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일요일

[로마 제국] 제28대 황제 : 고르디아누스 3세(Gordianus III, 238~244)

고르디아누스 3(Gordianus III, 238~244)


  • 로마 제국의 제28대 황제
  • 재위 : 238729~ 244211
  • 출생 : 225122
  • 사망 : 244211

 

고르디아누스 3세는 로마 제국의 스물 여덟 번째 황제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외손자이며 고르디아누스 2세의 조카이다. 고르디아누스 1세의 친딸 마키아 파우스티나의 아들이다.

 


허구의 이야기가 가득한 로마황제열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친아버지는 로마의 이름난 명문가로 루키우스 베루스 황제의 여동생이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양손녀의 손자 발부스이고 외가는 트라야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피를 이은 고르디아누스 가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고르디아누스 일가와 고르디아누스 3세 모두 친가와 외가 모두 족보 위조가 있을 정도로 그 가계는 의심받고 있고, 오늘날에는 조작된 기록으로 불린다.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베루스 여동생의 손자 발부스가 아니더라도, 세베루스 왕조 시대때 로마 상류층에 속한 원로원 의원 중 한 명 내지 세베루스 왕조 시절의 신흥귀족 가문 자제였던 것은 확실하다. 익명의 원로원 의원 내지 상류층 자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버지는 이름이나 경력 등은 알려진 바 없지만, 238년 이전에 죽었다. 그의 아들 고르디아누스 3세가 친가 쪽 이름 대신 외가의 이름을 거의 취했고 이름도 외조부에서 많이 따온 풀네임을 가지고 있는 것을 봤을때, 아마도 양친의 가계 중 부와 권력을 갖춘 외가의 힘이 친가보다 더 컸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는 238년 전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을 유일한 남자혈육이자 상속자였다. 그래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음에도, 어린 나이부터 유년기의 삶은 당대 상류층 자제 중에서도 최고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다]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는 그 능력을 보았을 때, 황제가 될 자격이 있는 자들임에도 지나치게 공적이고 엄격한 탓에 인기가 진짜 없었다. 반면, 고르디아누스 가는 신흥귀족임에도 도서관 기증, 문예 후원 등으로 이미지가 좋아 인기가 많았고, 그들이 즉위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애당초 세금을 뜯어가듯 뺐던 트락스 탄핵인 터라 이미 팬덤화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로마 내 고르디아누스 일가 지지자들은 포로 로마노에서 평민들과 지지세를 모아 떼를 이뤘고, 그 무리는 원로원 회의장이 있던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향했다. 이후, 그들은 70대 고령의 요직을 두루 거친 두 전직집정관 출신의 새 황제들이 아닌 고르디아누스 일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을 새 황제로 인정하라고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은 국가위기 상황에서 두 사람은 우리들이 원하는 황제도 아니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들이다며 이유를 든 뒤 막대기를 휘두르며 강하게 항의했다. 또 원로원으로 향하던 푸피에누스, 발비누스에게 돌을 던지고 협박을 하면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이 무렵, 막시미누스는 로마를 끝장내겠다며 군을 규합한 뒤 이탈리아로 움직인 상황이라, 원로원과 두 황제는 막시미누스 트락스와의 일전을 서둘러 치루기 위해, 이런 항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는 자신들을 도울 20인 위원회 구성과 동시에 과격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협박하던 군중들을 달랠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13살에 불과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자신들이 있던 카파톨리누스로 불렀다.

 

원로원은 고르디아누스 가의 유일한 남자혈육을 제 3의 황제로 인정하고, 카이사르 직위를 줬다. 이후 발비누스와 푸피에누스 두 공동 황제들은 238729일 함께 근위대에 납치되어 살해당하였으며, 곧바로 2388월에 그가 황제의 자리를 이었다.

 

[어머니 안토니아 고르디아나의 섭정]

 

나이가 어렸던 관계로 정무 초기에는 어머니가 섭정을 하였다. 안토니아 고르디아나는 대략 201년생으로 추측되는데, 학자들은 고대기록에서 드러나진 않아도 상당히 똑똑하고 정치적 술수도 상당한 귀부인으로 추측한다. 그녀는 아들의 제호를 아버지, 오빠와 똑같이 잇게 하여, 이를 통해 고르디아누스 지지자들의 지지를 유지했다. 2387월 말의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 살해에도 관여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섭정]

 

티메시테우스는 당시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를 위해 헌신해줄 수 있던 관료 출신으로, 근위대장에 오른 뒤 섭정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름에서 잘 드러나듯, 그리스인인데 기사계급 출신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로마식 교육을 받은 로마인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여러 근거를 토대로 레반트 속주 태생의 그리스계로 보고 있는데, 이런 추측은 리옹에서 발굴된 티메시테우스 비문을 통해 사실로 확정됐다.

 

서기 241, 고르디아누스 3세는 여러 원로원 의원들과 동방 출신 인사들의 추천 아래 가이우스 푸리우스 사비니우스 아퀼라 티메시테우스의 딸 트란퀼리나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은 어머니 고르디아나 안토니아, 신랑 고르디아누스 3세의 지시로 로마 근교의 화려하고 웅장한 고르디아누스 별장에서 열렸는데, 결혼식 전 황제 모자는 엄청난 돈을 들여 본래부터 거대하고 화려한 이 별장을 리모델링하고 재증축해 호화로움을 더하게 했다.

 

같은 해인 241, 고르디아누스 3세는 근위대장 도미티우스 대신 새로운 근위대장에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지명했다. 242,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파트너 근위대장에 장인의 오른팔 가이우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를 지명했다. 이 임명조치는 자연스레 동방 속주 태생의 인재들(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형제와 같은 이들)이 근위대와 내각를 차지할 기반을 확장시켰다. 특히,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그의 형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 모자와 티메시테우스가 믿던 내각의 핵심멤버였고, 소년황제를 도운 내각 내 서열이 높은 멤버들로 젊은 시절부터 프라이토리아니에 소속되거나 깊이 연관된 이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율리우스 프리스쿠스의 전면등장은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의 모든 권력이 근위대(프라이토리아니)로 넘어갔음을 의미했다.

