙梁部)가 본래 돌산 고허촌이었다고 한 전승이 실려 있고, 남산부의 소속 촌 가운데 남산 서쪽에 위치한 촌인 마등오촌(麻等烏村)이 들어 있음을 고려하면, 남산의 서쪽 어딘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허(高墟)’라는 지명은 본서 권4 신라본기4 진평왕 48년(631)조에 보이는 고허성 축조 관련 기사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확인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천룡사조를 보면, 남산의 남쪽에 세간에서 ‘고위산(高位山)’이라고 부르는 봉우리가 있고, 그 봉우리 남쪽에 천룡사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천룡사 부근에 석벽이 일부 남아 있음을 근거로 이를 고허성의 흔적으로 보면서, 고위산은 고허산의 음변(音變)이라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朴方龍, 1985, 「都城·城址」, 『韓國史論』15, 國史編纂委員會).
-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 ‘본피부(本彼部)’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후대의 본피부가 경주 시내를 기준으로 동남쪽 낭산(狼山) 방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 부근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취산 진지촌에 협주를 붙여 ‘진지’의 이칭으로 ‘빈지(賓之)’와 ‘빈자(賓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빈자촌의 경우 『동경잡기』 권2 각방조에 괘릉(掛陵)으로부터 용가산(龍加山)에 이르는 곳에 빈자방(賓子坊)이 있다고 나와서 참고가 된다. 이를 근거로 진지촌의 위치를 경주에서 울산 방면으로 나가는 길목의 괘릉 남쪽으로 비정하기도 한다(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證 上』, 塙書房).
-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에서 대수촌의 후신으로 전한 후대의 점량부(漸梁部: 모량부)가 경주 시내에서 건천 방면으로 나가는 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금산이 경주시 동천동에 소재한 산임을 감안하면, 현재의 동천동 일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가리촌의 한자가 ‘加里村’으로 표기되었다.
-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명활산 부근에 있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활산 동쪽 기슭의 천군동 일대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정연식, 2018, 「신라 초기 습비부(習比部) 고라촌[高耶村]의 위치」, 『韓國史硏究』 183).
- 진한(辰韓) : 기원을 전후한 시기부터 서기 4세기경까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 정치체. 마한(馬韓), 변한(弁韓: 변진[弁辰])과 함께 삼한을 이루었다. B.C. 2세기에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 자리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진국(辰國)’의 후신으로 전한다( 『삼국지』 권30 오환선비동이전 한조, “辰韓者 古之辰國也”). 일반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분포하던 소국들의 연합체로 일컬어지나, 애초에는 소백산맥 이북의 남한강 중상류 지역의 소국들도 진한에 속했을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강종훈, 2011; 전진국, 2018).〈참고문헌〉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전진국, 2018, 「진한의 범위에 대한 재검토」, 『韓國古代史硏究』 91
- 진한(辰韓)의 6부 : 알천 양산촌 이하 명활산 고야촌까지를 흔히 ‘사로 6촌’으로 표현하는데, 『삼국사기』 원문의 표현은 ‘진한 6부’이다. 신라 건국 이전 경주 지역에 산재했던 여섯 개의 촌을 ‘진한’의 6부라고 한 것은 진한을 신라의 전신으로 보는 후대인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56~59쪽). 6촌을 ‘6부’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17년(B.C. 41)조의 주석 참조.
- 소벌공(蘇伐公)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소벌도리(蘇伐都利)’로 나오며, 하늘로부터 형산(兄山)으로 하강한 존재로 소개되어 있다.
- 나정(蘿井) : 혁거세의 탄강지로 전하는 우물로, 경주시 탑동 700-1번지에 위치하며, 사적 제245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상도 경주부 고적조에 “부(府) 남쪽 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4차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팔각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조성윤, 2010, 「慶州 蘿井 八角建物址의 創建年代와 存續時期」, 『嶺南考古學』 53).
- 큰 알이 있었다 : 건국 시조의 난생(卵生)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 설화에서나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 설화에서도 보인다. 신라의 경우 석씨의 시조인 탈해 역시 난생의 방식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난생은 하늘을 나는 조류에게서 볼 수 있는 생식 방식이며, 따라서 시조 난생 설화는 시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하늘로 올라가게 될 존재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혁거세 탄생 설화에는 『삼국유사』에 보이는 ‘이상한 기운이 빛과 같이 땅에 드리웠다’라거나 ‘말이 사람들을 보고 길게 울고서 하늘로 올라갔다’라는 등의 천강과 승천의 설화 모티브가 생략되어 있다.
- 큰 알이 … 성으로 삼았다 : 시조인 혁거세가 표주박을 닮은 알에서 태어난 데서 ‘박’이라는 성씨가 유래하였다는 이 전승은 후대인의 부회에 해당한다. 혁거세가 ‘밝은 왕’으로 불린 것을 염두에 두고, 후손들이 ‘밝’의 음에 가까운 한자 ‘朴’을 자신들과 시조의 성씨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