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8년 : 기원후 486년
▶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삼년성과 굴산성을 고쳐 쌓다 : 486년 01월(음)
- 八年, 春正月,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攺築三年·屈山二城.
- 8년(486) 봄 정월에 이찬(伊湌) 실죽(實竹)[1]을 장군(將軍)에 임명하였다. 일선계(一善界)[2]의 장정[丁夫] 3,000명을 징발해서 삼년성(三年城)[3]과 굴산성(屈山城)[4] 두 성을 고쳐 쌓았다.
▶ 내숙을 이벌찬으로 삼다 : 486년 02월(음)
- 二月, 以乃宿爲伊伐湌, 以叅國政.
- 〔8년(486)〕 2월에 내숙(乃宿)[5]을 이벌찬(伊伐湌)[6]으로 삼아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다.
▶ 왜인이 변경을 침범하다 : 486년 04월(음)
- 夏四月, 倭人犯邊.
- 〔8년(486)〕 여름 4월에 왜인(倭人)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 낭산 남쪽에서 사열하다 : 486년 08월(음)
- 秋八月, 大閱於狼山之南.
- 〔8년(486)〕 가을 8월에 낭산(狼山)[7]의 남쪽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査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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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실죽(實竹) : 신라 소지마립간대(479~500)의 장군. 소지왕 8년(486) 장군에 기용된 후 고구려와의 전투를 주도하였다. 소지왕 16년(494)에는 살수(薩水)에서 고구려군에 고전했지만, 같은 왕 18년(496)에 벌어진 우산성(牛山城) 전투에서는 이하(泥河)에서 맞선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 일선계(一善界) : 본서 권3 신라본기3 소지마립간 5년(483) 10월조 기사의 주석 참조.
- 삼년성(三年城) : 현재의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에 있는 삼년산성. 본서 권3 신라본기3 자비마립간 13년(470)조의 주석 참조.
- 굴산성(屈山城) : 현재의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혹은 청성면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조에 기산현(耆山縣)은 본래 굴현(屈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고 고려 때의 청산현(靑山縣)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청산현이 본래 굴산현이라고 하였다. 굴산성은 바로 굴산현, 즉 기산현의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굴산성이 군현제의 도입에 따라 굴산현으로 편제되었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6 청산현(靑山縣) 성곽조에는 기성산성(己城山城)이 고을 서쪽 8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91척,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고 되어 있다. 또 고적조에는 저점고성(猪岾古城)이 고을 서쪽 9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2,05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되어 있다. 각각은 현재의 이성산성(已城山城)과 저점산성에 비정된다. 이성산성에 대해서는 2015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5세기에 축조된 신라 토성으로 밝혀졌다(중원문화재연구원, 2015, 『옥천 이성산성 정밀지표조사 보고서』). 따라서 굴산성을 이성산성에 비정할 수 있지만, 삼년산성과 입지와 양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저점산성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 내숙(乃宿) : 소지마립간의 장인으로 동왕 8년(486) 이벌찬이 되어 국정에 참여했다. 본서 권44 열전4 거칠부전에 나오는 잉숙(仍宿)과 동일인이라고 한다면(李基東, 1984,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78쪽), 나물왕의 5세손인 거칠부(居柒夫)의 조부로서 나물왕의 손자라고 할 수 있으며 아들은 이찬 물력(勿力)이다.
- 이벌찬(伊伐湌) : 신라 경위 17관등 중 제1관등이다. 본서 권1 신라본기1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주석 참조.
- 낭산(狼山)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배반동, 보문동의 경계에 위치한 산. 본서 권3 신라본기3 실성이사금 12년(413) 8월조의 주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