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AD 57~80) 2년 : 기원후 58년
▶ 호공을 등용하다 : 58년 01월(음)
- 二年, 春正月, 拜瓠公爲大輔.
- 2년(58) 봄 정월에 벼슬을 내려 호공(瓠公)을 대보(大輔)로 삼았다.[1]
▶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다 : 58년 02월(음)
- 二月, 親祀始祖廟.
- 〔2년(58)〕 2월에는 시조묘(始祖廟)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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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호공(瓠公)을 … 삼았다 : 호공(瓠公)의 이름에서 ‘瓠’는 우리말로는 ‘박’이 된다. 이를 근거로, 호공은 박씨 족단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張彰恩, 2004, 「新羅 朴氏王室의 分岐와 昔氏族의 執權過程」, 『新羅史學報』 1, 48~49쪽). 본 기사는 박씨 족단을 대표하는 존재로서의 호공에게 이사금에 다음가는 위상을 갖게 함으로써, 박씨와 석씨 양 족단의 연합을 공고하게 하려 한 정책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호공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시조 혁거세거서간 38년(B.C. 20) 2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시조묘(始祖廟)에 … 지냈다 : 시조묘는 남해차차웅 때 설치한 것으로 전하는 사당으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를 제향하였다. 석씨의 ‘시조’인 탈해가 즉위 후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혈연적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낸 것이 아닐 터이므로, 처가라고 할 수 있는 박씨 족단의 시조이자 신라의 건국 시조인 혁거세를 대상으로 국가 차원의 제례를 거행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기존의 박씨 족단과 후래(後來) 석씨 족단의 연합이 공고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대내외에 드러내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조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남해차차웅 권1 신라본기1 3년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