 

장인 티메시테우스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불안한 제위를 보장하고, 그 정통성을 끌어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와 율리우스 프리스쿠스, 필리푸스 아라부스 등은 여러 정치공작으로 정적들을 견제했고, 소년 황제 부부는 대중들에게 고귀하고 아름답고 온화한 소년황제, 소녀 황후로 선전됐다. 이런 장인의 노력 아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즉위 후 외조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수 많은 건축 공사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어린 황제와 내각의 통치 스타일은 과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절을 연상케하는 방식을 취했다.

 

티메시테우스는 3년간 근위대장에 있으면서, 자신의 지위와 프라이토리아니의 권위 강화에 주력했고 행정가로서 상당히 뛰어났다. 특히, 그가 옛 세베루스 왕조 시절의 궁중 관료들을 대거 복귀시킨 조치는 고르디아누스 3세의 불안한 입지를 강화시키는 것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이때부터 고르디아누스 3세 정부에게 골치아픈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연이은 위기와 페르시아 전쟁]

 

240, 아프리카 총독 마르쿠스 아시니우스 사비니아누스가 카르타고에서 황제를 자처한 뒤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바로 옆에 있던 마우레타니아 속주 총독이 신속히 개입한 까닭에 곧 진압되었지만, 이후 터진 241년 툴루스 메노필루스의 처형과 기록말살형 조치는 그 분위기를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처형된 메노필루스 장군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몰락시킨 아퀼레이아 공성전의 영웅으로, 사비니아누스의 반란과 연관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던 터라 이 사건은 황제 모후와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티메시테우스가 자신의 입지를 회복하기 위한 쓸데없는 보복으로 비춰졌다.

 

그런데 이 사건 이후, 하필이면 지진이 크게 발생해 도시들이 피해를 입고 땅이 꺼지는 자연재해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전년 또는 같은해인 239년 또는 240년경부터 고트족과 카르피족(다키아인)이 함께 다뉴브 강 하류를 침략했다. 이때 고르디아누스 정부는 고트족에게 연공금 지불을 조건으로 포로를 석방시키고 그들을 돌아가게 했으나, 카르피족에게는 연공금 지불을 거절했다. 따라서 카르피족이 다키아 속주를 더 괴롭히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여러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몰락의 평행이론처럼 240년 동방 일대에서 잠잠하던 사산조 페르시아가 샤푸르 1세의 지휘 아래 사막도시 하트라를 점령하더니, 1년 뒤 로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42, 사산 왕조의 왕중왕 샤푸르 1세가 로마 동방 영토인 메소포타미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소아시아의 안티오크를 위협했다. 이에 티메시테우스는 황제를 대동한 채 동방 원정에 착수했다. 황제가 대군을 이끌고 나섰다는 소식을 접한 샤푸르 1세는 이미 탈취한 도시들의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티그리스 강으로 후퇴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원정 승리를 원로원에게 통지하면서 그 공로를 티메시테우스에게 돌렸다.

 

[장인 티메시테우스의 사망 이후 분위기 반전]


티메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안전과 기강을 감독하고 단속했다. 그는 부대 내에 물자를 충분히 비축하고 전방의 모든 도시들에 식초, 베이컨, 밀짚, 보리, 밀 등의 창고를 짓게 함으로써 군인들이 안심하고 전쟁에 임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로마군은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레세나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을 격파하고 사산 왕조의 영토 깊숙이 진군했다. 그런데 243, 티메시테우스는 돌연 사망했다. 이질 때문에 사망했다고 하는데, 향간에서는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장인이 갑자기 사라지자, 고르디아누스 3세는 망연자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의 입지는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19세의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자신의 장인 티메시테우스를 굉장히 신뢰했고, 그가 가진 능력과 경험에 의지했으므로, 티메시테우스의 불분명한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이후 황제는 꽃다운 19살의 나이에 2442월 죽었다.

 

[죽음에 대한 두 가지 버전]

 

티메시테우스의 후임 근위대장이 된 필리푸스 아라부스는 일부러 병사들에게 생필품 배급을 늦췄고, 이에 병사들은 생필품 부족을 불평했다. 이후 그 불만은 심각해졌고 병사들은 나이값도 못 하는 어린 황제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를 틈 타 근위대장 필리푸스는 형 프리스쿠스 등과 공모해 병사들을 선동한 다음 244211일 유프라테스 강과 아보라스 샛강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고 한다.

 

고르디아누스 3세는 장인 사후 멘붕 상태였지만 마냥 손을 놓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율리우스 프리스쿠스는 소년 황제를 설득해 군심을 다독이게 했으며, 이때 프리스쿠스의 추천으로 공백이었던 근위대장 자리는 필리푸스 아라부스가 맡게 됐다. 이후, 새로운 근위대장과 함께 그는 군 수뇌부들을 모아, 군대에게 지지를 호소했고, 2442월 진격했다. 하지만 이 진격은 사산 왕즈군의 반격을 받아 혼전 중 패배한다. 이어 그들은 크테시폰 공방전을 펼쳤는데, 사산 왕조 측의 기록들에 따르면, 사산 왕조 군대와 크테시폰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가 로마군은 대패하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낙마 후 전사했다.

 

[가족관계]

 

  • 부친 : 불명의 원로원 의원
  • 모친 : 안토니아 고르디아나
  • 배우자 : 푸리아 사비니아 트란퀼리나, 그후로 아우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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