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4년 : 기원후 503년
▶ 국호를 신라로 획정하고 임금을 왕이라고 부르다 : 503년 10월(음)
- 四年, 冬十月, 羣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丗, 伹[정덕본에는 伹, 을해목활자본에는 但으로 되어 있다.]稱方言, 未正尊號, 今羣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 4년(503)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始祖)께서 나라를 세우신 이래, 나라 이름[國號]을 정하지 않아, 사라(斯羅)라고 부르거나 사로(斯盧)라고 부르고,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말하였습니다.[1] 신들이 생각하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四方)을 망라한다.’는 뜻이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2] 또한 살펴보건대, 예로부터 국가를 가진 이는 모두 ‘제(帝)’ 또는 ‘왕(王)’이라고 칭하였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부터 지금 22세(世)에 이르기까지 단지 방언(方言)으로만 부르고 존귀한 호칭으로 바로 잡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칭을 올립니다.”[3]라고 하니, 왕이 이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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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시조(始祖)께서 나라를 …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말하였습니다 : 신라는 ‘신라(新羅)’를 국호로 획정하기까지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거나 기록되었다. 본서와 『삼국유사』에는 서나벌(徐那伐)·서라벌(徐羅伐)·서벌(徐伐)·사라(斯羅)·사로(斯盧)·계림(鷄林 또는 雞林)·신라(新羅)·계귀(雞貴)·구구탁예설라(矩矩吒䃜說羅) 등이 국호로 사용되었다고 전하고,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등의 중국 정사와 『대당서역구법순례행기(大唐求法巡禮行記)』·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는 사로국(斯盧國)·설라(薛羅)·신로(新盧)·신라·사라·구구탁예설라 등이,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풍토기(風土記)』 등 일본측 문헌에서는 신라·신량(新良)·사라·계림(鷄林)·지라기(志羅紀) 등이 신라 국호로 쓰였다고 전한다. 한편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는 ‘사라’, 「울진 봉평리 신리비」에서는 ‘신라’라는 국호가 적혀 있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에서 국호를 서나벌(徐那伐)이라고 하였고,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 혁거세가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서라벌 또는 서벌, 또는 계림이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또한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탈해이사금 9년 3월조에 김알지가 탄생한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바꾸고, 이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기림이사금 10년조에 다시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꾸었다고 전한다. 3세기 중반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지』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韓)조에서 신라를 사로국이라고 표현하였고, 『양서』 권54 열전제48 제이(諸夷) 동이(東夷) 신라조에서 “위나라(북위) 때에는 신로(新盧), 송나라 때에는 사라 혹은 신라라고 불렀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과 더불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충주 고구려비(忠州 高句麗碑)」에서 ‘신라’, 503년 9월 25일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 ‘사라’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신라의 국호는 대체로 서라벌(서벌)→사로→사라 또는 신라→신라의 순으로 변천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2, 105~106쪽). 탈해이사금 때에 계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신라를 언제부터 계림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중고기의 금석문에서 계림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는 정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중고기 말이나 그 이후 시기에 비로소 신라를 계림이라고 별칭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 신들이 생각하건대, … 삼는 것이 마땅합니다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15 기림이질금조에 “정축(307)에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니,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라(羅)’는 ‘사방(四方)을 망라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또는 지증왕·법흥왕 치세(治世)의 일이라고 한다.”