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53~146)이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다 [기원후 53년]
[三國史記 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이 나라 사람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다 [53년 11월(음)]
태조대왕(太祖大王)[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宮)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이다. 유리왕(珫璃王)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太后)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고 태자가 못나 사직을 맡기에 부족하자, 나라 사람들이 궁(宮)을 맞이하여 뒤를 이어 왕위에 앉게 하였다. 왕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어려서 조숙하여 뛰어났다. 〔즉위할 때의〕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
- 태조대왕(太祖大王) : 고구려 제6대 왕으로 민중왕 4년(47)에 태어나 차대왕 20년(165)에 사망하였으며, 재위 기간은 53~146년이었다고 전한다. 이름은 궁(宮)인데, 어릴 때의 이름은 어수(於漱)라고 전한다. 아버지는 제2대 유리명왕(琉璃明王)의 왕자로 고추가(古鄒加)를 지낸 재사(再思), 어머니는 부여(扶餘) 출신이라고 전한다. 태조왕이라는 왕호는 대체로 초기부터 사용되었다고 보지만(盧泰敦, 1983, 99쪽; 趙仁成, 64~65쪽), 국조왕(國祖王)으로 불리다가 영양왕 11년(600)에 『신집(新集)』을 편찬하면서 ‘태조대왕’으로 개칭하였다고 보기도 한다(高寬敏, 1996, 123쪽; 林起煥, 2002, 36~39쪽; 朴京哲, 2002, 58~64쪽). 또한 차대왕이 선위를 받은 다음 ‘국조왕’이라는 왕호를 올렸는데, 동천왕이 중국식 묘호(廟號)를 받아들여 ‘태조왕’으로 개칭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김효진, 2017, 5~31쪽). 이처럼 태조왕의 왕명을 비롯하여 세계(世系)와 재위기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설이 전한다. 특히 본서의 계보상 제5대 모본왕과 제6대 태조왕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으며,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의 이름에는 모두 ‘해(解)’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지 해(解)씨 왕계가 이어지다가 태조왕부터 고(高)씨 왕계가 시작되었다고 상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고구려 왕실이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교체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池內宏, 1941; 金龍善, 1980; 李鍾泰, 1990), 일반적으로는 계루부 내 방계(傍系) 왕실의 등장으로 이해한다(金哲埈, 1956; 盧泰敦, 1993; 金賢淑, 1994; 朴燦奎, 2000; 김기흥, 2005). 이와 관련하여 ‘국조왕’과 ‘태조왕’은 대체로 ‘국가나 왕실을 개창한 시조’라는 의미로 ‘첫째 왕’을 뜻한다고 보지만(노태돈, 1999, 78쪽), ‘할아버지 왕[國祖王]’이나(李道學, 194~195쪽; 김기흥, 223~232쪽) ‘큰 할아버지 왕[太祖]’에서(박경철, 2000: 2018, 97쪽)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한편, 본서에는 태조왕이 119세가 되던 165년까지 생존하였다고 나오지만, 『후한서』 권85 열전75 동이 고구려전에는 건광(建光) 원년(121)에 죽고 아들인 수성(遂成; 차대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며, 『삼국지』 권30 위서 30 동이 고구려전에는 그가 죽은 다음 아들 백고(伯固; 신대왕)가 즉위하였다고 나온다. 각 사서마다 생몰년과 이어지는 계보가 다른 것이다. 이에 일본학계에서는 태조대왕~신대왕의 왕계는 중국측 사서를 참조하여 5세기 이후에 삽입한 것이라며 태조왕의 존재를 부정하기도 한다(津田左右吉, 1922; 池內宏, 1940: 1941). 계보와 재위기간에는 다소 문제가 있지만, 그의 계보와 관련한 본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자체 전승이며(鄭早苗, 103~113쪽), 2세기 전반에 활동한 사실도 국내외 사서에서 모두 확인되는 만큼 실존 인물임은 명확하다(盧泰敦, 1994: 1999, 75~80쪽).태조대왕은 국조왕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 국가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된다. 