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AD 479~500) 7년 : 기원후 485년
▶ 구벌성을 쌓다 : 485년 02월(음)
- 七年, 春二月, 築仇伐城.
- 7년(485) 봄 2월에 구벌성(仇伐城)[1]을 쌓았다.
▶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수묘를 더하다 : 485년 04월(음)
- 夏四月, 親祀始祖廟, 増置守廟二十家.
- 〔7년(485)〕 여름 4월에 몸소 시조묘(始祖廟)에 제사를 지내고 사당지기[守廟] 20가(家)를 추가로 두었다.[2]
▶ 백제가 예물을 가지고 찾아오다 : 485년 05월(음)
- 五月, 百濟來聘.
- 〔7년(485)〕 5월에 백제가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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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구벌성(仇伐城) : 현재의 의성군 단촌면 후평리에 있었던 성. 본서 권34 잡지3 지리1 상주(尙州) 고창군(古昌郡)조에 고구현(高丘縣)은 본래 구화현(仇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때에는 의성부(義城府)에 합해져 속해 있다고 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5,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고적(古跡)조에 고고구현(古高丘縣)이 현 북쪽 20리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의 의성군 단촌면 후평리 일대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2012,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169쪽).
- 몸소 시조묘(始祖廟)에 … 두었다 : 시조묘의 수묘가(守廟家)를 증치한 것을 시조묘 제사의 변화로 보는 견해가 있다(辛鍾遠, 94쪽; 나희라, 135~139쪽). 신종원은 수묘가 증치를 신궁을 설치할 즈음에 시조묘도 중국의 종묘를 본받아 정비한 것으로 보았고, 나희라는 선대 왕들을 계보 관계에 따라 정리하고 시조묘에 함께 모셔 제사하게 되면서 수묘가를 증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참고문헌〉辛鍾遠, 1992, 『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나희라, 2003, 『신라의 국가제사』, 지식산업사
- 백제가 … 찾아왔다 : 본서 권26 백제본기5 동성왕 7년(485) 5월조에 동일한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