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비누스(Balbinus, 238)
- 로마 제국의 제27대 황제
- 재위 :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
푸피에누스와 공동 재위 - 출생 : 178년 경
- 사망 : 238년 7월 29일
데키무스 카엘리우스 칼비누스 발비누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제국의 스물 일곱 번째 공동 황제로, 푸피에누스와 함께 238년에 총 3달 동안 재위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137년 집정관을 맡았던 푸블리우스 코엘리우스 발비누스 비불리우스 피우스의 후손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발비누스의 가계는 3세기 내내 수많은 원로원의 정계인사를 배출한 폼페이우스 팔코 가문과 1세기 때 활동한 율리우스 프론티누스와 관련있는 명문가이다. 발비누스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의 귀족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그는 184년에 카파도키아의 총독직을 맡았던 카엘리우스 칼비누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마르스 신을 모시는 12명의 사제들 중 한 명이기도 하였다.
발비누스는 203년 또는 211년에 카라칼라 황제의 동료 집정관으로서 처음 직책을 맡았고, 213년에 두번째로 집정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대의 역사가 헤로디아누스에 따르면, 발비누스는 아프리카를 포함해 7개 지역의 책임자를 맡았다고 한다.
발비누스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와 독일 마인츠에서 암살되기 전까지 당시 원로원 내에서 세베루스 왕조의 최측근이며, 원로원 귀족을 대표하는 인사였다.
[황제 즉위 이후]
북이탈리아의 아퀼레이아를 포위한 막시미누스 군에 맞서기 위해, 푸피에누스가 군대를 이끌고 출진했을 때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와 어린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앞세운 지지자들의 폭력 사건과 수도 치안을 위해 로마에 남았다. 공동의 적이었던 막시미누스가 부하들에게 살해된 뒤, 혼란을 수습한 푸피에누스가 지지를 받자,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각을 세우며 권력 다툼을 벌였다. 따라서 이를 노린 반대파들과 합세한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암살당했다.
238년 7월 29일,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 로마에서 카피톨리움 행사가 한창인 틈을 타 팔라티노 황궁에 난입했다. 먼저 소식을 접한 쪽은 푸피에누스였다. 하여 그는 무력대응을 하기 위해 발비누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양쪽의 갈등은 심각해, 발비누스는 거부했다. 이에 두 사람은 한 방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방안에 난입한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진지로 끌려가 고문당하다가 살해당했고 시신은 한동안 로마 거리에 방치되다가 원로원에 의해 뒤늦게 수습되었다. 이때 발비누스의 나이는 대략 70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