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혁거세 거서간(赫居世 居西干, BC 57 ~ AD 4) 61년 : 기원후 4년
▶ 혁거세거서간이 죽다 : 4년 03월(음)
-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虵[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虵로 되어 있다. 虵는 蛇의 속자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蛇로 표기했다.]陵, 在曇[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는 누락되어 있다. 《삼국유사》권1, 기이(紀異)2, 신라시조(新羅始祖) 혁거세왕(赫居世王)에 의거해 보충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曇을 보충해 넣었다.]巖寺北.
- 61년(4)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升遐)[1]하였다. 사릉(蛇陵)[2]에 장사 지내니, 담암사(曇巖寺)[3]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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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승하(昇遐) : 먼 곳[遐]으로 올라가다[昇]는 뜻으로, 천자(天子)로 대표되는 군주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구려본기의 동명성왕 19년(B.C. 19) 9월조에서는 동일한 의미로서 ‘升遐’라고 썼다. 본서에서는 신라 시조 혁거세와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죽음에 대해서만 ‘승하’라고 기록하였고, 백제의 시조 온조왕을 비롯하여 여타 왕들의 죽음은 제후의 죽음을 가리키는 용어인 ‘훙(薨)’으로 기록하였다. ‘薨’이라는 표현은 삼국의 왕들을 중국의 제후로 바라보는 인식이 반영된 것인데, 혁거세와 동명성왕의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薨’을 피해 ‘승하’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이전 시기부터 내려오던 독자적 천하관의 편린을 보여준다.
- 사릉(蛇陵) :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소재한 오릉(五陵)을 가리킨다. 사적 172호.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그의 아들 제2대 남해차차웅, 그의 아들인 제3대 유리이사금, 그의 아들로 탈해의 뒤를 이어 다시 박씨 왕실의 시대를 연 제5대 파사이사금 등이 묻힌 무덤으로 본서 신라본기에 전한다. 이들 네 명에 시조 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을 더해 도합 5명이 묻혔다고 해서 ‘오릉’이라고 불려왔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단정할 수 없지만, 외견상 적석목곽분에서 흔히 나타나는 표형분을 이룬 무덤도 존재하여, 실제 혁거세 등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으로 보지 않고 5세기 이후에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근직, 2012). 한편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오릉을 혁거세의 다섯 유체를 각각 묻은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인도의 경전 『리그베다』에 나오는 변재천녀(辨才天女) 설화를 차용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文暻鉉, 1972; 이근직, 2012). 관련 설화를 소개하면, “변재천녀가 죽어서 승천하였는데, 7일 만에 유체(遺體)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졌다. 이를 모으고자 하였으나, 큰 뱀이 방해하여 오릉에 묻었다.”이다. 이에 대해 『리그베다』에는 해당 설화가 나오지 않는다는 반박도 제기되어 있다(김기흥, 2015).〈참고문헌〉文暻鉉, 1972, 「新羅 建國 說話의 硏究」, 『大丘史學』 4이근직, 2012,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김기흥, 2015,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실체」, 『통일인문학』 61,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 담암사(曇巖寺)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담엄사(曇嚴寺)’로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조에는 담암사의 ‘옛터’가 사릉의 남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는 이미 폐찰이 되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