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대 황제 : 데키우스(Decius, 249~251)
- 로마 제국의 제30대 황제
- 재위 : 249년 9월 ~ 251년 6월
- 출생 : 201년 경
- 사망 : 251년 6월
데키우스(Trajan Decius, 라틴어 : Gaius Messius Quintus Decius Augustus)249년부터 251년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데키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군사, 행정 쪽에서도 두각을 드러냈고 인품도 괜찮았던데다 교양도 상당히 훌륭한 장군이었고, 전형적인 2세기 후반 ~ 3세기 초반기의 원로원 귀족임에도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와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따라서 데키우스는 원로원과의 관계는 돈독했고, 세베루스 왕조가 사라진 이후에도 정치적 혼란기 속에서도 자신이 무너뜨린 필리푸스에게도 신뢰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황제로 추대되다]
245년경, 데키우스는 필리푸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다뉴브 방면군 사령관에 부임했다. 데키우스는 248년에 모이시아와 판노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파카티아누스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그가 이끄는 군대는 그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동로마 제국의 역사가 조시무스에 따르면 데키우스는 병사들이 자신을 추대한 뒤 건낸 보랏빛 망토을 걸친 상태에서 한동안 주저하다가 숙고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데키우스는 무너져 내려가는 국가의 재건과 부활을 기치로 내걸고 249년 봄 로마로 진격했다.
[로마에서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다]
249년 9월(또는 10월),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격돌한 데키우스는 그리스 마케도니아 지방의 상업중심지로 알려진 베로에아에서 정면으로 맞붙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데키우스에게 전투에서 패한 필리푸스는 부하들의 배신에 절망에 빠져 249년 9월 자살했다. 이후 이 소식은 로마에 전해졌는데,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근위대는 필리푸스의 아들 필리푸스 2세를 근위대 병영에서 살해했고 원로원은 데키우스를 황제로 인정한 뒤 트라야누스의 칭호를 그에게 바쳤다.
[로마 재건을 위해 건축을 시도하다]
베로에아 전투 승리 후,데키우스는 곧바로 로마로 이동해 여러 달 동안 자신의 권력을 다지고 황제로서 해야 할 일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원로원이 선사한 트라야누스라는 칭호를 가문의 이름으로 채택했고, 로마 재건을 위해 수 많은 공공 건축물을 보수하고 신축 건축물을 입안해 건설했다.
[감찰관을 부활시키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황제로서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이미 사라져버린 감찰관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다. 감찰관은 과거에 로마의 존속에 크게 기여했지만, 역대 황제들이 그 직위를 가로채면서 기능이 서서히 왜곡되더니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데키우스는 감찰관을 부활시켜야만 공공의 용기, 고대의 원칙과 풍습, 추상같은 법률의 권위를 회복시킬 수 있다며 원로원들에게 감찰관을 부활시킬 것을 건의했다. 그는 원로원에게 감찰관 선출을 맡겼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발레리아누스를 선출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의 크나큰 신임에 감사를 표시하면서도 자신이 무능해 시대의 부패상을 고칠 수 없으며, 감찰관은 황제의 위엄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신하의 신분으로 그런 엄청난 직무와 권한을 맡을 수 없다며 거부의 뜻을 밝혔다.
[기독교를 박해하다]
250년 1월, 데키우스는 칙령을 발표했다.
“제국의 모든 주민들은 특정일까지 ‘제국의 안전을 위해’ 지역 사회의 제사장들에게 제물을 바쳐야 한다. 주민들은 제물을 바친 후 그들이 명령에 따랐다는 사실을 기록한 증명서를 발급받을 것이다. 이 증명서는 모든 신에 대한 주민의 충성심과 희생제물과 음료, 그리고 희생제를 감독하는 관리의 이름을 증언할 것이다.”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이 날로 쇠약해지고 내란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은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여겼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신들에 대한 종교적 열기를 되살리고 제국에 대한 로마인의 충성심을 끌어올려 제국의 통합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은 황제의 칙령을 거부하고 희생 제물을 바치지 않았고, 데키우스는 이런 그들을 사회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로 취급해 탄압했다. 교황 파비아노, 안티오키아의 주교 바빌라 등 유명 인사가 순교했고,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은둔했으며, 많은 신자들이 배교했다.