본서에 따르면 68년에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고, 재위 20년(72)과 22년(74)에 각각 조나(藻那)와 주나(朱那)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압록강 중상류의 여러 집단은 왕실인 계루부와 그의 통제를 받는 4나부(那部)로 통합되었다. 이때 계루부가 국왕 중심의 강력한 집권체제를 확립했다고 보기도 하며(李鍾旭, 1982; 金光洙, 1983; 琴京淑, 1995; 朴京哲, 1996), 대체로 계부루가 자치권을 지닌 각 나부와 함께 국가를 운영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盧泰敦, 1975; 林起煥, 1987; 余昊奎, 1992; 金賢淑, 1993). 태조왕은 대외적으로는 동해안 방면의 동옥저 등을 정복하여 동으로는 바다, 남으로는 살수(薩水; 청천강)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1세기 말경에는 제2현도군을 훈허[渾河] 강 방면으로 몰아낸 다음, 2세기 초에는 요동지역을 여러 차례 공략했는데, 재위 69년(121)에는 선비와 연합하여 랴오허[遼河] 강 중하류까지 진공하였다. 이를 통해 후한의 요동군과 낙랑군 등을 강하게 압박하는 한편, 후한과의 외교관계를 재정립해 나갔다. 한편 본서에 따르면 태조왕대 후반에는 동생인 수성(遂成; 차대왕)이 국정 전반과 대외 군사 활동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이에 수성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어 왕위 찬탈을 도모하였다. 재위 94년(146)에 우보인 고복장(高福章)이 수성의 왕위 찬탈음모를 알고 아뢰었으나, 태조왕은 도리어 수성에게 선위(禪位)하고 별궁(別宮)으로 물러나 있다가, 차대왕 20년(165)에 11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참고문헌〉津田左右吉, 1922, 「三国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国大学文学部池內宏, 194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亜学』 3池內宏, 1941, 「高句麗の開国傳說と史上の事實」, 『東洋学報』 28-2金哲俊, 1956, 「高句麗·新羅의 官階組織의 成立過程」,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一潮閣津田左右吉, 1964, 『津田左右吉全集 (12)』, 岩波書店盧泰敦, 1975, 「삼국시대의 ‘部’에 관한 연구」, 『韓國史論』 2이병도, 1977,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金龍善, 1980, 「高句麗 琉璃明王 考」, 『歷史學報』 87李鍾旭, 1982, 「高句麗 初期의 地方統治制度」, 『歷史學報』 94·95金光洙, 1983, 「고구려 古代 集權國家의 成立에 관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盧泰敦, 1983, 「고구려 초기의 娶嫂婚에 관한 일고찰」, 『金哲埈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林起煥, 1987, 「고구려 초기의 地方統治體制」, 『慶熙史學』 14李鍾泰, 1990, 「고구려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성립」, 『北岳史論』 2趙仁成, 1990, 「4·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변화」, 『韓國古代史硏究』 4余昊奎, 1992, 「高句麗 初期 那部統治體制의 成立과 運營」, 『韓國史論』 27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복원을 위한 검토」, 『韓國學論集』 20金賢淑, 1993, 「高句麗 初期 那部의 分化와 貴族의 姓氏-『三國史記』 高句麗本紀內 出現人名 분석을 중심으로-」, 『慶北史學』 16盧泰敦, 1993, 「朱蒙의 出自傳承과 桂婁部의 기원」, 『韓國古代史論叢』 5金賢淑, 1994, 「고구려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丘史學』 47盧泰敦, 1994, 「고구려 초기 王系에 대한 一考察」,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 (上)』, 一潮閣琴京淑, 1995, 「고구려 前期의 정치제도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朴京哲, 1996, 「高句麗의 國家形成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高寬敏, 1996, 『“三国史記”原典的硏究』, 雄山閣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朴燦奎, 2000, 「高句麗太祖王宮考」, 『東疆学刊』 17-4朴京哲, 2002, 「高句麗人의 ‘國家形成’ 認識試論」, 『한국고대사연구』 28林起煥, 2002, 「고구려 왕호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28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이병도, 2012, 『(두계이병도전집 11) 국역 삼국사기』, 한국학술정보김효진, 2017, 「고구려 왕호 ‘태조왕’의 정리 과정과 의미」, 『한국사연구』 178박경철, 2018, 『한국고대사의 재인식』, 서경문화사
