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AD 80~112) 5년 : 기원후 84년
▶ 관리를 임명하다 : 84년 02월(음)
- 五年, 春二月, 以明宣爲伊湌, 允良爲波珍湌.
- 5년(84) 봄 2월에 명선(明宣)註 001[1]을 이찬(伊飡)[2]으로 삼고, 윤량(允良)[3]을 파진찬(波珍飡)[4]으로 삼았다.
▶ 고타군주가 푸른 소를 바치다 : 84년 05월(음)
- 夏五月, 古陁郡主獻靑牛.
- 〔5년(84)〕 여름 5월에 고타군주(古陁郡主)[5]가 푸른 소[靑牛]를 바쳤다.
▶ 풍년이 들다 : 84년 05월(음)
- 南新縣夌[정덕본에는 夌으로 되어 있고, 《삼국사절요》·주자본·을해목활자본에는 麥으로 되어 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는 麥을 따랐다.]連歧. 大有年, 行者不賷糧.
- 〔5년(84)〕 남신현(南新縣)[6]에서 보리가 이어지면서 갈라졌다.[7] 크게 풍년이 들었다. 길을 나선 사람들이 식량을 갖고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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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명선(明宣)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여기 외에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 이찬(伊飡) : 신라 경위 17관등제의 제2등에 해당하는 관등.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 윤량(允良)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파사이사금 14년(93) 정월조에는 이찬으로 승진 임명된 기사가 보인다.
- 파진찬(波珍飡) : 신라 경위 17관등제의 제4등에 해당하는 관등.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 고타군주(古陀郡主) : 고타군은 지금의 경북 안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신라의 군으로,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 고창군조에 “고창군(古昌郡)은 본래 고타야군(古陀耶郡)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창군으로〕 바꿨고, 지금[고려시대]은 안동부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본서에서 고타군과 관련된 기사로는 본 기사 외에, 권2 조분이사금 13년(242)조에 고타군에서 상서로운 벼이삭[嘉禾]를 바쳤다는 기사와 권3 소지마립간 22년(500) 9월조에 왕이 지금의 경북 영주 지역인 날이군에 행차하다가 고타군을 들렀다는 기사가 있다. 본 기사에서의 고타군주는 탈해이사금 11년 정월조에 박씨 귀척(貴戚)들로 하여금 국내 주, 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는 기사와 연계하여 이해한다면, 박씨 족단을 비롯한 주요 족단의 인물로서 안동 지역으로부터의 공납 수취를 책임지고 있던 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남신현(南新縣) :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한자로 ‘남쪽에 새로 설치한 현’이라는 의미를 지님에 유의한다면 신라 영역의 남쪽에 위치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현(縣)은 신라의 지방 행정 단위로는 군(郡) 아래에 두어진 것인데, 6세기까지 금석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대체로 7세기 이후에 주-군-현제가 구비되면서 비로소 사용된 명칭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기사에서의 남신현도 신라 초기에 실제도 있었던 명칭이라기보다는 후대의 윤색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남신현 관련 기사는 이외에도 벌휴이사금 3년 7월조, 나해이사금 27년(220) 4월조에도 나오는데, 각각 ‘가화(嘉禾)’를 진상했다거나 죽었던 자가 한 달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내용으로 모두 신이한 일과 관계된 것들이다.
- 보리가 이어지면서 갈라졌다 : 곡물의 이삭이 갈라지면서 한 줄기에 두 개가 나타나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상서(祥瑞)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주로 대풍년과 관련된 기사에서 등장한다. 여기서는 보리의 이삭이 둘로 갈라졌다고 나오는데, 신라본기의 다른 곳에서는 ‘가화(嘉禾)’라고 하여 벼 이삭이 둘로 갈라지거나 뿌리와 줄기는 다른데 이삭이 하나로 합쳐진 것을 바쳤다는 기사들이 신라 역사 전 시기에 걸쳐 종종 보인다(남신현(벌휴이사금 3년 7월조), 고타군(조분이사금 13년(242)조), 다사군(유례이사금 11년 7월조), 대산군(눌지마립간 36년(452) 7월조), 완산주(효소왕 6년 7월), 웅주(헌강왕 6년 8월조)). 참고로 ‘가화’의 진상 기사는 고구려본기에도 나오는데, 양원왕 4년 9월에 과거의 수도였던 환도(丸都)에서 가화를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