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3년 : 기원후 502년
▶ 순장을 금하다 : 502년 02월(음)
- 三年, 春三[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에는 二로 되어 있다. 주자본에는 三으로 되어 있다.]月, 下令, 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 3년(502) 봄 2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1]을 금하게 하였다. 이전에는 국왕(國王)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는데,[2] 이때에 이르러 금하게 한 것이다.[3]
▶ 신궁에 제사지내다 : 502년 02월(음)
- 親祀神宮.
- 〔3년(502)〕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4]
▶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을 갈다 : 502년 03월(음)
-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 〔3년(502)〕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5]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하게 하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을 갈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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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순장(殉葬) : 순장은 죽은 자를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무덤에 묻는 장례풍습을 말한다. 고대인들은 현세의 삶이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來世觀)을 가졌기 때문에 죽은 후에 이루어질 삶을 위해 많은 생활유물뿐만 아니라 생전에 시중을 들던 시종과 노비 등도 함께 무덤에 묻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순장은 중국과 이집트, 베트남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널리 행해졌다.『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조에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 모두 얼음을 사용하며, 남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은 경우에는 100명을 헤아리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북한에서는 중국 요동반도에 위치한 강상묘(岡上墓)와 누상묘(樓上墓)를 고조선의 순장무덤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전대준·최인철, 138~142쪽).신라에서는 3세기 말 또는 4세기 이후에 고총고분(高塚古墳)이 등장하면서 순장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으며, 경주뿐만 아니라 부산, 양산, 창녕, 대구, 경산, 의성, 영덕 등의 신라고분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가야에서도 순장을 행하였는데, 대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령 지산동고분군에서 수십 명을 순장한 무덤이 여럿 발견되었고, 금관가야 왕족의 무덤이 있었던 김해 대성동고분군, 아라가야의 왕족 무덤인 함안 말이산고분군,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의 옥전고분군 등 가야 최고 지배자 무덤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순장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서 시작된 희생(犧牲)의 한 범주에 속하지만, 순장은 인간을 제의의 제물로 바치는 인신희생, 즉 인생(人牲)과 달리 주인을 위하여 함께 죽이는 행위를 가리키기 때문에 특별히 인순(人殉)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현재까지 신라와 가야의 무덤에서 발견된 순장자는 착용장신구와 함께 부장된 유물 등으로 보아, 무덤 주인공을 가까이에서 시중을 들던 시녀와 시동(侍童), 노비, 호위무사,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이성준·김수환, 2011; 김용성, 2016).〈참고문헌〉전대준·최인철, 2010, 『조선단대사(고조선사)』, 과학백과사전출판사이성준·김수환, 2011, 「韓半島 古代社會의 殉葬文化」, 『한국고고학보』 81김용성, 2016, 「장법과 장송의례」,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21), 경상북도
- 이전에는 국왕(國王)이 죽으면, 남녀 다섯 명씩 순장하였는데 :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황남대총 남분(南墳)에서는 9명,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북분(北墳)에서는 10명의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고, 왕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경주 천마총에서는 5인 내외의 순장 흔적이,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 황남동 109호 3·4곽에서는 그보다 적은 수의 순장 흔적이 발견되었다. 한편 지방의 신라고분에서는 대체로 1~2인의 순장이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다(이성준·김수환, 2011; 김용성, 2016). 이를 통해 신라에서 신분의 차이에 따라 순장의 숫자를 제한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참고문헌〉이성준·김수환, 2011, 「韓半島 古代社會의 殉葬文化」, 『한국고고학보』 81김용성, 2016, 「장법과 장송의례」,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21), 경상북도
