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9년 : 기원후 487년
▶ 신궁을 나을에 세우다 : 487년 02월(음)
- 九年, 春二月, 置神宫於奈乙. 奈乙始祖初生之處也.
- 9년(487) 봄 2월에 신궁(神宮)[1]을 나을(奈乙)[2]에 세웠다. 나을은 시조(始祖)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
▶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관도를 수리하다 : 487년 03월(음)
- 三月, 始置四方郵驛, 命所司修理官道.
- 〔9년(487)〕 3월에 처음으로 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고,[3] 해당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4]
▶ 월성을 수리하다 : 487년 07월(음)
- 秋七月, 葺月城.
- 〔9년(487)〕 가을 7월에 월성(月城)[5]을 수리하였다.
▶ 천둥이 치다 : 487년 10월(음)
- 冬十月, 雷.
- 〔9년(487)〕 겨울 10월에 천둥이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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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신궁(神宮) : 신라 때 설치된 국가적 제사 시설의 하나. 설치 시기와 성격을 둘러싸고 많은 주장이 있다.우선 설치 시기와 관련해서는, 본 기사에서 전하는 것처럼 소지마립간 때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지만, 본서 권32 잡지1 제사지에 “신라의 종묘 제도를 살펴보건대, … 제22대 지증왕은 시조가 탄강한 땅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고 제향하였다.”라고 나오는 것을 근거로 지증왕 때 건립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申瑩植, 38쪽; 李鍾泰, 59~67쪽). 신라본기와 제사지의 기록 차이를 ‘신궁의 설치 시기는 소지왕 대이지만, 당시 지증왕이 설치를 주도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姜鍾薰, 187~192쪽).다음으로 신궁의 성격을 둘러싸고는, 기존의 ‘시조묘(始祖廟)’와 마찬가지로 신라 시조 혁거세를 제향하는 사당으로 보는 견해와 김씨의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로 보는 견해,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견해들이 피력되어 있다. 혁거세를 모시는 곳이라는 주장은, 본 기사에서 ‘시조가 태어난 곳’에 건립하였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여기서의 시조는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를 가리키며, 신궁이 건립된 나을(奈乙)은 나정(蘿井)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파악한다(李丙燾, 49쪽). 김씨 시조를 제사하는 새로운 제의 시설이라고 하는 주장은, 혁거세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시조묘’라는 이름으로 신라 초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소지마립간 시기에 그의 사당을 거듭 건립할 필요가 크지 않았을 것이라는 발상 위에서, 이 시기에 김씨 왕실의 위상이 확고해짐에 따라 자신들의 시조를 제사하는 시설을 새롭게 건립한 것으로 파악한다. 여기서의 김씨 시조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문헌 자료에 김씨의 시조로 나오는 ‘알지’로 보는 견해(小田省吾: 1937), 김씨로서 처음 신라왕이 되었던 ‘미추왕’으로 보는 견해(邊太燮, 63쪽), 소지마립간의 직계 조상으로 김씨 왕실을 본격적으로 개창한 ‘내물왕’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08~110쪽; 辛鍾遠, 84쪽), (「경주 문무왕릉비」) 등 7세기 후반에 건립된 비석에서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성한(星漢)’으로 보는 견해(姜鍾薰, 193~212쪽) 등으로 세분된다.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는 곳이라는 주장은 고대사회에서 수많은 신격(神格) 가운데 ‘천신(天神)’이 지니는 위상이 가장 높았음에 주목하여, 신궁을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으로서의 천지신을 제사하기 위해 새로 만든 시설로 파악하는 것이다(崔光植, 71~74쪽).〈참고문헌〉小田省吾, 1937, 「半島廟制槪要」, 『朝鮮』 269末松保和, 1954, 「新羅上古世系考」, 『新羅史の諸問題』邊太燮, 1964, 「廟制의 變遷을 통하여 본 新羅社會의 發展過程」, 『歷史敎育』 8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申瑩植, 1977, 「新羅史의 時代區分」, 『韓國史硏究』 18辛鍾遠, 1992, 「新羅 祀典의 成立과 意義」,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李鍾泰, 1992, 「新羅 智證王代의 神宮設置와 金氏始祖 認識의 變化」, 『擇窩許善道선생정년기념한국사학논총』姜鍾薰, 1994, 「神宮의 設置를 통해 본 麻立干時期의 新羅」, 『韓國古代史論叢』 6,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崔光植, 1983, 「新羅의 神宮設置에 대한 新考察」, 『韓國史硏究』 48
- 나을(奈乙) :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라고 되어 있다. 이때 시조를 박혁거세로 볼 경우 나을은 박혁거세의 알이 발견된 나정(蘿井)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을(乙)’을 ‘정(井)’의 고유어로 파악하고 나을이 곧 나정이라고 하는 견해가 일찍이 제시되었다(梁柱東, 16쪽; 李丙燾, 49쪽). 한편 신궁의 주신을 김씨 왕실의 시조로 보는 견해에서는 나을을 김씨 족단의 발상지로 파악한 날이(捺已), 나령(奈靈), 즉 지금의 영주 지역으로 보았다(강종훈, 99~100쪽).〈참고문헌〉梁柱東, 1935, 「鄕歌の解讀, 特に願往生歌に就いて」, 『靑丘學叢』 19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강종훈, 2002,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 처음으로 사방(四方)에 우역(郵驛)을 설치하였고 : 정(亭), 우(郵), 역(驛), 전(傳) 등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중국의 교통 통신 시설들은 한대(漢代) 이후로 문서 전달의 전담 요원이 배치된 우(郵)와, 전명자(傳命者)나 사신에게 말과 같은 교통 수단 및 숙식을 제공하는 역(驛)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우의 존재는 점차 약화되고 역의 역할이 강화되었으며, 그러한 추세는 당대(唐代)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정비되었다. 이 기사를 토대로 신라에서도 당시 중국에서 우와 역이 구분되었던 방식대로 그것을 도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이 시기 우역제 운영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역에 대한 기록은 산견되는 반면, 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우보다는 역의 제도가 일반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鄭枖根, 2008,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3~24쪽).
- 해당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하였다 : 우역(郵驛)의 설치와 더불어 수리가 이루어진 관도는 대체로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공식적인 도로로 이해된다. 관도의 정비는 신라 최초의 지방관인 도사(道使)의 최초 파견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朱甫暾, 1998, 『新羅 地方統治體制의 整備過程과 村落』, 신서원, 63~64쪽).
- 월성(月城) : 신라 대부분 시기의 궁성(宮城)으로 현재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1 신라본기1 탈해이사금 즉위년(57)조의 주석 참조. 이 무렵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축조되고 북쪽의 수혈 해자가 개착된 것으로 추정된다(李相俊, 1997, 「慶州 月城의 變遷過程에 대한 小考」, 『嶺南考古學』 21;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