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대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AD 500~514) 1년 : 기원후 500년
▶ 지증마립간이 왕위에 오르다 : 500년 (음)
-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奈[정덕본에는 누락, 을해목활자본에는 奈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奈로 되어 있다.]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정덕본과 을해목활자본에는 照로 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3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즉위년조에는 炤로 되어 있다.]知王之再從弟也. 母金氏鳥生夫人, 訥祇王之女, 妃朴氏延帝夫人, 登欣伊湌女. 王體鴻大, 瞻[정덕본에는 瞻, 을해목활자본에는 膽으로 되어 있다. 《삼국사절요》주자본에는 膽으로 되어 있다.]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1]이 왕위에 올랐다. 성은 김씨(金氏)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盧) 또는 지철로(智哲盧)라고도 하였다.이다.[2] 나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이고,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3]의 아들이며, 소지왕[照知王][4]의 재종(再從: 6촌) 동생이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鳥生夫人)[5]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고, 왕비는 박씨(朴氏) 연제부인(延帝夫人)[6]으로 등흔(登欣)[7] 이찬(伊飡)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8] 담력(膽力)이 남보다 더 셌다. 전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위를 계승하니,[9] 이때 나이가 64세였다.
▶ 신라의 왕호에 대한 사론
-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 不足稱也. 曰左·漢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菟” , 凶[정덕본에는 凶, 을해목활자본에는 匈으로 되어 있다.]奴語“撑犁孤塗” 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亦宜矣.
- 논하여 말한다. 신라왕을 거서간(居西干)[10]이라고 부른 것이 하나이고, 차차웅(次次雄)[11]이라고 부른 것도 하나이며, 이사금(尼師今)[12]이라고 부른 것이 열여섯이고, 마립간(麻立干)[13]이라고 부른 것이 넷이다.[14] 신라 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崔致遠)[15]이 지은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16]에는 모두 아무 왕[某王]이라고 부르고, 거서간 등을 언급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 말이 천박하고 촌스러워서 부를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겨서일 것이다. 『좌전(左傳)』[17]과 『한서(漢書)』[18]는 중국 역사책인데도 오히려 초(楚)나라[19] 말인 ‘곡오도(穀於菟)’[20]와 흉노(匈奴)[21] 말인 ‘탱리고도(撑犁孤塗)’[22] 등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지금 신라의 일을 기록함에 그 방언(方言: 신라 말)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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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 신라의 제22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에는 지정마립간(智訂麻立干)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증왕 때까지를 상고(上古)라고 부른다고 전한다. 또한 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서 지증왕이 신사년(辛巳年), 즉 501년에 즉위하였다는 이설(異說)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는 ‘사훼부(沙喙部)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고 전하여 지증왕이 500년 11월에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사훼부 소속으로서 ‘갈문왕’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 법흥왕을 ‘훼부(喙部)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지증왕이 어느 시기엔가 훼부 소속으로서 매금왕을 칭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대체로 그 시기는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꾼 지증왕 4년(503) 10월로 추정한다(全德在, 59쪽). 3년 동안 갈문왕을 칭하고 매금왕이라고 부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전왕(소지왕)의 국상(國喪) 기간이기 때문에 계속 갈문왕을 칭하였다고 보는 견해(김기흥, 72쪽; 나희라, 2002), 지증왕이 정변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한동안 갈문왕을 칭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견해(鄭求福, 1990; 李喜寬, 1990; 金羲滿, 1990) 등이 제기되었다.〈참고문헌〉金羲滿, 1990, 「迎日 冷水碑와 新羅의 官等制」, 『慶州史學』 9李喜寬, 1990, 「迎日 冷水里碑에 보이는 至都盧葛文王에 대한 몇 가지 問題」, 『韓國學報』 60鄭求福, 1990,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韓國古代史硏究』 3全德在, 1996, 『新羅六部體制硏究』, 一潮閣김기흥, 2000,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나희라, 2002, 「新羅의 卽位儀禮」, 『韓國史硏究』116