- 이때에 이르러 금하게 한 것이다 : 6세기 초반에 조영된 경주 식리총과 호우총, 은령총 등에서 순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신라 왕경에서는 대체로 6세기 초에 순장이 소멸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지방의 경우는 6세기 전반 무렵의 신라고분에서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6세기 전반에는 신라 전역에서 순장풍습이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이성준·김수환; 김용성). 6세기 무렵에 유교이념이 수용되면서 순장은 예(禮)에서 벗어난 행위로 인식되었고, 또한 불교의 전래 이후 계세적(繼世的) 내세관 대신 불교적 내세관이 수용되면서 순장풍습이 소멸되었으며, 이후 순장 대신 흙으로 빚은 인형을 만들어 부장하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일반적으로 고구려에서 주인공이 살아 있을 때의 영광스러운 장면을 고분의 벽화에 그렸는데, 고분의 벽화 역시 순장의 대체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6세기 초반에 순장이 금지된 것은 4~6세기에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인간의 노동력을 중시하고, 불교의 전래로 인한 살생 금지의 영향 등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朱容立).〈참고문헌〉朱容立, 1988, 「한국 고대의 순장 연구」, 『孫寶基博士 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이성준·김수환, 2011, 「韓半島 古代社會의 殉葬文化」, 『한국고고학보』 81김용성, 2016, 「장법과 장송의례」, 『유적과 유물로 본 신라인의 삶과 죽음』(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21), 경상북도
-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 본서 권제3 신라본제3에서 소지마립간 9년(487) 2월에 시조가 처음 태어난 나을(奈乙)에 신궁(神宮)을 설치하였으며, 소지마립간 17년(495) 정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고 하였다. 반면에 본서 권제32 잡지제1 제사조에서는 제22대 지증왕이 시조가 탄강(誕降)한 곳인 나을에 신궁을 세우고 제사지냈다고 하여 설치시기를 둘러싸고 차이를 보인다. 신궁의 주신(主神)과 설치시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본서 권제3 신라본제3 소지마립간 9년(487) 2월조 참조.
- 주주(州主)와 군주(郡主) :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에서 탈해이사금 11년 정월에 박씨(朴氏)의 귀척(貴戚)으로 나라 안의 주(州)와 군(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름을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하였고, 파사이사금 5년 5월에 고타군주(古陁郡主)가 푸른 소를 바쳤으며, 파사이사금 11년 7월에 사자(使者) 10명을 나누어 파견하여 주주와 군주를 감찰하여 공무에 힘쓰지 않거나 밭과 들을 황폐하게 한 자의 관직을 강등시키거나 파면하였다고 하였다. 신라에서 6세기 전반에 주와 군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주주와 군주를 주와 군에 파견된 지방관으로 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고타군주는 고타지역(경북 안동시)의 재지지배자로 추정하며, 박씨 귀척을 주주와 군주로 임명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주주와 군주는 사로국이 지방의 복속 소국이나 읍락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한 관리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全德在, 1990; 강문석, 67~70쪽). 주와 군을 설치한 이후에 재지지배자와 사로국에서 지방의 통제를 위해 파견한 관리를 주주(州主)·군주(郡主)라고 부회한 것으로 짐작된다.〈참고문헌〉全德在, 1990, 「新羅 州郡制의 成立背景硏究」, 『韓國史論』 2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강문석, 2017, 「신라 상대의 지방지배와 ‘城主’」,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박사학위논문
-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을 갈았다 : 이 기사는 소를 부려 처음으로 논밭을 갈았다는 사실을 전해준다기보다는 우경(牛耕)을 널리 보급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李春寧, 1968). 중국에서는 전국시대 후기인 B.C. 3세기경에 철제농구기가 널리 쓰이고, 한정된 지역에서 우경이 실시되었으며, 진(秦)·한(漢) 때에 이르러 우경이 널리 보급되었다(崔德卿, 1994). 고구려에서는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우경으로 밭갈이를 하였고, 신라와 백제에서는 대체로 5세기에 우경을 실시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전덕재, 1990; 2006). 우경은 개간을 촉진시켜 경작면적을 확대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의 힘을 빌려 논밭갈이를 함으로써 농사에 투입되는 노동력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또한 깊이갈이를 함으로써 병충해와 잡초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었고, 일부 토지에 한해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여 단위면적당 수확량의 증대를 꾀할 수 있었다. 이밖에 소규모 인원의 노동력에 기초한 농업경영이 가능해짐으로써 읍락사회에서 계층분화가 진전되었고, 이를 계기로 삼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정비하기도 하였다(전덕재, 2006, 87~111쪽; 142~180쪽).〈참고문헌〉李春寧, 1968, 「韓國農業技術史」, 『韓國文化史大系 Ⅲ(科學·技術史)』, 高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전덕재, 1990, 「4~6세기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사회변동」, 『역사와 현실』 4崔德卿, 1994, 「牛耕의 발달과 보급」, 『中國古代農業史硏究』, 백산서당전덕재, 2006, 『한국고대사회경제사』, 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