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1일 월요일

[로마 제국] 제29대 황제 : 필리푸스 아라부스(Philippus Arabus, 244~249)

29대 황제 : 필리푸스 아라부스(Philippus Arabus, 244~249)

 

  • 로마 제국의 제29대 황제
  • 재위 : 2442~ 2499
  • 출생 : 204년 경
  • 사망 : 2499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라틴어 : Marcus Iulius Philippus Augustus)244년부터 249년까지 통치하였던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별칭은 필리푸스 아라브스(라틴어: Philippus Arabs)이다.

 

시리아 베두인족 출신으로,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이후로 처음으로 로마 황제가 된 아랍인이다. 건국 천년제를 연 로마 황제로 5년간의 짧은 치세동안 3세기 중 가장 안정적으로 통치한 점이 높게 평가받고 있다. 허나 고대 로마의 종교와 관습을 중요시한 모습에도, 사후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왜냐하면 의문이 가득한 제위 계승 과정,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 아래에서 티메시테우스와 함께 벌인 정치공작 등으로 이미지가 나빴던데다, 유능한 행정능력과 별개로 제 식구 감싸기와 가문 신격화 조치, 갈라치기식 정치행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정적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초기 행적]

 

친형 프리스쿠스와 함께 시리아 일대의 토호 집안 출신답게, 전형적인 로마식 교육을 받고 성장했으며, 프리스쿠스가 먼저 로마로 건너가 관료생활을 하면서 로마정계에서 경력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형 프리스쿠스가 241년 임페리움을 가진 근위대장이 된, 실권자 티메시테우스의 오른팔이었고, 프리스쿠스가 1년 뒤인 242년 동료 근위대장에 취임한 까닭에 필리푸스 역시 이 무렵부터 내각 일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242]

 

242년 티메시테우스가 사위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대동해 벌인 페르시아 원정에 참가했다가 243년 티메시테우스가 죽자 후임 근위대장에 임명되었다.

 

[황제 즉위에 대한 설]

 

병사들을 선동해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죽음 후 낙담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는 설과 고르디아누스 3세가 전사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고 황제로 즉위했다는 설로 나뉜다.

 

[샤푸르 1세와 강화를 체결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이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로마로 돌아가서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와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군대를 철수시켜야 했다. 필리푸스는 로마군이 점령한 영토를 페르시아에게 돌려주고 아르메니아가 페르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또한 그는 금화 50만 데나리우스를 페르시아에게 배상금 명목으로 바치는 데 동의했다. 그는 이 배상금 지불을 위해 동방 속주에 막대한 세금을 물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요동쳤고 병사들은 다 이겨가던 전쟁을 중단시킨 데다 굴욕적인 강화를 맺은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물론 필리푸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다. 고르디아누스 황제 사망 후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고, 어서 로마로 돌아가서 황제로서 입지를 굳혀야 했으니까.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맺고 동방 속주에 가혹한 세금을 매겨 민심을 동요케 한 것은 제국과 그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 중대한 실책이었다.

 

[로마 건국 천년제]

 

필리푸스는 형 프리스쿠스를 동방 총독으로 남기고 처남 세베리아누스를 모이시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244년 늦여름 로마에 도착했고 원로원으로부터 황제 즉위를 승인받았다. 필리푸스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고 아내 오타킬리아 세베라를 황후로 지명했으며 아버지 마리누스를 신격화했다.

 

로마로 돌아온 뒤 로마 건국 천년제를 치룬다. 248421일 로마 건국 천년제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기념 동전이 대량으로 발행되었고 온갖 연극과 행사가 개최되었다. 당대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검투사 천 명이 콜로세움에서 관객들을 위해 희생되었고 표범, 하마, 사자, 코뿔소 등 수백마리의 동물이 죽었다고 한다.

 

[248] 반란, 내전, 죽음

 

248년 말, 고트족과 콰디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략했고 마르시아노폴리스를 포위했다. 또한 동방에서는 필리푸스가 부과한 막대한 세금에 반발한 시민들이 마르쿠스 요타피아누스의 지휘에 따라 폭동을 일으켰으며, 다뉴브 강변 로마군도 파카티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필리푸스는 일단 발칸 반도 문제부터 수습하기로 하고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 데키우스에게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데키우스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필리푸스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249년 봄 반란을 일으켜 로마로 진군했다.

 

필리푸스는 249년 여름 어려운 상황에서도 군대를 가까스로 모아 데키우스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결국 그는 그해 9월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절망에 빠진 채 자살했다. 원로원은 데키우스의 즉위를 승인하고 필리푸스를 기록말살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필리푸스에 대한 재평가]

 

필리푸스가 재평가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5년여의 재위기간이 놀라울 정도로 안정적이고 제국의 불안한 점을 한계가 명확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유지한 부분이 거론된다. 또 그가 후임자 데키우스와 달리, 기독교를 로마의 일부로 포용하면서도 로마의 전통과 로마인이라는 자부심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한 부분도 그가 재평가받는 이유다.

 

이런 재평가와 별개로 필리푸스의 지나친 포용정책 외에는 꽤나 무능했고 비열한 구석이 많이 있었다. 필리푸스는 행정적으로 유능했는데 로마 전통과 관습 회복을 주장하면서, 원로원과 로마 지식인 사회를 끝없이 내편, 네편으로 이분화시켜 갈등을 황제가 유발시키고 여론의 불만은 빵과 서커스 제공으로 잠재우면서 공작정치를 벌이는 등 비겁한 통치술을 많이 사용했다. 또 페르시아와의 굴욕 협상 이후 벌인 지나친 증세와 동방에서 벌인 무자비한 착취에 가까운 세금징수 방식, 다뉴브 강 일대의 게르만족과의 일방적인 협상 파기로 벌어진 서방 일대에서의 위기 고조, 고향에서의 대대적인 개인 신격화 조치와 가족 신격화 조치 등도 문제가 많았다.

 

[가족관계]

 

  • 배우자 :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
  • 자녀 : 마르쿠스 율리우스 필리푸스 세베루스 (필리푸스 2, 238249)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5대 진지왕(眞智王, AD 576~579) 4년 : 기원후 579년

제 25 대 진지왕 ( 眞智王,  AD 576~579) 4 년 : 기원후 579 년   ▶ 백제가 성을 쌓아 길을 막다 : 579 년 02 월 ( 음 )   四年 , 春二月 , 百濟築熊峴城 · 松述城 , 以梗䔉 山城 · 麻知峴城 · 內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