- 국조왕(國祖王) : 종래 ‘국조(國祖)’라는 명칭은 새로운 왕조나 왕실을 열었다는 뜻을 지닌 ‘시조(始祖)’나 ‘태조(太祖)’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李鍾泰, 1990: 1996, 25~28쪽 및 노태돈, 76쪽). 이에 대해 태조왕이 장수한 사실에 주목하여 국조왕이라는 왕명이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왕’이라는 뜻에서 유래하였다고 보기도 한다(盧明鎬, 75~76쪽; 李道學, 194~195쪽; 김기흥, 223~232쪽). 한편 태조왕은 본래 ‘국조왕’으로 불리다가, 영양왕 11년(600)에 『신집(新集)』을 편찬하면서 ‘태조대왕’으로 개칭하였다고 보기도 한다(임기환, 36~39쪽; 박경철, 58~64쪽). 또한 차대왕이 선위를 받은 다음 국조왕이라는 왕호를 제정하였는데, 동천왕이 중국식 묘호(廟號)를 받아들여 ‘태조왕’으로 개칭하였다고 보기도 한다(김효진, 5~31쪽).〈참고문헌〉盧明鎬, 1981, 「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東明神話의 再生成 現象과 관련하여-」, 『歷史學硏究』 10李鍾泰, 1990, 「고구려 太祖王系의 등장과 朱蒙國祖意識의 성립」, 『北岳史論』 2李道學, 1992, 「高句麗 初期 王系의 復元을 위한 檢討」, 『韓國學論集』 20李鍾泰, 1996, 「三國時代의 「始祖」認識과 그 變遷」, 국민대 박사학위논문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朴京哲, 2002, 「高句麗人의 ‘國家形成’ 認識試論」, 『한국고대사연구』 28林起煥, 2002, 「고구려 왕호의 변천과 성격」, 『한국고대사연구』 28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김효진, 2017, 「고구려 왕호 ‘태조왕’의 정리 과정과 의미」, 『한국사연구』 178
- 고추가(古鄒加) : 고구려의 관명인데, 고추대가(古鄒大加)라고도 하였다.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에 나오는 초기의 10개 관명 가운데 네 번째로 기술되어 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서는 태조왕의 아버지 재사(再思)처럼 왕족인 계루부의 대가(大加)를 비롯하여 본래 국주(國主)였던 소노부(消奴部)의 적통대인(嫡統大人), 대대로 왕실과 혼인한 절노부(絶奴部)의 대인 등이 고추가를 칭했다고 한다. 고추가는 다른 관등과 달리 왕족, 구왕족, 왕비족 등 특정한 세력가만 칭했다는 것이다. 다만 초기에는 복속된 소국의 왕족에게도 고추가를 수여한 사례가 나온다(본서 권15 고구려본기3 태조왕 22년조). 이에 고추가의 성격을 씨족장(李基白, 17쪽), 대부족장이 귀족화한 것(金哲埈, 127쪽), 특권적 집단의 족장(盧重國, 4~8쪽), 왕에 해당하는 원고구려 지역의 고유어(조영광, 42쪽), 중앙귀족화한 국읍(國邑) 주수(主帥)를 우대하며 사여한 칭호(장병진, 169쪽) 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추가의 본래 성격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여러 사례를 종합하면 관등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예우 차원에서 수여한 봉작(封爵)(리지린·강인숙, 141쪽) 또는 존호(尊號)(노태돈, 152쪽)의 성격이 강하였고, 각 계보집단의 적통을 계승한 대가들이 칭하거나 이들에게 수여했던 것으로 보인다(여호규, 180~183쪽).다만 3세기를 지나면서 고추가는 주로 왕실의 구성원에게 사여한 사례만 확인되는데, 산상왕과 왕위계승전을 벌였던 발기(拔奇)의 아들인 박위거(駮位居),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咄固),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조다(助多), 「충주고구려비」에 나오는 고추가 공(共) 등이 그 사례이다. 이들은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처럼 왕족이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에 고추가의 성격을 왕족을 예우하기 위한 관위로 보거나(琴京淑, 1995: 2004, 90~91쪽), 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실 구성원으로 한정되었고(林起煥, 1995: 2004, 118~120쪽 및 장병진, 169쪽), 특히 계루부 내의 유력 세력을 편제하기 위해 근친 왕족에 대한 봉작으로 그 성격이 변했다고 보기도 한다(조영광, 42~46쪽). 다만 고구려 후기에는 발고추가(拔古鄒加)가 빈객(賓客)을 담당하는 관직으로 태대사자(太大使者; 大夫使者)가 맡았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3세기 중반 이후에도 고추가의 수여 대상이 왕족으로 한정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한다.