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24년 : 기원후 80년
▶ 큰 바람이 불고 금성의 동문이 무너지다 : 80년 04월(음)
- 二十四年, 夏四月, 京都大風. 金城東門自壊.
- 24년(80) 여름 4월에 경도(京都)에 큰 바람이 불었다. 금성(金城)[1]의 동쪽 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 탈해이사금이 죽다 : 80년 08월(음)
- 秋八月, 王薨. 葬城北壤井丘.
- 〔24년(80)〕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2]에서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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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금성(金城) : 신라 초기의 왕성.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21년(B.C. 37)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양정(壤井) 언덕 : 신라 왕성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서는 탈해를 ‘소천(䟽川)의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였고, 같은 책 왕력제1에서는 ‘미소소정(未召䟽井)’의 언덕에 수장(水葬)했다고 한다. 한편, 지금의 경주시 동천동 산17번지에 있는 소형 고분이 ‘탈해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사적 제174호로 지정된 이 고분은 1974년 도굴 사건을 계기로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6세기 이후 조성된 횡혈식 석실분으로 판명되었으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의 기사 가운데 문무왕 대에 이르러 소천(䟽川) 언덕의 탈해 무덤을 파내어 뼈를 수습한 후 부수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고려하면, 실제의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姜仁求, 301~303쪽; 이근직, 169~172쪽).〈참고문헌〉姜仁求, 1984, 「新羅王陵의 再檢討(2) -脫解王陵」,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 尹武炳博士回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2000, 『古墳硏究』, 학연문화사이근직, 2012,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