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대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AD 80~112) 1년 : 기원후 80년
▶ 파사이사금이 즉위하다 : 80년 09월(음)
- 婆娑尼師今立. 儒理王第二子也 㦯云儒理第[정덕본·을해목활자본에서는 第로 되어 있고, 주자본에는 弟로 되어 있다. 문맥상 弟가 옳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에서도 弟를 따랐다.]柰老之子也.. 妃金氏史省夫人, 許婁葛文王之女也. 初脫解薨, 臣僚欲立儒理太子逸聖, 或謂“逸聖雖嫡嗣, 而威明不及婆娑.” 遂立之. 婆娑節儉省用而愛民, 國人嘉之.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1]이 왕이 되었다. 유리왕(儒理王)[2]의 둘째 아들[3]이다. 혹은 유리의 아우인 나로(奈老)[4]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왕비는 김씨 사성(史省) 부인[5]으로, 허루(許婁) 갈문왕(葛文王)[6]의 딸이다.처음에 탈해(脫解)가 세상을 떠나자 신료들이 유리왕(儒理王)의 태자인 일성(逸聖)[7]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으나, 혹자가 말하기를, “일성이 비록 적통을 이은 후사이기는 하지만,[8] 위엄과 총명이 파사(婆娑)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드디어 파사를 왕으로 세웠다. 파사는 절약하고 검소하며 씀씀이를 줄여 백성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국인(國人)[9]들이 좋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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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 신라 제5대 왕. 본서에 따르면, 탈해이사금의 뒤를 이어 서기 80년에 왕위에 올라 112년에 사망하였다. 계보상으로는 시조 혁거세의 혈통을 이어받은 박씨 족단의 인물로, 이 기사와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서는 제3대 왕인 유리왕(노례왕)의 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 기사에 이어 나오는 협주에는 유리왕의 아우인 나로(奈老)의 아들이었던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본서에 전하는 바로는 총명하고 위엄이 있던 덕분에, 형으로 전하는 일성(逸聖)에 앞서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 왕위는 아들인 지마에게 전해졌다.
- 유리왕(儒理王) : 신라 제3대 왕.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즉위조의 주석 참조.
- 둘째 아들 : 유리왕의 맏아들이 아니라 ‘둘째 아들’이라고 전한 것은 파사이사금이 즉위할 당시 박씨 족단에서의 위상이 단단하지 않았거나, 그보다 우선하여 계승할 권리를 가진 자가 따로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원칙이 세워진 후 역사서가 편찬되면서,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를 기술할 때는 대체로 이러한 식의 즉위 배경을 내세우곤 하였다. 특히 본서 백제본기에서는 이전 왕과 혈통적으로 계보가 직결되지 않을 경우, 상투적으로 새로운 왕을 전 왕의 ‘둘째 아들’로 소개하였는데, 고이왕(古爾王), 비류왕(比流王), 근초고왕(近肖古王), 무령왕(武寧王) 등이 그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들을 감안하면, 본 기사에서 파사이사금을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 것도 양자가 실제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가 아님을 감추기 위한 서술 방식으로도 볼 수 있다. 뒤이어 나오는 협주에서 유리왕의 아우인 나로의 아들이라는 전승이 따로 전하는 것 역시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여지가 있다.
- 나로(奈老) : 신라 초기에 활동한 인물로, 본 기사에서 유리왕의 아우로 전할 뿐, 다른 곳에서는 따로 보이지 않는다.
- 사성(史省) 부인 : 파사이사금의 왕비로, 파사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지마이사금의 어머니이다. 본 기사에서는 허루(許婁) 갈문왕의 딸로서 성씨는 ‘김(金)씨’라고 전하는데, 막상 허루는 앞선 유리이사금 즉위조에서는 유리왕의 장인으로서 ‘박씨’였다고 하여, 성씨에 관한 전승에 착종이 나타난다. 한편 사성 부인은 『삼국유사』 권제1 왕력제1에는 ‘사초(史肖) 부인’으로 나오는데, ‘省’과 ‘肖’가 자형이 유사함을 감안하면, 필사나 판각 과정에서 오류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상정된다.
- 허루(許婁) 갈문왕(葛文王) : 앞서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즉위조에는 유리이사금의 부인인 ‘박씨’의 아버지로서 ‘허루왕(許婁王)’으로 나온 바 있는데, 여기서는 파사이사금의 비(妃)인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의 아버지로서 ‘갈문왕(葛文王)’이었다고 나와 차이를 보인다. 뒤에 지마이사금 즉위조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는데, 파사이사금 당시 한기부(韓岐部)의 ‘이찬(伊湌)’이었다가 태자인 지마의 부인을 간택하는 과정에서 ‘주다(酒多)’ 즉 각간(角干)의 지위를 얻었다고 한다. 갈문왕에 대해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15년(148)조의 주석 참조.
- 일성(逸聖) : 신라 제7대 왕. 유리이사금의 맏아들로 전해지며, 파사이사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지마이사금이 아들이 없이 죽자,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일성이사금 즉위조의 주석 참조.
- 일성이 비록 적통을 이은 후사이기는 하지만 : 왕위 계승에 있어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원칙이 세워진 후 역사서가 편찬되면서, 그에 해당하지 않는 사례를 기술할 때는 대체로 이러한 식의 즉위 배경을 내세우곤 하였다. 이 부분은 후대인의 윤색이 가미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실제 사실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국인(國人) :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국민(國民)’과는 구별되는 개념으로, 전근대 시기에 군주를 도와 국가 경영에 참여한 지배층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원래 ‘대읍(大邑) 내에 거주하는 인(人)’을 ‘국인(國人)’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참고로 ‘민(民)’은 ‘군(君)’에 대한 상대 개념으로서, 대체로 군주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