-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盧) 또는 지철로(智哲盧)라고도 하였다.이다 :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서 지증왕의 이름을 혹은 지철로(智哲老) 또는 지도로(智度路)라고도 부른다고 하였고, 본서 권제44 열전제4 이사부조에 지도로왕(智度路王)이라고 전한다. 한편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이라고 하였으며, 「포항 중성리 신라비(浦項 中城里 新羅碑)」에서 지증왕을 ‘지절로갈문왕(只折盧葛文王)’으로 기록하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이영호, 전덕재).〈참고문헌〉이영호, 2009, 「興海地域과 浦項中城里新羅碑」, 『한국고대사연구』56.전덕재, 2009, 「포항중성리신라비의 내용과 신라 6부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사연구』 56
-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에는 지증왕의 아버지가 눌지왕의 동생 기보갈문왕(期寶葛文王)이라고 전한다. 『삼국유사』 권제3 흥법제3 원종흥법 염촉멸신조에서 염촉(厭髑), 즉 이차돈(異次頓)의 할아버지 아진종(阿珍宗)이 습보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하였고, 권제1 왕력 제21대 비처마립간조에는 비처왕(소지왕)의 비가 기보갈문왕의 딸이라고 전한다. 기보(期寶)를 사보(斯寶)의 오기로 이해하고, 「포항 냉수리 신라비(浦項 冷水里 新羅碑)」에서 습비부(習比部)를 사피부(斯彼部)라고 전하는 사실을 주목하여, 기보갈문왕과 습보갈문왕을 동일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金永萬; 강종훈, 34쪽; 선석열, 116쪽). 이럴 경우 습보갈문왕은 나물왕의 손자, 기보갈문왕은 눌지왕의 동생, 즉 나물왕의 아들로 전하는 사실이 문제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 기보갈문왕이 눌지왕의 동생이 아니라 눌지왕 동생의 아들이라는 견해(강종훈, 34쪽), 지증왕을 기준으로 삼국유사 왕력은 부계(나물왕-기보갈문왕-지증왕),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어머니쪽 계보(나물왕-눌지왕-조생부인-지증왕)를 전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박주선) 등이 제기되었다. 한편 습보(기보)갈문왕을 눌지왕의 셋째 동생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부 학자는 눌지왕의 첫째 동생인 복호(卜胡: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로 보기도 하고(선석열, 115~116쪽), 눌지왕의 둘째 동생인 미사흔(未斯欣: 파호갈문왕)으로 보기도 하며(박주선), 일부 학자는 파호갈문왕의 아들로 보기도 한다(윤진석, 51쪽). 참고로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즉위년조에서 소지왕비 선혜부인(善兮夫人)이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이라고 하였고, 권제44 열전제4 거칠부조에 거칠부(居柒夫)의 할아버지가 잉숙(仍宿)이라고 전하는데, 내숙과 잉숙은 동일 인물이고, 이가 바로 기보갈문왕이라고 볼 수도 있다.〈참고문헌〉金永萬, 1990, 「迎日冷水里新羅碑의 語文學的 考察」, 『韓國古代史硏究』3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윤진석, 2014, 「5~6세기 신라의 정치운영과 갈문왕」, 계명대학교 박사학위논문선석열, 2015,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박주선, 2019, 「近親婚을 통해 본 奈勿王 직계의 권력 장악과 智證王 계보 전승」, 『한국문화』85
- 소지왕[照知王] : ‘소지왕(炤知王)’이 정확한 표기이다. 고려 제4대 왕 광종의 이름인 ‘왕소(王昭)’를 피휘(避諱)하기 위해 ‘照知王’으로 표기한 것이다.
- 조생부인(鳥生夫人)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에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전한다. 조생부인은 자비마립간의 여동생이며, 어머니는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阿老夫人)이다. 아로부인을 차로부인(次老夫人)으로 쓰기도 한다.
- 연제부인(延帝夫人)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에 지증왕비는 영제부인(迎帝夫人)이라고 전한다. 같은 책의 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서는 지증왕비가 모량부(牟梁部) 상공(相公)의 딸이며, 신장이 7자[尺] 5치[寸]였다고 하였다.
- 등흔(登欣) :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2 지정마립간조에는 지증왕비 영제부인(迎帝夫人)이 검람대한지등허(儉攬代漢只登許)의 딸이라고 전한다. 이때 등허와 등흔은 동일 인물에 대한 이표기로 추정된다. ‘검람대한지등허’란 표현에 주목하여, 등허, 즉 등흔의 소속 부를 한지부(漢只部)로 볼 수도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02쪽). 그러나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서 지증왕비가 모량부(牟梁部) 상공(相公)의 딸이라고 전하는 것을 보건대, 등허, 즉 등흔의 소속 부(部)가 한지부라고 이해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위의 사실과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4 진흥왕조에서 진흥왕비가 박씨로서 모량리(牟梁里) 영실각간(英失角干)의 딸이라고 전하는 사실에 의거하건대. 박씨 연제부인의 아버지 등흔(등허)은 모량부 소속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재 ‘검람대한지’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 왕은 체격이 매우 컸고 :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지철로왕조에서 ‘왕은 음경의 길이가 1자[尺] 5치[寸]이다.’라고 하였다. 종래에 『삼국유사』의 기록은 『구삼국사』에서 기록한 것을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으며, 『구삼국사』 등에서 본래 각 왕의 품성이나 신체의 특징을 비교적 소박하고 진솔하게 표현한 것을 『삼국사기』 찬자들이 그것들을 유가적(儒家的) 합리주의(合理主義)에 입각하여 개서하였는데, 이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지적하였다(金哲俊, 1973, 「高麗 中期의 文化意識과 社會의 性格」, 『韓國史硏究』 9; 1990, 『韓國史學史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258~261쪽).
