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3년 : 기원후 59년
▶ 토함산에서 이적이 나타나다 : 59년 03월(음)
- 三年, 春三月, 王登吐含山, 有玄雲如蓋, 浮王頭上, 良久而散.
- 3년(59) 봄 3월에 왕이 토함산(吐含山)[1]에 올랐는데, 검은 구름이 마치 덮개 모양으로 왕의 머리 위에 떠 있다가 한참 뒤에 흩어졌다.
▶ 왜와 우호 관계를 맺다 : 59년 05월(음)
-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 〔3년(59)〕 여름 5월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2] 사신을 교환하였다.
▶ 살별이 나타나다 : 59년 06월(음)
- 六月, 有星孛于天舩.
- 〔3년(59)〕 6월에 천선(天船) 자리[3]에 살별[星孛]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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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토함산(吐含山) : 경주시의 동쪽에 위치한 산.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있는 산으로 유명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조에는 “부(府)의 동쪽 3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토함산은 통일신라 시기의 사전(祀典) 체계에서 중사(中祀)인 5악(五岳) 가운데 ‘동악(東岳)’에 해당하였다(본서 권32 잡지1 제사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제4 탈해왕(第四脫解王)조에는 문무왕 때인 조로(調露) 2년(680)에 왕의 꿈에 탈해가 나타나 소천구(䟽川丘)에 있는 자신의 무덤에서 뼈를 파내서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고 하기에 왕이 그 말을 따랐다고 되어 있다. 탈해의 사당은 조선 전기까지 남아 있었음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사묘(祠廟)조의 “석탈해사(昔脫解祠)는 동악(東嶽)의 정상에 있다.”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본 기사에서 토함산은 탈해와 관련하여 이적(異蹟)이 일어난 장소로 등장하는데, 『삼국유사』 등에도 탈해의 신통함을 보여주는 다른 설화들의 무대로 나오고 있어, 그의 사후 오랜 기간 석씨 족단의 성지로서 숭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李基白, 1974, 「新羅 五岳의 成立과 그 意義」,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6~198쪽). 문무왕 대에 토함산에 탈해의 사당을 세우고 그를 동악신(東岳神)으로 받든 배경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 왜는 본서 권1 신라본기1 혁거세거서간 8년조에 신라의 변경을 침범하려다 돌아간 것으로 처음 나온 이래, 같은 권 남해차차웅 11년(14)조에도 병선 수백 척을 보내 해안을 약탈한 것으로 전하는데, 이때 이르러 신라와 처음 우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의 ‘왜국’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 천선(天船) 자리 : 천선 자리는 중국 고대 천문관에서의 28수(宿) 가운데 서방 백호 7수(宿)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별자리로, 8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서양 천문학에서는 페르세우스자리와 기린자리에 걸쳐 있는 별자리이다. 천선 자리에 살별이 나타났다고 하는 기사는 『후한서』 권2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A.D. 60) 6월 정묘조에 같은 내용으로 확인되는데, 본 기사와는 1년의 오차가 있다. 이런 오차는 『후한서』의 해당 기사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로 판단된다. 본서에서 이 기사를 실은 특별한 이유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