[고트족과의 전쟁, 그리고 전사]
250년, 고트족은 다뉴브 강을 건너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했다.[2] 그들은 마르키아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과 살육을 자행한 뒤 니코폴리스를 포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데키우스는 급히 트라키아로 진군해 니코폴리스를 포위한 고트족에 접근했다. 이에 고트족은 포위를 풀고 하에무스 산맥으로 물러났다. 데키우스는 급히 그들을 추격했으나 고트족의 왕 크니바가 돌연 군대를 돌려 맹렬한 기세로 기습했다. 데키우스의 로마군은 이 기습에 당황해 격파되었고 데키우스는 후방으로 물러난 후 군대를 수습했다. 이렇게 로마군을 격파한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했고, 필리포폴리스 수비군 사령관 티투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고트족에게 항복한 뒤 크니바 왕과 동맹을 맺고 데키우스에 대항했다.
하지만 데키우스는 전의를 잃지 않고 군대를 다시 모집한 후 고트족과 합류하려고 진군하고 있던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행군을 차단하고 산꼭대기의 통로를 신임하는 장교들에게 맡긴 후 국경 요새들을 강화하는 한편 고트족의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후 데키우스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해 고트족을 몰아붙였고, 고트족은 점차 괴멸될 위기에 빠진다.
이에 고트족의 왕 크니바는 전리품과 포로들을 모두 내주는 조건으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승리를 확신한 데키우스는 침략자들을 응징하여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겠다고 결심했고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고트족은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251년 6월 모이시아의 아브리투스에서 로마군과 격돌했다.
고트족은 3개 대열로 이뤄져 있었는데, 제3열의 전면은 습지대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이윽고 벌어진 교전 초기에 공동 황제로서 아버지와 함께 제국을 통치했던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데키우스는 아들의 죽음에도 흔들림 없이 군대를 지휘했고, 결국 고트족의 제1열과 제2열이 괴멸되었다. 이에 로마군은 제3열마저 섬멸하려 진군했다. 그런데 그들은 에트루스쿠스의 죽음에 분노해 이성을 상실했는지 제3열 전면에 있는 늪지대로 돌진해 버렸다. 병사들은 늪에 빠져 밑으로 가라앉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병사는 미끄러졌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는 장창을 휘두를 수도 없었다. 반면 고트족은 그런 습지에서 싸우는 게 익숙했다. 그들은 키가 컸고 창이 길었으며, 멀리서도 적군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었다.
결국 로마군은 늪지대에서 허우적대다가 고트족에게 괴멸되었다. 이때 데키우스도 늪지대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전사했고 시신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이로써 데키우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최초로 외적에게 전사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데키우스에 대한 평가]
데키우스는 제국을 통치한 지 2년 만에 다뉴브 강을 건너 이민족을 쫓는 동안 아브리투스에서 배반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지나치게 과감한 공격을 하다가 전사했지만 데키우스는 ‘군사 한 명 잃은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꿋꿋한 모습을 보였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재개했고, 격렬히 싸우다가 마찬가지로 전사했다. -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황제들에 관하여>, 29
데키우스의 평가는 그가 현대까지 논쟁의 대상이 된 조직적 기독교 박해와 달리 상당히 괜찮다고 당대 로마인들부터 현대까지 평가받고 있다. 그 이유는 데키우스 역시 막시미누스, 필리푸스 아라부스처럼 군인 출신임에도 군사경험, 군사적 재능이 두 전임자보다 상당히 괜찮았고 인격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족관계]
- 배우자 : 헤레니아 에트루스킬라
- 자녀 : 헤렌니우스 에트루스쿠스, 호스틸리아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