-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위를 계승하니 : 전왕인 소지마립간이 날이군(捺已郡: 경북 영주시) 파로(波路)의 딸 벽화(碧花)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전하는 것과 차이를 보인다. 종래에 변경지방 출신인 벽화의 신분이 미천하여 그녀의 아들에게 왕위계승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소지왕이 아들이 없다고 기록하였다고 보기도 하고(李鍾旭, 88~89쪽; 선석열, 148쪽), 벽화의 아들이 2~3세의 매우 어린 나이였기 지증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보기도 하였다(張彰恩). 한편 일부 학자들은 지증왕이 정변을 일으켜 소지왕을 폐위시켜 한동안 유폐하였거나 또는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고 보기도 한다(鄭求福; 李喜寬).〈참고문헌〉李鍾旭, 1980, 『新羅 上代 王位繼承硏究』, 嶺南大學校出版部鄭求福, 1990, 「迎日冷水里新羅碑의 金石學的 考察」, 『韓國古代史硏究』 3李喜寬, 1990, 「迎日 冷水里碑에 보이는 至都盧葛文王에 대한 몇 가지 問題」, 『韓國學報』 60張彰恩, 2007, 「新羅 智證王의 執權과 對高句麗 防衛體系의 확립」, 『韓國古代史硏究』 45선석열, 2015, 『신라 왕위계승 원리 연구』, 혜안
- 거서간(居西干) : 거서간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 즉위년조 참조.
- 차차웅(次次雄) : 차차웅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남해차차웅 즉위년조 참조.
- 이사금(尼師今) : 이사금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즉위년조 참조.
- 마립간(麻立干) : 마립간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나물이사금 및 눌지마립간 즉위년조 참조.
-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넷이다 :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이질금(尼叱今), 즉 이사금을 칭한 왕이 14명, 마립간을 칭한 왕이 6명이라고 전한다. 본서에서는 제19대 눌지왕 때부터, 『삼국유사』에서는 제17대 나물왕 때부터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에 차이가 발생하였다. 『태평어람(太平御覽)』 권781 사이부(四夷部)2 동이(東夷)2 신라조에 382년(나물왕 27)에 신라왕을 ‘누한(樓寒)’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마루한’, 즉 마립간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李丙燾, 1976, 「古代南堂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630쪽). 414년에 건립된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에서 나물왕을 ‘신라매금(新羅寐錦)’이라고 표현하였다.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에서 법흥왕을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에 근거하여 매금은 마립간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마립간이란 왕호는 나물왕 때부터 사용하였다고 봄이 합리적이라고 판단된다.
- 최치원(崔致遠) : 857~?. 신라 왕경(王京) 사량부(沙梁部) 사람으로 견일(肩逸)의 아들이다.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중국에서 당나라 선주(宣州) 율수현위(漂水縣尉)를 역임하였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에 임명되었으며,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재임할 때에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서기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후에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郎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진하였으며, 아울러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29세에 신라에 귀국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 등을 역임하였고,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해인사에 은거하여 여생을 마쳤다. 그의 저서로서 『계원필경(桂苑筆耕)』·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사산비명(四山碑銘)』이 남아 전한다. 고려 현종 때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최치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제46 열전제6 최치원조 참조.
-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 우리나라와 중국의 연대를 대조한 연표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제(帝)’는 중국을, ‘왕(王)’은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근거로 『제왕연대력』에는 중국문화와 역사 중심의 유교적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고 이해한다(李賢惠). 한편 최치원이 삼국을 통일한 것이 신라임을 중국에 분명하게 알리는 한편, 진골 귀족과 지방 호족에 대해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제왕연대력』을 편찬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제기되었다(趙仁成).〈참고문헌〉李賢惠, 1983, 「崔致遠의 歷史認識」, 『明知史論』 1趙仁成, 1985, 「三國 및 統一新羅時代의 歷史敍述」, 『韓國史學史의 硏究』, 을유문화사
- 『좌전(左傳)』 :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를 해설한 주석서(註釋書)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또는 『좌씨춘추전(左氏春秋傳)』이라고 하는데,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공양전(秋公羊傳)』과 함께 춘추삼전으로 칭하고 있다. 편찬자는 좌구명(左丘明)으로 알려졌으나, 편찬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대체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편찬되었다고 보고 있다. 『좌전』은 역사적·실증적으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구명하고 있어 『공양전』이나 『곡량전』에 비해 경학적(經學的)인 경향이 약하고 역사학적 경향이 강하다. 특히 사학(史學)에서는 중국 편년체 역사의 모범이 되며, 역사적 상황과 정치사회적 변혁, 인물의 역사와 제도·문물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03쪽).