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의 기록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고, 본서 신라본기의 기록이 사실을 전한 것으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지증왕 4년(503) 10월에 신라라는 국호를 획정한 것은 신라적인 천하관으로서 사방의식(四方意識)의 성립과 동시에 신라 영역 내에 존재하는 주민을 노인과 일반 민으로 차별하지 않고 모두 일반 민으로 대우하는 민에 대한 인식의 성장을 반영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朱甫暾, 1994; 1998, 323~330쪽). 또한 ‘덕업(德業)’이 유교적인 표현이 분명하고, ‘망라사방’에서 ‘사방’도 「마운령 신라 진흥왕 순수비(磨雲嶺 新羅 眞興王 巡狩碑)」에 나오는 ‘사방탁경(四方託境)과 마찬가지로 『서경(書經)』에 나오는 왕도사상과 연결시킬 수 있으므로, 신라는 유교 정치이념을 수용하여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었다(노중국, 2008).〈참고문헌〉朱甫暾, 1994, 「新羅國號의 確定과 民意識의 成長」, 『史學論叢: 九谷 黃鍾東敎授 停年紀念』;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노중국, 2008, 「신라 중고기(中古期) 유학(儒學) 사상의 수용과 확산」, 『大丘史學』 93
- ‘신라국왕(新羅國王)’이라는 호칭을 올립니다 :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 ‘사훼(沙喙)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사덕지아간지(斯德智阿干支), 자숙지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 훼(喙) 이부지일간지(尒夫智壹干支), 지심지거벌간지(只心智居伐干支), 본피(本彼) 두복지간지(頭腹智干支), 사피(斯彼) 모사지간지(暮斯智干支)를 ‘일곱 명의 왕들[王等]’이라고 표현하였다. 한편 5세기 후반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환두대도(環頭大刀)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사지왕’은 금관총의 주인공인 왕족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두 자료를 통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에 왕족과 6부의 대표 및 훼부·사훼부 핵심 지배층 역시 ‘왕’을 칭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서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그의 친동생인 입종(立宗)을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524년까지 신라 국왕을 ‘매금왕’, 부왕(副王)의 성격을 지닌 왕족을 ‘갈문왕’이라고 불렀고, 일반 왕족이나 부의 대표, 훼부와 사훼부의 핵심 지배층 역시 ‘왕’이라고 불렀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릉비」나 5세기 중반 또는 후반에 건립된 「충주 고구려비」에 신라왕을 ‘매금(寐錦)’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전기(攝政前紀) 9년 겨울 10월조에서 실성왕을 ‘파사매금(波沙寐錦)’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전덕재, 2010). 따라서 503년 10월 이전까지 신라왕은 ‘마립간(麻立干)’ 또는 ‘매금’을 칭하였고, 왕족 가운데 한 사람이 갈문왕을, 그 밖의 왕족이나 부의 대표, 훼부·사훼부 핵심 지배층은 ‘왕(王)’이라고 칭하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결국 503년 10월에 ‘신라국왕’이란 국호를 올린다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이전까지 사용한 마립간 또는 매금이라는 칭호 대신 ‘매금왕’이란 칭호를 올린 것으로 봄이 합리적이다. 법흥왕 22년(535)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을묘명(蔚州 川前里 刻石 乙卯銘)」에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이란 표현이, 539년(법흥왕 26)에 작성된 「울주 천전리 각석 추명(蔚州 川前里 刻石 追銘)」에 ‘무즉지태왕(另卽知太王)’이란 표현이 보여, 530년대에 법흥왕은 ‘매금왕’이 아니라 ‘대왕(태왕)’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래에 매금왕에서 대왕으로의 왕호의 변천은 신라의 정치체제가 6부체제에서 국왕 중심의 집권적인 정치체제로 변화된 사실과 관련이 깊다고 이해한 견해가 제기되었다(全德在, 1996, 132~140쪽). 한편 국왕은 덕(德)의 담지자로 덕업교화(德業敎化)를 통해 사방을 망라하는 주체였고, 이것은 성현(聖賢)과 맥이 통하므로, 결국 503년 존호개정은 왕이 성현임을 선언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왕은 성현을 칭하는 존재로서 표위(標位)라는 마립간의 권한을 계승·격상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이해한 견해도 제기되었다(정덕기).〈참고문헌〉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전덕재, 2010, 「6세기 금석문을 통해 본 신라 관등제의 정비과정」, 『목간과 문자』 5정덕기, 2017, 「6세기 초 신라의 尊號改正論과 稱王」, 『歷史學報』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