〈참고문헌〉李基白, 197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리지린·강인숙, 1976, 『고구려 역사』, 사회과학출판사盧重國, 1979, 「高句麗國相考(上)-初期의 政治體制와 關聯하여-」, 『韓國學報』 5-3, 일지사琴京淑, 1995, 「고구려 前期의 정치제도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林起煥, 1995, 「고구려 초기 官階組織의 성립과 운영」, 『慶熙史學』 19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琴京淑, 2004, 『高句麗 前期 政治史 硏究』,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조영광, 2015, 「고구려 초기 관등의 기원과 성격에 대하여」, 『사학연구』 119장병진, 2019, 「고구려의 성립과 전기 지배체제 연구」,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 유리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의 아들이고 : 태조대왕의 아버지로 나오는 재사를 유리왕의 왕자로 제3대 대무신왕과는 이복형제라 보기도 한다(金賢淑, 34~35쪽). 그렇지만 태조대왕의 아버지인 재사가 유리왕의 아들이라면, 현전하는 『삼국사기』의 계보상 태조왕의 나이는 본인의 재위 기간 94년(146)에 대무신왕(27년), 민중왕(5년), 모본왕(6년) 등의 재위기간을 합하여 최소한 130년 이상 생존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태조왕을 재사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로 상정한 다음 그 나이를 80세 전후로 조정하기도 한다(김기흥, 2005, 237~240쪽). 그런데 『위서(魏書)』 권100 열전88 고구려전에는 태조왕 궁(宮)이 제3대 대무신왕으로 비정되는 막래(莫來)의 먼 후손[裔孫]이라고 나올 뿐이다. 이로 보아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를 유리왕의 아들이라고 상정한 것은 태조왕의 계보를 그 이전 왕실의 계보와 연결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는데, 두 계보를 무리하게 연결하는 과정에서 태조왕의 재위기간이 과도하게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金哲埈, 47쪽; 노태돈, 80~84쪽). 다만 태조왕이 1세기 말경부터 활동한 사실은 국내외 사서에서 모두 확인되는 만큼 80~90년경에는 왕위에 즉위한 것으로 추정된다(여호규, 2010: 2014, 253~258쪽). 최근에는 고구려가 기원전 2세기에 건국했다고 오인한 중국측 사가들이 태조왕 궁을 막래의 예손(裔孫)이라고 잘못 기록했다고 본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김성현, 19~25쪽). 한편 재사를 고구려 왕계 이외의 인물이나(鄭早苗, 111쪽) 시조 주몽으로부터 극씨(克氏)를 사여받았다는 모둔곡(毛屯谷)의 재사로(金基興, 1990, 215~218쪽; 강경구, 132~139쪽; 조영광, 105~107쪽) 보기도 한다.〈참고문헌〉金哲埈,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鄭早苗, 1979, 「高句麗王系小考」, 『旗田巍博士古稀朝鮮歷史論集 (上)』, 龍溪書舍金基興, 1990, 「고구려의 국가형성」,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 민음사金賢淑, 1994, 「고구려의 解氏王과 高氏王」, 『大丘史學』 47노태돈, 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강경구, 2001, 『고구려의 건국과 시조숭배』, 학연문화사김기흥, 2005, 「고구려 국가형성기의 왕계」, 『고구려의 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여호규, 2010, 「고구려 초기의 왕위계승원리와 고추가」, 『동방학지』 150조영광, 2012, 「高句麗 初期의 國家 形成」, 경북대 박사학위논문여호규, 2014,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서원김성현, 2020, 「中國史書에 나타난 高句麗 初期 王系와 宮의 裔孫化」, 『고구려발해연구』 66
- 왕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고 :『삼국지』 권30 위서30 동이 고구려전의 “其曾祖名宮, 生能開目視, 其國人惡之, 及長大, 果凶虐, 數寇鈔, 國見殘破. 亦能開目視人, 句麗呼相似爲位, 似其祖, 故名之爲位宮. 位宮有力勇, 便鞍馬, 善獵射.”라는 기사의 일부를 옮겨 적은 듯하다. 『삼국지』찬자는 고구려인들이 태조왕 궁이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게 된 것을 미워했다고 기술했지만, 동천왕의 이름을 증조부인 태조왕의 이름을 따서 ‘위궁(位宮)’이라 한 것으로 보아 오히려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볼 수 있었던 것’을 용감한 영웅의 상징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