- 『한서(漢書)』 : 중국 전한(前漢)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전체 120권으로 구성되었다. 후한의 반고(班固)가 건초(建初) 8년(82) 무렵에 완성하였다. 반고는 아버지 반표(班彪)가 『사기(史記)』 이후의 한나라 역사를 정리한 『후전(後傳)』 65편을 이어받아, 한 고조(高祖)부터 왕망(王莽) 정권이 멸망하기까지 230년간(B.C. 206~A.D. 24)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사기』를 모방하여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하였으나 『사기』가 통사인데 반하여 『한서』는 단대사(斷代史)라는 차이가 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03쪽).
- 초(楚)나라 :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列國) 가운데 하나로 후베이성[湖北省]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본래 초나라는 중원과 종족을 달리하는 만이(蠻夷)의 나라로 불려 멸시를 받았다. B.C. 704년 웅통(熊通)은 스스로 무왕(武王)이라 칭하였고, 아들 문왕(文王)이 영(郢)으로 천도한 뒤, 국세를 크게 떨쳤으며, 장왕(莊王) 때인 B.C. 597년에 진(晉)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중원의 패자(覇者)가 되기도 하였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로서 위세를 떨치다가 결국 B.C. 223년에 진(秦)에게 망하였다.
- 곡오도(穀於菟) :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4년조에 투약오(鬪若敖)의 아들인 백비(伯比)가 운자(邧子)의 딸과 사통하여 자문(子文)을 낳았는데, 운부인(邧夫人: 운자의 부인)이 그를 몽중(夢中)에 버리자, 호랑이가 젖을 먹였으며, 운자가 사냥을 나갔다가 그것을 보고 두려워서 부인에게 자문을 거두어 기르도록 하였으며, 초나라 사람들은 젖[乳]을 ‘곡(穀)’, 호랑이를 ‘어도(於菟)’라고 이르렀기 때문에 자문의 이름을 ‘투곡어도(鬪穀於菟)’라고 지었다고 전한다[初 若敖娶於䢵 生鬪伯比. 若敖卒 從其母畜於邧 淫於邧子之女 生子文焉. 邧夫人使棄諸夢中 虎乳之. 邧子田 見之 懼而歸 夫人以告 遂使收之. 楚人謂乳穀 謂虎於菟 故命之曰鬪穀於菟]. 초나라 방언으로 ‘곡(穀)’이 ‘젖(우유)’ 또는 ‘젖먹이다’를 뜻하고, ‘오도(於菟)’는 ‘호랑이’를 뜻하였다. 자문은 후에 초나라의 영윤(令尹)을 역임하였는데, 초나라의 상경(上卿)을 영윤이라고 불렀으며, 집정자(執政者)의 역할을 하였다.
- 흉노(匈奴) : 몽골 및 중국 북부 지역에서 B.C. 4세기 말부터 A.D 1세기까지 활동했던 유목 민족 및 그들이 세운 국가를 말한다.
- 탱리고도(撑犁孤塗) : 『한서(漢書)』 권94상 흉노전(匈奴傳) 제64상에서 선우(單于)는 성(姓)이 연제씨(攣提氏)이고, 그 나라에서 선우를 ‘탱리고도선우(撐犁孤塗單于)’라고 부르는데, 흉노에서 하늘[天]을 탱리(撐犁), 아들을 고도(孤塗)라고 일렀으며, 선우는 광대한 모습을 가리킨다고 하였다[單于姓攣鞮氏 其國稱之曰 撐犁孤塗單于 匈奴謂天為撐犁 謂子為孤塗 單于者廣大之貌也 言其象天單于然也]. 이에 따르면, ‘탱리고도선우’는 ‘하늘의 아들 선우’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탱리’는 ‘텡그리(Tengri)’, ‘고도(孤塗)’는 ‘쿠트(kut)’의 음차(音借)이며, 흉노와 돌궐을 비롯한 유목 민족에서는 텡그리를 지고신(至高神)인 천신(天神), 즉 하늘신으로 숭배하였다(김효정). 최남선은 단군(壇君)은 단굴(Tan-kul) 혹은 당굴(Tan-gul)을 이두적으로 사음(寫音)한 것이며, 돌궐(突厥) 및 몽골어의 Tengeri 또는 Tangri와 어원(語原)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최남선, 113~119쪽).〈참고문헌〉김효정, 2007, 「튀르크족의 기록에 나타난 ‘텡그리(Tengri)'의 의미」, 『韓國中東學會 論叢』28-1최남선지음, 정재승·이주현 역주, 2008, 『불함문화론』, 우리역사연구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